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40)화 (141/186)

140화 격돌 (5)

대군(大軍).

1천여 명의 상급 죄수.

하나만으로도 행성 전체를 공포로 떨게 만들 수 있는 자들이 한자리에 도열해 있었다.

오직 한 사람.

아겔라스토스라는 노인을 죽이기 위하여.

주술사는 흡족한 얼굴로 이들을 바라보았다.

‘오늘, 아겔라스토스는 죽는다.’

어둠의 사도인 그가 분신체를 만들어 하찮은 놈들과 부대끼며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백수십 년을 기다려 왔다.

지독하고도 모졌던 시간.

100년 이상을 그를 잡으려 분투했지만, 그는 마치 정말 어둠이라도 되는 것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거기에 고독의 직원들이 그를 숨겨 주었기에 카흘탁으로선 아겔을 붙잡을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다간 애꿎은 분신체만 잃을 가능성도 있었다. 고독에 분신체를 들여오는 수고를 다시 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젠 아니야. 놈은 궁지에 몰린 쥐새끼나 다름없다.’

수십 년의 기다림 끝에 원탁은 성좌 교단에도 손을 뻗었고, 대의를 이해한 자들이 합류하면서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또 하나의 어둠의 사도가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현재 어둠의 사도들은 자신들과 같은 자리에 설 자를 환영하지 않았다.

‘기업가. 네 뜻대로는 안 될 거다. 아겔이 어둠의 사도가 되도록 숨겨 주려 한 네 계획을 모를 줄 알았나.’

오직 돈을 위해 움직이는 그가 아겔과 괜한 거래를 했을 리가 없다.

그들의 음모를 알아내는 데만 해도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젠 상관없다.

아겔은 어둠의 사도가 되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할 테니까.

사도가 되는 방법은 가지각색이다.

카흘탁만 해도 주술의 사도가 되기 위해 온갖 해괴한 짓을 하고 다녔다.

각 사도들은 성좌와 공좌가 내린 시험을 통과해야만 그에 걸맞는 힘과 능력, 그리고 지위를 받을 수 있다.

그는 66번의 주술을 완성시켜, 공좌를 ‘만족’케 하는 것이 시험 과제였다.

‘아겔의 경우는 기다림이겠지. 아마 66년 동안 기다려야 하는 것일 거다. 놈이 고독에 있은 지도 64년. 벌써 65년을 바라보고 있군.’

방탕의 사도는 6,666일 동안 잠에 들지 않고 술에 취하는 시험을 통과했고, 시기의 사도는 6,666만 6,666명의 인간을 저주해 죽게 만들었다.

그 외에도 음행, 분열, 분노, 탐식 등 일곱 공좌가 있었다.

다만, 지난번 사도 전쟁으로 인한 분노의 사도가 공석.

아겔은 분노의 사도가 되려는 게 분명했다.

카흘탁은 수염을 가다듬었다.

‘기다림이란 게 시험 과제란 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역시 화는 쌓일수록 농축되는 법. 놈은 분노를 참으라는 시험을 받은 거야.’

하지만 그 분노가 터지기도 전에 놈은 죽을 것이다.

그만큼 철저히 준비했기에 주술사 카흘탁은 자신이 있었다.

“뭣하면 직접 손을 써서라도 놈을 죽여야겠지.”

실패라는 단어는 떠올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만큼 일이 틀어질 경우를 대비해 다음 수를 생각해 두어야만 한다.

쉽지 않겠지만, 이번 일이 실패한다면 직접 카라이스만 령을 침범해 고독을 부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지만.

카흘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술의 사도는 상급 죄수들 앞으로 나아가 손을 들었다.

“미개한 것들아. 귀를 열고 내 말을 들어라.”

소름 끼치는 목소리에 상급 죄수들이 움찔했다.

목소리만으로도 심령이 떨리게 하는 주술사.

이들에겐 같은 7급 죄수라도 대항할 생각은 꿈에도 꾸지 못할 만한 격차가 있었다.

이곳에 있는 건 다름 아닌 주술의 사도가 보낸 분신체였으니까.

물론 그 사실을 아는 이는 이제 얼마 없지만, 상급 죄수들은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꼈다.

“오늘, 불구대천의 원수, 아겔라스토스를 죽인다. 기뻐하라. 어둠 속에서 너희의 목을 노렸던 녹슨 칼날이 오늘 용광로에서 녹게 될 것이다.”

아겔라스토스에 의해 죽은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다.

상급 죄수들은 그의 악명을 익히 알고 있었고, 이들 중 아는 사람을 잃은 이도 있었다.

“악명은 떨치지만 한 번도 나타난 적 없는 녹슨 비수. 너희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죽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번에야말로 놈을 죽일 절호의 기회다! 그 어떤 이유든지 좋다! 놈을 죽이고 싶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손을 들어라!”

카흘탁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상급 죄수들의 감정이 고양되기 시작했다.

-죽이자!

한 죄수의 외침으로부터 시작해, 죄수들이 미친 듯이 손을 들고 외쳤다.

-죽이자! 아겔라스토스를 죽이자!

-놈이 내 친구를 죽였다!

-늙은이 주제에 뻗대는 꼴은 못 보지!

죄수들이 광란 상태에 빠져든 것을 확인한 카흘탁은 미소를 지었다.

주술은 잘 먹혀들었다.

이제 이들은 아겔을 죽이기까지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 빠져들어 고통도 도덕도 없는 상태로 오직 살의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아겔의 발목을 붙잡게 될 거다.

준비는 끝났다.

“가자. 아겔을 죽이러.”

카흘탁이 손을 들자, 죄수들은 더 미친 듯이 광포한 환호를 보냈다.

옆에 서 있던 과학자 켄드로가 킬킬거렸다.

“푸흐흐흐, 이제 시작이군요.”

카흘탁의 입가에 맺혔던 미소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잊지 마라. 아겔을 죽여야 널 여기서 꺼내 줄 수 있다.”

켄드로의 입가가 벌어지며 흉측한 이빨이 드러났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파아아아앗.

빛이 솟아났다.

동력실에 있는 페이든이 그들을 절지로 이동시키려는 절차.

주술사는 앞으로 맞이할 광경을 상상하며 빛 속에 휩싸였다.

* * *

쿠르르릉……! 쾅! 솨아아아아아…….

끝이 보이지 않을 황야에 번개와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다 해진 죄수복은 푹 젖었다. 봉두난발이 빗물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었고, 눈을 가린 붕대는 젖은 채로 위태롭게 흔들렸다.

아겔은 바위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외려 마음이 편해지는구먼.’

도망치며 살았던 수백 년이었지만, 생사의 전투를 앞둔 지금이 오히려 차분했다.

차라리 일찍 마음을 돌렸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숨죽여 살았던 예전의 모습이 미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쩌겠나. 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 그가 죽었을지 살았을지 아무도 모를 일.

중요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삶을 위한 투쟁의 순간은 언제나 있었다는 것이다.

파아아아앗……!

빛이 광야를 덮었다.

아겔이 앉은 바위를 중심으로 둘러싼 빛.

주변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환하게 나타났던 빛은 조금씩 사그라들었고.

그 빛 사이로 죄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쿠르르릉……!

천 명의 상급 죄수.

모조리 목에 7이란 붉은 낙인을 달고 있는 죄수들의 시선이 아겔에게 집중되었다.

“아겔라스토스.”

저벅. 저벅.

주술사 카흘탁.

검은 수염을 하고 있는 노인이 아겔에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오랜 기다림이었다. 널 죽이기 위해 보낸 시간은 쓰디쓴 독약 같았지.”

덥썩.

주술사의 손이 아겔의 손을 붙잡았다.

하나 그를 해치려는 듯한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단지 정말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주술사는 아겔을 대하고 있었다.

아겔도 딱히 저항하지 않았다.

“이젠 미운 정마저 들 정도야. 이렇게 널 죽일 순간이 되어서야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드는군.”

주술사는 씩 웃었다.

이 노인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두 사람 모두 수백 년을 산 노괴였지만, 서로의 생각은 알 수 없는 법이었다.

“카흘탁.”

무거운 입이 떨어지고 메마른 목소리가 들렸다.

“꽤 많이도 데려왔구나. 내가 두려운가.”

“끌끌, 네가 어둠의 사도가 되는 건 확실히 두려운 일이지. 하지만 난 지금 전혀 두렵지 않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확신하는구나.”

아겔은 카흘탁의 감정을 읽었다.

그의 마음을 지배하는 강한 확신과 승리.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아겔이 이렇게 도망칠 수 없는 상태로 있었고, 이 주변은 그를 죽일 강한 죄수들이 한가득이었으니.

카흘탁은 아겔의 손을 놓고 허리를 폈다.

“아무리 날고 기는 너라도 이번이 끝이다. 어떻게 시험을 통과하지도 않고 어둠의 권능을 쓰는지 몰라도, 그거론 한참 부족하지.”

아겔이 카흘탁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하나 묻지. 내가 어둠의 사도가 되는 게 그리 달갑지 않은가.”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카흘탁의 표정이 변했다.

“이 세계는 지금 우리의 손아귀에 있다. 멍청한 은하 정부의 노예들은 어둠의 사도들이 패퇴하여 외계로 물러갔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틀렸어. 너도 알고 있겠지. 이건 우리 사도들이 짜고 치는 판이란 걸 말이야.”

빛의 사도와 어둠의 사도.

정의를 표방하는 빛의 사도들과 악의의 화신인 어둠의 사도들은 수 세기 동안 부딪쳐 왔다.

하지만 지난 번 사도 전쟁 이후, 이들은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싸움의 근원을 제거하였으니.

빛의 사도 3명과 어둠의 사도 1명의 희생. 그것으로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이후엔 손을 잡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 어리석은 세계를 지배하는 데 합의한 상태였다.

“지금 이 시기에 네가 어둠의 사도가 된다면, 어리석은 인간들은 두려워할 테지. 그럼 귀찮게 연극을 해야 한단 말이다. 그건 사양하고 싶은 일이지.”

“오만과 기만이 도를 넘었군.”

아겔이 벌떡 일어섰다.

카흘탁은 몇 걸음 물러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끌끌, 화라도 낼 참이냐? 나쁘지 않지. 분노의 사도가 되려면 화를 잔뜩 내는 시험이라도 통과해야 하나? 궁금하군. 너에게 내려진 시험이 뭐지?”

“네가 알 필욘 없다.”

아겔이 단검을 꺼냈다.

싸우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모습이었다.

주술사의 입술이 올라갔다.

“저항하지 마라, 아겔.”

한쪽에서 과학자 켄드로가 자신의 괴물과 함께 걸어왔다.

커다란 괴물은 몇몇 사람을 구속한 상태였다.

“네 친구들을 죽게 놔둘 셈이냐?”

“…….”

성자 바를라 하돌라. 전신이 난자당한 상태로 숨만 붙어 있었다.

송곳니 쿠라스크. 손톱과 발톱이 모조리 뽑히고 그 자리가 불에 그을려 있었다.

광신도 이오베. 두 팔이 잘린 상태였다.

백작 인듀라스. 전신에 커다란 못이 박혀 있었고, 송곳니가 뽑혀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줄리안.”

아겔의 입술이 떨렸다.

그저 지나치는 수많은 인연 중 하나였을 뿐인데. 왜 이렇게 몸이 떨려 오는 걸까.

다행히 줄리안은 다른 이들과 다르게 심하게 고문당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도 거의 죽어 가는 건 똑같았다.

카흘탁이 웃었다.

“나한테 덤볐던 당돌한 녀석이지. 그거 아나? 이놈은 날 죽이려 했다. 널 위해서 말이지. 이젠 약탈자에서도 나온 모양이던데, 과연 너를 위해 모든 걸 던진 의미가 있을진 모르겠군.”

뿌드드득.

단검을 쥔 아겔의 손에 핏줄이 돋아났다.

“날 죽이고 싶다고 했지.”

촤악!

단검이 숏소드려 변화했다.

곧게 뻗은 날카로운 무기에 죄수들이 반응했다.

그들은 언제라도 아겔을 공격할 수 있는 태세를 취하고 주술사의 명령을 기다렸다.

카흘탁도 이젠 조금 긴장한 얼굴로 아겔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 목숨을 너희에게 주마.”

아겔은 검을 들어 땅에 깊게 꽂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디 와서 가져가 보거라.”

쿠구구…….

비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절지의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진동이 죄수들의 발을 떨리게 했고, 그들의 마음까지 휘청이게 만들었다.

주술사가 핏발이 선 눈으로 소리쳤다.

“쳐라-!!”

상급 죄수들의 원거리 공격이 아겔에게 쇄도했다.

기로 날린 장력과 검풍, 혹은 멀리서 공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이.

아겔이란 노인 하나에게 쏟아져 내렸다.

콰가가가가가강---!!

주술사는 직감적으로 아겔이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 있다는 걸 느꼈다.

비가 쏟아지는 날인데도 운석을 맞은 것처럼 땅이 움푹 패여 잠시간 흙먼지가 나뒹굴었다.

그러나 시야가 가리워진 건 몇 초 되지 않았다.

곧 주술사는 흙먼지 사이로 이상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껍질……?’

녹색 커다란 껍질이 아겔이 있던 자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껍질은 유령이라도 되는 듯 아겔을 보호하길 마치고 투명하게 사라졌다.

아겔은 구덩이 아래에서 아까와 똑같이 멀쩡하게 땅에 검을 박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번엔 이쪽에서 가네.”

쿠구구구구구구…….

진동이 심해졌다.

상급 죄수들은 뭔가 덮쳐 온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공격하느라 피하기엔 이미 늦어 버렸다.

그들이 딛고 있는 땅 아래에서 거대한 지네들이 위로 솟구쳐 올라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