137화 격돌 (2)
후삭이 지휘하는 벌레 종족은 원탁이 가로막고 있는 길을 거의 뚫어 내고 있었다.
선두에서 가공할 만한 힘으로 적을 참살하는 후삭.
날카로운 톱날검은 외려 일반 검보다 수월하게 적을 싹둑싹둑 잘라 내 버렸다.
상처를 내고 그걸 찢어 버리기 위해 만들어진 병기였지만, 후삭의 힘이 너무 강해서 두부 자르듯 괴물들이 토막 나고 있었다.
크르르르…….
인공적으로 배양되어 탄생한 듯한 거대 괴물.
과학자라는 인물이 만들었다는 이 괴물들은 오로지 살상을 위해 태어난 생체 기계나 다름없었다.
후삭과 같은 고위 계층은 앞에서 보이는 괴물 유전자에 벌레 종족의 것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원탁은 이런 끔찍한 것들을 만들고 있었나.’
벌레의 DNA를 사용해 만들어 낸 흉측한 괴물들. 악의적인 의도가 엿보였다.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삼킨 그는 냉정하게 날아오는 촉수들을 피하며 검을 휘둘러 모조리 잘라 버렸다.
촤자자작!
한 차례 검을 휘두른 후삭은 그대로 괴물의 심장 부분을 찔렀다.
하나 놈은 심장이 한 개가 아닌지, 심장이 꿰뚫렸어도 여전히 미친 듯이 발광했다.
쿠오오오오……!
때마침 거대 사마귀 2마리가 나타나 양쪽에서 괴물을 붙들었고, 틈이 난 순간 후삭은 순식간에 괴물 몸속으로 팽이처럼 돌면서 파고들어 안쪽을 갈아 버렸다.
또 한 마리를 제거한 후삭은 밖으로 나와 얼굴에 묻은 체액을 한번 훑어 내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무리 없이 전진할 수 있겠군.’
작은 벌레들이 보내온 정보에 의하면 앞쪽에 아겔이 소중히 여기는 자들이 잡혀 있다고 했다.
곧 밀고 들어가면 손쉽게 구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벌레 군단과 함께 앞으로 걸어가는 후삭에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푸흐흐흐, 여기까지 왔네?”
긴장감과 폭력이 감도는 전장과 대조되는 유들유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험용 고글을 쓰고 괴물들 사이에서 나타난 남자.
과학자였다.
각 군대의 수장들이 나타나자 두 세력은 전투를 멈추고 일정 거리를 두게 되었다.
후삭이 검을 들어 공간 저편에 있는 그를 가리켰다.
“(놈. 네가 원탁의 수뇌부 중 하나구나.)”
“푸흐흐, 칼 한번 귀엽게 생겼네. 메스로 쓰면 딱이겠는걸?”
“(상황 파악이 안 되는가 보군. 너흰 지금 포위되었다. 이 근방은 우리가 점령하고 있다.)”
후삭의 말대로 근처 복도는 벌레들로 쫙 깔려 있었다.
실수로라도 이 군단 가운데 떨어지면 어마어마한 벌레 때에 뼈도 못 남기고 소멸할 것이다.
그럼에도 과학자는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뭐라고 하는 거야? 이것 참, 벌레들 언어는 참 어렵다니깐. 하찮은 것들이 쓸데없이 사람 흉내나 내고 말이야, 푸흐흐.”
과학자는 후삭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인간의 말을 아는 후삭은 분노를 느꼈다.
“(명을 재촉하는군. 이 자리에서 죽여 주지.)”
그가 화난 기색을 보이자, 과학자가 두 팔을 들었다.
“어어, 화난 것 같은데. 이봐, 진정해. 어차피 덤벼도 헛수고라고. 아겔을 죽이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준비하고 노력했는지 알아?”
나아가려던 후삭의 몸이 우뚝 섰다.
그는 잠시 서서 과학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다. 아겔과 관련된 이야기를 알아서 해 주는데 듣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지금 우리 뒤에 누가 있는지 알고 덤비는 거야? 너희 벌레 종족 따윈 순식간에 박멸해 버릴 수도 있는 분들이 돕고 있다고. 멸종하고 싶어서 발악하는 게 아니면 그만두는 게 좋을걸?”
“(아겔을 죽이는 걸 돕는 자들이 있나. 그들은 누구지?)”
“음? 궁금해? 궁금해하는 것 같은데.”
과학자는 후삭의 말을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약 올리듯 익살스럽게 걸어 다녔다.
후삭은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렸지만, 과학자는 쉽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푸흐흐, 내가 알려 줄 것 같냐? 하여튼 더 이상 깝치지 말고 꺼져. 안 그럼 진짜 너희 몰살시킬 테니까.”
“(감히 나를 능멸하는가.)”
분노한 후삭이 검을 휘두를 자세를 잡았다.
과학자는 그래도 웃는 낯을 했다.
“열심히 알아봐 친구. 과연 아겔 곁에 있는 게 옳은 선택인지 생각해 보라고.”
“(입 닥쳐라!)”
후삭은 앞으로 내달릴 준비를 하면서 명령을 내렸다.
“(돌격!)”
그와 동시에 벌레 군단이 괴물들을 향해 쏟아졌다.
그리고.
파앗……!
순식간에 앞에 있던 괴물 군단이 사라져 버렸다.
적을 잃어버린 벌레 군단은 당황하여 우왕좌왕했다.
후삭은 달리기를 멈추고 검을 내렸다.
‘이게 무슨…… 눈앞에서 사라지다니?’
그는 눈을 감고 주변의 공기 흐름을 느꼈다.
그리고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니다. 놈들이 사라진 게 아니다.
자신들이 다른 곳으로 보내진 것이다.
감각을 집중하니 지금 서 있는 공간은 아까와 똑같았으나, 주변 공간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시스템 ‘변환’. 군단이 있는 공간이 통째로 다른 공간과 바뀐 것이다.
후삭은 감았던 눈을 떴다.
‘지금은 변환이 있을 시기가 아니지. 그럼 고독의 직원도 놈들과 한패란 말인가.’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은 당연히 고독을 관장하는 자들.
도대체 어떤 자들이 아겔을 죽이려는 건지.
후삭은 속으로 분개하면서도 냉정한 얼굴로 자신의 병력으로 돌아갔다.
장군들이 나와 그를 맞이했다.
“(후삭 공…….)”
“(병력을 분산시킨다. 최대한 넓게 퍼져서 공간을 장악해라. 놈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고독 본관은 끝도 없이 넓은 공간이었다, 그러나 물리적인 한계가 없는 곳은 아니었다.
이 행성 교도소의 ‘대륙’이나 ‘절지’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건물에 불과한 곳.
놈들이 공간을 바꿔 도망친다면, 도망칠 모든 공간을 포위하면 된다.
벌레들은 숫자가 아주 많으니까.
아직도 폐쇄 구역, 고치에서 벌레들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놈들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상,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본관의 모든 복도를 점령한다. 지금 당장.)”
“(예.)”
명령을 받은 장군이 물러났다.
후삭은 검을 들고 벌레들을 지휘해 다시 과학자를 쫓기 시작했다.
* * *
특수 감방.
이전엔 쉬카가 담당했던 그곳은 이젠 담당하는 교정관이 없었다.
아겔에게 권한이 넘어갔지만, 이젠 원탁이 그곳을 점령하고 있었다.
특수 감방에서 원탁의 죄수들을 이끄는 크랙슨.
7급 죄수인 그는 주술사의 명령에 따라 아겔에게 적대적이었던 죄수들을 모조리 석방하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교정관이 원탁과 손을 잡게 되어 특수 감방의 죄수를 마음껏 풀어 줄 수 있게 되었다.
“이대로라면 아겔을 잡는 것도 정말 무리가 아니겠군.”
거대한 양 수인인 크랙슨은 풀려난 죄수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모두 한 성격 하는 죄수들이었지만, 원탁의 죄수들 앞에서 함부로 행동하진 않았다.
거기에 아겔을 죽일 기회를 주겠다고 하니, 큰 충돌은 없이 전력으로 흡수하고 있었다.
‘주술사님의 계략은 참으로 치밀하다.’
그는 백수십 년 동안 철두철미하게 아겔에 대항할 전력을 모았다.
혼자서 일을 벌인 게 아니다.
원탁이란 거대 세력을 만들고 아겔을 죽이기 위해 이번 기회만을 숨죽여 기다려 왔다.
고독의 통제권을 얻고, 확실하게 아겔을 죽일 수 있도록 세력을 더욱 불리는 것.
거기에 관련된 이들이 아겔을 돕고 나서지 못하게 시작부터 차단하는 건 회생의 여지마저 남기지 않는 빈틈없는 행보였다.
마지막으로 교정관에게 접근해 고독의 통제권을 획득하기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주술사가 원하는 대로 일은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아겔은 끝이야.”
사실 크랙슨은 아겔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었다.
그저 주술사의 깊고 어두운 힘에 탄복해 그의 밑으로 들어갔을 뿐.
소문만 무성한 아겔을 실제로 만나 본 적도 없는 크랙슨이었다.
그렇다고 적의가 없는 건 아니었다.
겨우 노인네 하나가 뭐 그리 잘났다고, 이 교도소 처음부터 끝까지 떠들고 있는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만났으면 좋겠군. 내가 죽여 버리면 좋을 텐데.”
고개를 홱 돌린 크랙슨은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하러 갔다.
그러던 그에게 전령 하나가 도착했다.
“주술사님의 명이시다. 당장 특수 감방에서 죄수들을 석방하는 걸 멈추라고 하셨다.”
“뭐?”
크랙슨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반문할 수도 없는 노릇. 앞에 있는 이 자는 말을 전하는 전령일 뿐, 명령을 내린 주술사가 아니니까.
명령에는 반드시 복종해야만 한다. 그의 진노가 맛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유를 알 수 있나?”
“곧장 계획을 실행한다고 하셨다.”
“그렇군. 알겠다.”
이제 아겔을 죽이기 위해 단계로 넘어간다는 뜻. 모종의 이유로 주술사께서 시간을 앞당긴 모양이었다.
크랙슨이 감방을 열어 주던 원탁의 죄수들을 향해 손뼉을 쳤다.
“자자, 이제 그만! 주술사님의 명령이다! 석방은 그만하고 정렬해라!”
이 자리엔 하나 같이 7급의 상급 죄수들로 가득했지만, 크랙슨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없었다.
원탁의 죄수들은 크랙슨의 무력을 알고 있었으니.
그러나 예외는 있는 법이었다.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야?”
풀려난 상급 죄수 중 하나가 시비를 걸듯이 다가왔다.
그는 자신을 보라는 듯 과장된 몸짓을 하며 말했다.
“우린 아겔을 죽이기로 동의했지, 너희에게 대가리를 숙인다고 한 적 없었다. 너희가 원탁이든 약탈자든 우리에게 명령할 권한은 없다고. 그렇지 않아?”
그가 동의를 얻겠다는 듯 주위를 돌아보며 말하자, 이제 막 석방된 자 중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수 감방에서 풀려나 이제 자유를 찾았는데, 누군가의 밑에 들어간다는 건 그들에겐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크랙슨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하고 팔짱을 꼈다.
“그래서 우리의 통제에 따르지 않겠다는 거냐. 아겔을 죽일 계획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다 짰고, 너흰 손만 거드는 것인데도?”
“표현을 엿같이 하는군. 마치 우리가 숟가락만 얹는 것처럼 말하는데. 너희도 필요하니까 우릴 해방시켜 준 것 아닌가? 우리의 협력이 없다면, 곤란한 건 너희일 텐데. 애초에 원탁은 아겔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잖아?”
몇몇 석방된 죄수들이 그의 말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가 나서서 선동하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크랙슨의 여유로운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같잖은 수를 쓰는군.’
놈이 원하는 건 진정으로 아겔을 죽이려는 게 아니다. 그저 풀려난 죄수들과 풀어 준 원탁과 싸움을 보기 원하는 것일 뿐.
그의 의도대로 해방된 죄수들은 원탁의 죄수들을 향해 적의를 보이기 시작했다.
크랙슨이 팔짱을 풀었다.
두툼한 양털 사이로 감출 수 없는 근육이 꿈틀거렸다.
“불만을 갖는 건 이해한다. 그런 게 있으면 당연히 해결해야지.”
순간 그의 팔이 움직였다.
펑.
공기가 터져 나가는 소리.
그리고 그보다 늦게 곤죽이 잔해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잃은 몸이 쓰러지는 소리도.
후두둑. 털썩.
…….
엄청난 무위에 아무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크랙슨이 피가 뚝뚝 흐르는 주먹을 들었다.
“자, 해결했다. 이제 불만이 없어졌겠군. 또 불만이 있는 사람이 있나?”
“…….”
풀려난 죄수 중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같은 7급이라도 능력의 차이는 천차만별. 이 자리에서 단신으로 크랙슨과 맞서서 이길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실력 행사에 원탁 소속 죄수들도 은근히 압박감을 뿜어내 그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따르지 않겠다면 당장이라도 죽여 버릴 것처럼.
특수 감방에서 풀려나 이제야 자유를 되찾은 죄수들은 살기를 내뿜는 그들의 모습에 질린 기색을 했다.
흡족한 얼굴을 한 크랙슨은 몸을 돌리려 했다.
뒤에서 목소리만 들리지 않았다면.
“아니, 이런 미친 새끼를 봤나. 불만 하나 말했다고 주먹을 휘둘러?”
자신이 머리를 순식간에 터뜨려 죽인 죄수가 멀쩡하게 서 있었다.
터진 머리를 회복하고서.
죽었던 죄수는 목을 풀며 크랙슨을 노려봤다.
“이딴 식이면 섭하지. 아겔을 죽이겠다는 건 둘째 쳐도 감히 날 죽이려 한 건 용서할 수가 없는데?”
크랙슨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되었다.
‘뭐지? 분명 머리를 터뜨렸는데.’
머리가 터지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얼마 존재하지 않는다.
설마 슬라임 종족일까 생각도 해 봤지만, 해방시켜 준 죄수 중 고위 슬라임 종족은 없었다.
크랙슨이 머리를 굴리며 상황을 정리해 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공격당한 죄수가 두 팔을 벌렸다.
“원탁이란 이런 놈들이야! 힘을 빌려달라 해놓고 아겔을 사냥할 땐 지금과 똑같이 우릴 총알받이로 쓰겠지! 이런 놈들이랑 같이 그 노인을 사냥하자고? 정신 나간 소리!”
-옳다!
-아무리 주술사라도 이런 식으로 우릴 대하는 건 아니지!
-이딴 식이면 우리도 못 참아!
그의 선동에 죄수들이 들고일어났다.
오랜만에 자유를 맛본 죄수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다른 것들에 대해 용납하지 않았다.
크랙슨은 당황한 얼굴로 선동하는 죄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당했다…….’
압도적인 무위로 기세를 잡으려 했으나, 머리가 터져도 죽지 않은 저 죄수 하나 때문에 모든 게 틀어졌다.
공격당한 죄수가 소리쳤다.
“이 예의도 모르는 것들을 혼쭐내 주자!”
-그래!
-죽여!
-원탁이면 다냐!
특수 감방 구역이 곧 전쟁터로 변하였다.
원탁의 죄수들은 이를 악물고 그들과 맞섰고, 해방된 죄수들도 그들에게 살기가 담긴 공격을 퍼부었다.
그들을 선동했던 죄수는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와 둔갑하고 있던 모습을 풀었다.
방금 공격당해 죽은 것은 그의 분신체.
검은 깃털을 남긴 그는 싸움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속으로 웃음을 참지 못하며.
까악. 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