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격돌 (8)
콰릉……!
카흘탁의 손짓 한 번만으로 하늘을 가득 채운 먹구름이 찢어졌지만, 천둥이 내는 소리는 달라지지 않았다.
마치 아겔의 운명을 고하는 것처럼 천둥은 울부짖었다.
“아겔라스토스. 지금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었는가.”
카흘탁은 보라색 불꽃이 타오르는 손을 가볍게 휘저였다.
콰릉……!
그에 따라 천둥이 치며 아겔이 이끌어 냈던 지네 형상이 무너졌다.
[키에에에엑-!]
1천여 명의 혼령을 흡수한 카흘탁의 기세는 압도적이었다. 그저 가볍게 손을 움직이는 정도로 대기가 떨려 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상급 죄수들을 휩쓸었던 지네 형상이 한순간에 허물어질 정도의 힘.
카흘탁은 권능을 휘두르는 초월적인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하나 아겔은 지네가 소멸되었다고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 남아 있는 아홉의 지네 형상을 인도해 카흘탁에게로 돌진시켰다.
[키에에에엑-!]
하늘을 메울 듯한 크기의 지네 아홉 마리가 검은 수염 노인에게 쇄도했다.
카흘탁은 마치 날아오는 돌이라도 쳐 내는 듯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손에서 타오르는 1천에 달하는 혼령의 힘.
자줏빛 불꽃이 팍 튀더니 지네 형상들을 집어삼켰다.
콰아아아앙!
아겔은 한순간 근처에 떨어지는 빗물이 전부 증발하는 열기를 느끼고 서둘러 그 반경에서 물러섰다.
치이이이익… 솨아아아아…….
수증기가 차오르는 소리와 빗소리를 뚫고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끝인가.”
주술사의 손짓 하나에 지네 형상이 전부 소멸되었다.
200여 년을 함께 한 벗, 베르미스에게 받은 힘은 카흘탁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아겔은 마지막 힘까지 짜내어 새로운 지네 형상을 끌어내려 했지만, 주술사의 힘 앞에 무용지물일 뿐이었다.
억지로 체력을 한계까지 써 가면서 새로이 지네 5마리를 불러냈지만.
콰아아아앙……!
결과는 똑같았다.
다섯, 넷, 셋, 둘…….
마지막 하나까지.
[키에에에에…….]
지네 형상은 하나도 남지 않고 주술사의 손짓에 사라져 버렸다.
상급 죄수들이 지네 하나를 속박하기 위해 무수한 희생을 했던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권능.
주술사는 그 권능이 별거 아니라는 듯 당연하게 휘두르고 있었다.
1천 명의 죄수 혼령을 배경 삼아서.
“헉헉…….”
아겔은 전력을 다한 공격이 통하지 않자, 가슴을 부여잡고 진흙탕이 된 절지의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더 이상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남은 알약 전부를 쏟아붓는다고 해도 한계에 달한 체력은 되돌릴 수가 없다.
바닥에 팔을 대고 있는 아겔에게 카흘탁이 천천히 다가왔다.
“고개를 들라, 죄인이여.”
“…….”
카흘탁은 힘이 빠진 아겔에게 다가와 그의 턱을 붙잡았다.
특별할 것 없는 흰 수염이 줄줄 자란 사내. 아니, 사내라고 말하기도 부족한 늙은 인간.
그것이 아겔이었다.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봉두난발은 처량하게 젖어 있었고, 생사를 다투는 싸움에 입가에는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눈을 감은 붕대는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적에게 목숨줄이 붙잡힌 상황에도 아겔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내가…… 왜 죄인이지.”
“이런. 그 죄를 정녕 모르는가, 아겔.”
카흘탁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저항할 의지가 보이지 않는 아겔이었기에, 카흘탁은 손수 그 의미를 말해 주기로 했다.
“너는 지금 우주의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큰 싹수이다.”
빛과 어둠의 사도가 손을 잡게 된 이유.
성좌와 공좌 이전의 존재들.
이 우주를 형성한 존재 중 하나를 사도들은 붙잡을 수 있었다.
“지금 인간들은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우리가 싸움의 근원을 속박했기에!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고 있긴 한가?”
성좌의 선택을 받은 빛의 사도들.
그리고 공좌, 혹은 악마라 불리는 자들의 선택을 받은 어둠의 사도들.
그들은 영원히 싸워야 할 것처럼 수 세기 동안 대립해 왔다.
자신들이 왜 싸우는지도 알지 못한 채로.
“이 교도소에 갇혔던 죄수들의 갑절은 넘는 수의 생명이 희생되었다. 억지로 정해진 두 모순의 결정체 앞에서.”
성좌. 성스럽다고 여겨지는 존재들.
그리고 공좌. 공허한 우주의 주인이 되는 자들.
그 아래에 있는 필멸의 존재들은 누굴 의지해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는 채로 영원한 싸움의 장에 던져질 수밖에 없었다.
카흘탁의 눈에 핏발이 섰다.
“성좌가 옳은가. 공좌가 옳은가. 그 누구도 제대로 된 답을 내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답을 찾았지. 우리끼리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이야.”
“…….”
콰릉……!
카흘탁의 말에 호응하듯이 천둥이 큰 소리로 내리쳤다.
카흘탁은 아겔의 멱살을 잡고, 얼굴을 뚫어 버릴 듯이 쳐다보았다.
“은하 정부의 우민(愚民)들을 놓고 우리가 진심으로 싸울 필요는 없었지. 연극이 필요하단 걸 깨달았어.”
빛의 사도들과 어둠의 사도들.
그들은 싸울 필요가 없었다. 사도들을 선택한 신과 악마의 존재들도 침묵하고 있을 따름이었으니.
그러니 그들은 그들만의 해결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게 싸움을 부추긴 원인을 사로잡았기 덕분이야.”
태초의 신. 그리고 태초의 악마라 불리던 자.
필멸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그중 하나를 붙잡는 데 성공했다.
아겔을 바라보는 카흘탁의 눈은 이제 거의 광기에 물든 색조였다.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돼! 죽고 죽이지 않아도 된다! 양분된 정의로 인해 누구도 피해받지 않는 세상이 실현되고 있단 말이다! 네가 새로운 어둠의 사도가 되어 이 일에 훼방을 놓지만 않는다면……!”
어둠의 사도.
그 누구도 감히 업신여길 수 없는 힘을 지닌 자.
같은 어둠의 사도라도 서로 적대할 수도 있다.
두 사도 간의 싸움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비단 둘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곧 거대해진 싸움의 규모 때문에 우주 대부분이 휘말리기 때문에.
거기에 더해 빛의 사도와 어둠의 사도가 맞붙는다면, 더더욱 전쟁의 불씨는 끄기 어려워진다.
아겔의 멱살을 잡은 카흘탁의 손이 덜덜 떨려 왔다.
“네가 이 평화를 무너뜨릴 수 있는 변수가 된다면 나는 기꺼이! 모든 걸 바쳐서 널 막을 준비가 되어 있다. 간신히 여섯으로 맞춰진 힘의 균형이 깨지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피를 토하듯 열변하는 카흘탁.
아겔은 멱살을 잡힌 채로 담담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힘의 균형…… 그럼, 사도 여섯 중 셋은 네 의견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군.”
“…….”
아겔의 중얼거림에 카흘탁의 입이 닫혔다.
연극처럼 보이는 평화임에도 진정 그것에 참여하는 자들이 있는 반면, 거칠게 반대하는 자들도 똑같은 숫자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아겔의 창백한 입술이 떨어졌다.
비에 젖기 전부터 그의 입술은 전혀 떨리지 않고 있었다.
“세상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억지로 얻어 낸 평화에 무슨 의미가 있지. 평화란 이름으로 너흰 우주를 제멋대로 착취할 따름이겠지.”
사도란 이름에 감히 대항할 존재는 이 우주에 없었다.
그 이름값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기에.
빛의 사도가 한마디 말을 하면 우주민들은 뜨겁게 반응했고, 그에 대항할 수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아겔이 카흘탁을 향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언제까지 신을 붙잡아 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
아겔의 멱살을 잡고 있는 카흘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째서 이 노인이 알고 있는 것일까.
필멸자들이 불멸자를 사로잡아 속박한 일.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한 불멸의 업적을 말이다.
“그걸 네가 어떻게…….”
점점 웃음기가 사라지는 카흘탁과 달리 아겔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처음으로 웃는 아겔의 낯을 본 카흘탁은 전신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어둠의 사도가 되려는 나인데, 그걸 모르겠나.”
“갈! 그건 우리를 제외하곤 아무도 모르는……!”
“악마들이 정말 가만히 있었다고 생각했나 보군.”
“아, 악마들이 말해 주었다고……?”
카흘탁은 거기에서 더 말할 수가 없었다.
악마의 활동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그들은 불멸의 존재. 사람의 오성(悟性)으로는 인식조차 하기 어려운 초월적인 존재들이다.
어둠의 사도인 카흘탁도 자신의 공좌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모른다.
악마는 아무 말도 해 주지 않기에.
빛의 사도들에게 신탁을 내리는 성좌들과 달리 오히려 악마는 처음 만남을 제외하면 오로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런 악마들일진대 아겔은 자신이 그들과 대화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좌들의 어머니. 질서를 구속한다고 악마들이 좋아하리라 생각한다면, 너의 착각이다.”
팍!
멱살을 잡히고 있던 아겔이 카흘탁의 손을 쳐 냈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아겔은 재빨리 단검을 휘두르려 했다.
카흘탁은 천천히 자신의 목을 향해 다가오는 칼날을 바라보다가, 맹렬한 움직임으로 아겔의 팔을 쳐 냈다.
“으아아아아악!”
비명 같은 소리를 토해 내며 형상화된 기를 내지르는 카흘탁.
그 엄청난 힘이 아겔의 전신을 두드리며 절지의 땅에 내리꽂혔다.
콰아아아아앙……!
어느새 빗줄기는 멈추었지만, 아직 진흙탕인 절지의 땅에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났다.
운석이 떨어졌다고 해도 믿을 법한 커다란 구멍.
그 넓은 공간 한가운데로 카흘탁의 핏발이 선 눈이 꽂혔다.
“어떻게…….”
벌어진 결과에 카흘탁의 얼굴이 낭패감으로 물들었다.
아겔은 거대한 구덩이 한가운데서 멀쩡하게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죽질 않는 거냐… 너는…….”
지네 형상을 휘두르느라 한계에 봉착했던 노인은 어느새 숨을 회복한 모습이었다.
그가 평지로 올라설 때까지 카흘탁은 아무런 공세도 취할 수가 없었다.
“너는…… 도대체 너는… 누구지……?”
그저 아겔이란 존재에 대해 의문밖에 던질 것이 없었다.
의문은 곧 분노로 이어졌다. 알지 못하는 미지의 것에 대한 분노.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것에 분노의 감정이 불일 듯 카흘탁의 가슴속에서 솟구치고 있었다.
“아겔라스토스……!”
콰아아앙……!
카흘탁은 아겔을 향해 빠른 속도로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자줏빛 불꽃에 둘러싸인 주먹은 아겔의 몸에 닿았지만, 방금 땅을 부순 것과 같은 위력을 내진 못했다.
마치 맨손으로 바위를 친 것처럼.
아겔은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는 주름진 손을 들어 카흘탁의 손목을 붙잡았다. 자줏빛 불꽃이 팍 하고 꺼져 버렸다.
혼령의 힘을 쓸 수 없다는 게 느껴지자마자, 카흘탁의 눈이 커졌다.
“……!”
“질서가 무너지면 혼돈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구나. 내가 누구냐고 물었느냐.”
아겔이 눈 주위에 두르고 있던 헐렁한 붕대를 북 찢어 버렸다.
그의 맨얼굴을 본 카흘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바로 혼돈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