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48)화 (149/186)

148화 손길 (3)

아겔은 현실로 돌아왔다.

악마와 대화한 이후, 그는 들었던 내용을 조용히 곱씹었다.

시간이 되면 알게 될 내용이었지만, 마침 기회가 생겼으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겔은 문득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눈이 없는 그가 느끼기로는 줄리안의 병실에 자신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

타이룽, 슈리오센은 원래부터 같이 왔지만.

방금 누워 있던 환자 4명까지 쫄래쫄래 쫓아온 모양이었다.

적막으로 물든 병실엔 규칙적인 줄리안의 호흡 소리와 어느새 경고 신호가 멈춘 환자감시장치에서 심박을 나타내는 반복적인 기계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사육사랑 소장은 그렇다 치고, 다친 사람들이 왜 여길 와 있는지 의아한 아겔은 그들에게 물었다.

“자네들은 왜 여기에 있는가?”

“…….”

4명의 환자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 못 할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방금 일어난 일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그랬다.

쿠라스크가 손톱 빠진 손가락으로 줄리안을 가리켰다.

“바, 방금 뭘 한 거야?”

“뭘 말인가?”

“아, 아니. 저 새끼 어떻게 살렸냐고.”

덜덜 떨리긴 했어도 쿠라스크의 손가락은 정확하게 줄리안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이에나 수인만 본 게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모두 아겔에게 똑같은 것을 묻고 싶었다.

줄리안을 어떻게 살렸는지.

마피아킹이 악마와 거래했다는 사실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악마와 거래하면 막강한 힘을 얻을 수 있지만, 수명이 깎이고 영혼까지 빼앗기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이는 불가항력.

그래서 타이룽은 줄리안을 제힘으로 되살릴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의료 기술이 좋아도, 최고의 약이 있어도 악마가 영혼을 거둬 가는 건 막을 수 없었기에.

그런데 지금 그 일이 여기서 일어났다.

바로 줄리안의 손을 붙잡고 있는 아겔로부터.

아겔이 뭐라고 말하려 하자, 쿠라스크가 말했다.

“은근슬쩍 넘어갈 생각하지 마, 영감탱이. 내가 다 봤어. 여기에 있는 눈깔들이 다 당신을 보고 있었다고. 서, 설명해. 어떻게 그놈이 아직도 살아 있는 거야. 분명 숨 넘어가기 직전이었는데…….”

줄리안의 죽음을 바라는 사람은 딱히 없었기에 그가 살았다는 것을 문제 삼는 게 아니었다.

문제는 어떻게 악마로부터 줄리안을 구했냐는 거다.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일일 텐데.

아겔이 차분하게 손을 들었다.

“진정하게, 쿠라스크. 나는 괴물 같은 게 아닐세.”

“지랄. 평범한 사람이 상급 죄수 천 명을 다 찢어 버리고, 영혼 가지러 온 악마를 잘도 내쫓겠다. 차라리 신이라고 하지그래? 그게 더 신빙성 있을 것 같은데.”

쿠라스크의 말에 모두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이에나 수인은 또 이 새끼들이 욕하려는 줄 알고 눈살을 찌푸렸으나, 예상과 달리 욕이 날아오진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은 생각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생각했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쿠라스크는 그중 자신에게 가장 큰 악담을 퍼부었던 이오베를 우물쭈물한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뭐, 뭐……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냐?”

“아니야…….”

이오베는 오히려 잘 말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알고 있으니. 사실 난 아겔 영감님을 신으로 모시고 있었다.”

“……!”

갑작스러운 광신도의 신앙 고백에 모두의 눈이 커졌다.

성좌의 힘을 사용하는 이가 사람을 신으로 모시다니.

이오베는 아겔의 눈치를 보았다.

자신이 아는 것을 말해도 되는지. 그리고 곁에 있는 성자는 뭘 말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두 사람은 알고 있었고, 나머지는 모르는 기색이었다.

아겔은 이오베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설명하기엔 좀 그런 감이 있었으니.

이오베가 허락을 받고 입을 열었다.

“아겔 영감님은 어둠의 사도가 되려 하신다.”

폭탄 같은 선언에 병실은 침묵만이 감돌았다.

처음 사실을 안 자들은 충격에 빠져 줄리안의 호흡 소리조차 잊히는 듯했다.

쿠라스크는 놀란 와중에도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야, 성자. 그리고 미친 광신도야. 너흰 어떻게 알고 있었냐?”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영감님이 말해 주셨다.”

“어르신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인데, 나와 함께할 수 있느냐고.”

“난 왜 안 말해 줬냐?”

바를라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저야 모릅니다. 어르신의 신뢰를 받지 못해서가 아닐까요?”

“시벌…….”

쿠라스크는 고독의 간수인 타이룽과 슈리오센의 표정도 살폈다.

“니네도…… 모르셨으세요?”

어중간한 존댓말에도 아직 충격에 빠져 있어 눈치채지 못한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장이 입을 열었다.

“추측일 뿐이었지. 확답을 듣게 되니 어처구니가 없군. 내가 어둠의 사도가 되려는 자를 보호하고 있었다니.”

“…….”

소장의 시선에도 아겔은 묵묵부답일 뿐이었다.

세상을 파멸시키려는 자, 어둠의 사도.

그런 괴물이 되려는 자를 자신이 고독에서 보호해 주었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걸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 어이가 없었다.

의심이 생겨난 것은 최근이었고, 확신이 든 건 지금이었다.

자신의 무신경함에 탄식을 내뱉는 슈리오센이었다.

“뭐, 그러니 이상했던 몇 가지가 확실해지는군.”

“그게 뭔데.”

쿠라스크가 자연스럽게 질문하자, 슈리오센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에 하이에나 수인은 바로 눈을 깔았다.

감히 10급 능력자 앞에서 제멋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손짓 한 번에 머리가 으스러질 수도 있으니.

소장은 자리에 있는 자들을 한 번 훑어보더니, 다시 아겔을 바라보았다.

“이거 이대로 끝내선 안 되겠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

“아겔, 이놈들 표정이 안 보이겠지.”

자리에 있는 인듀라스, 이오베, 바를라, 쿠라스크, 그리고 타이룽.

이미 알고 있던 자들도 있었지만, 몰랐던 자들은 뭐라도 아겔에게 묻고 싶다는 눈치였다.

어둠의 사도가 되려는 자를 보는 건 처음이었으니.

“그냥 보내기엔 이놈들이 아쉬워할 것 같아서. 그래도 한배를 탄 모양인 것 같은데, 이야기는 좀 나눠도 괜찮지 않나. 나도 궁금한 게 좀 있고.”

“아, 그렇군.”

이때까지 웬만하면 자신에 대한 건 이야기하지 않고 살아왔던 아겔이었다.

하지만 이들에게까지 숨길 필요는 없었다. 감당할 수 있을 정도는 말해 줘도 좋을 것 같았다.

아겔이 편하게 의자에 앉았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게.”

쿠라스크가 손을 번쩍 들었다.

“영감탱이. 어둠의 사도가 되면 세상을 파멸할 거야?”

“그거야 나도 모르는 일일세. 세상이 내 뜻대로만 되는 것도 아니고.”

아겔의 대답에 모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노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세상을 파멸시킬 자처럼 보이던가?”

“어.”

“…….”

쿠라스크의 대답에 이오베가 주먹으로 대가리를 후렸다.

바를라가 진중한 눈으로 말했다.

“전혀요. 어르신은 세상을 파멸시킬 분이 아니십니다. 큰 힘에 큰 책임이 따른다는 것도 알고 계시죠. 전 어르신이 그럴 분이 아니란 걸 확신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서 어르신과 대화하고 있지도 않았겠죠.”

이오베도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쿠라스크가 다시 손을 들었다.

“왜 어둠의 사도가 되려는 거야?”

“그 이유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 없구먼. 모르는 게 낫네.”

대답에 충격을 받은 건 슈리오센이었다.

자신만큼은 들을 자격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아겔은 어림도 없다는 듯 단호한 표정이었다.

슈리오센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 말하지 않을 셈인가, 아겔.”

“그걸 알게 되면 자네 주인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

“…….”

고독의 주인에 대해 언급을 하자, 소장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감히 주인님에게 반기를 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

슈리오센은 아쉽다는 듯 입맛만 다셨다.

“듣고 싶었는데.”

“이건 말해 줄 수 있지. 내가 어둠의 사도가 되면 뭘 할 것 같은가?”

쿠라스크가 말했다.

“이 끔찍한 교도소에서 탈출하겠지?”

“그건 당연한 거고.”

여기선 이오베가 답했다.

“썩어 빠진 성좌 교단에게 단죄를 내리시겠죠.”

광신도의 말에 자리에 있던 전원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가 광신도라 불리게 된 것도 성좌 교단에서 파문당했기 때문이다.

이오베라면 그 이유를 알 법도 했다.

아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 중 하나일세.”

이미 알고 있던 바를라는 이 질문을 마무리하듯이 말했다.

“다른 이유는 저희가 감당할 수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잘 알아들었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어르신. 저희의 거취야 이제 결정이 되었는데, 어르신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나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네. 당연히 남은 시간은 여기서 보내야지.”

어둠의 사도가 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란 걸 눈치채지 못한 자는 쿠라스크밖에 없었다.

“성좌 교단 놈들이 당신 죽이려고 사람 보냈는데, 그래도 이곳에서 가만히 있겠다고?”

이들은 고독에서 원탁이 움직인 전말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겔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친구들이 다 여기에 있는데, 어딜 간단 말인가. 그리고 상황이 그때와 달라졌네. 고독을 감시하는 성좌 교단의 정거장이 파괴되었지. 난 이곳에 있어야 하네.”

“히끅…….”

쿠라스크는 그 말을 듣고 딸꾹질했다.

고독은 은하 정부와 성좌 교단이 관리·감독한다.

새삼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일에 연루되었는지 깨닫기 시작하는 그였다.

“제기랄…… 살긴 힘들겠네… 내가 어둠의 사도랑 엮일 줄이야…….”

“아직은 아닐세. 어쨌든 더 궁금한 건 없나.”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더 묻고 싶은 것이 딱히 떠오르지도 않았고, 가장 궁금한 것은 답해 주지 않았으니.

자리를 파하려는 듯 아겔이 일어섰다.

“환자의 안정에 피해가 가겠구먼. 궁금한 게 있으면 나중에 날 따로 찾아오게. 대답해 주지. 이만 나가세.”

아겔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소장을 제외하고.

모두가 병실에서 나왔지만, 슈리오센만은 아겔을 주시하고 있었다.

“왜. 따로 할 말이 있는가, 소장.”

“……그래.”

슈리오센은 침착하게 품속에 있던 병 하나를 꺼내서 들이켰다.

한껏 알코올을 들이켠 그는 아겔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아마 저 녀석들도 묻고 싶었을 테지만, 그렇지 않았지. 의문은 들었겠지만, 물을 용기가 없었을 테니까.”

“…….”

“하지만 난 묻겠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 아겔.”

“뭐가 이상하지.”

“어둠의 사도가 된 것도 아닌데. 아니, 하물며 어둠의 사도일지라도.”

슈리오센이 손을 뻗었다. 그는 앉아 있고, 아겔은 서 있었어도 키는 슈리오센이 더 컸다.

뻗어진 팔은 아겔의 어깨에 올려졌다. 솥뚜껑 같은 손은 아겔의 어깨 전체를 덮고도 남았다.

“악마를 도대체 어떻게 내쫓았다는 말이야.”

아겔은 침묵했다.

소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한 자신의 감정이 그대로 아겔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일부러 신체를 접촉했다.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드러내려고.

물론 그러지 않아도 이 노인은 알 수도 있겠지만.

왠지 지금은 이래야 할 것 같았다.

“어떻게 악마를 내쫓을 수 있는지 알고 싶나?”

소장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겔의 말은 아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같은 톤이었는데도 마치 뭔가에 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노인이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반대로 아겔이 슈리오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나와 거래하지. 알고 싶은 걸 알려 주겠네. 물론 대가가 따르겠지만.”

그 순간, 슈리오센의 몸이 감전된 것처럼 한차례 찌르르 울렸다.

자신의 주인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던 게 지금 생각났으니.

-악마와 거래하지 마세요.

소장은 천천히 아겔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선 슈리오센은 아무 말 않고 병실에서 나갔다.

문을 여는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아겔은 조용히 미소 짓고는 그 뒤를 따라 나갔다.

* * *

고독에서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

5년이란 시간. 아겔은 정글 한쪽 바위에 앉아 과일을 씹고 있었다.

“헉헉… 다시…….”

“헉헉…….”

그의 눈앞에선 두 사람이 서로를 죽일 듯 바라보며 싸움을 재개하려 했다.

어느새 목에 7이란 낙인이 새겨진 안톤과 아리세이아였다.

아겔의 옆자리에선 건강하게 몸을 회복한 아리스가 과일을 깎고 있었다.

“할아버지. 산책 가실래요?”

“먼저 가려무나. 곧 따라가겠다.”

“네.”

아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총총걸음으로 숲에 들어갔다.

아겔은 수련하는 두 사람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 다 형상화가 엉망이구나. 한 수 보여 주마.”

순식간에 아겔의 왼팔에선 푸른 불꽃이, 오른팔에선 시린 한기가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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