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49)화 (150/186)

149화 수련 (1)

아겔의 왼팔에는 푸른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안톤의 영혼을 취했기에 그의 힘을 가져와 사용할 수 있었다.

아겔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너희가 이 경지에 발을 디딘 것은 이제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너무 큰 것만을 바라보고 있구나.”

진리는 아니지만, 대체로 7급의 능력자가 되면 기의 형상화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봉인이 아니었다면 이들은 훨씬 높은 수준의 실력자였겠지만, 급수와 상관없이 기의 형상화는 아겔에게 지금 처음 배우는 것이었다.

아겔의 얼굴이 안톤에게 향했다.

“안톤. 내가 전에 한번 보여 줬었지.”

“예. 그렇습니다.”

“너는 지금 그것에 너무 매몰되고 있다.”

일전에 정글을 침략했던 ‘화산’의 약탈자들.

타르타스의 수하들을 내쫓을 때, 안톤의 힘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아겔의 전신을 푸른 불꽃이 감쌌고, 거인의 형상이 되었다. 마치 개미를 짓밟는 듯한 거대한 위용은 안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 형상을 자꾸만 따라가게 되었다.

“처음부터 모든 골조를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나씩 확실하게 쌓으면서 여력이 남을 때마다 다음 것을 쌓아야지. 그리고 꼭 똑같이 따라 할 필요도 없다. 내가 보여 준 건 한 가지의 갈래일 뿐이야.”

아겔은 아리세이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도 마찬가지다.”

이제 투기장 경기가 사라진 고독. 성좌 교단과 척을 지게 되었기에 그 누구도 고독의 투기장에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그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사라진 아리세이아는 아겔과 함께 수련을 거듭했다.

6급이었던 그녀는 스스로 약속했던 대로 7급으로 성장했고, 성취는 일취월장하는 듯하였으나 역시 형상화에서 막혔다.

처음 하는 것이라 요령이 없기도 했고, 아겔의 말처럼 뚝딱 해낼 수 있는 일도 아니었으니.

시간이 필요했다.

“7급이 되었다고, 6급이었을 때와 싸우는 형식이 달라지는 게 아니다. 항상 말하지만, 숫자는 숫자일 뿐. 똑같이 싸우나 여력이 더 늘어 간 것뿐인 게야. 거기서 남아도는 힘을 형상화로 사용하는 것뿐이다.”

아겔은 먼저 안톤의 것을 보여 주었다.

서서히 그의 몸에 타오르기 시작한 푸른 불꽃.

심장으로부터 뻗어 나간 불꽃은 전신을 태우기 시작했고, 이내 그 화염의 세기가 점점 강해지더니 색감이 진해졌다.

화륵……! 화르륵!

두 사람이 대련하느라 완전히 흙바닥이 된 정글 공터에 아겔의 몸에서 튀어나온 불꽃이 땅으로 튀었다.

튀어 나간 불꽃은 땅에 붙어 모래를 녹여 버렸다.

안톤은 푸른 불꽃을 오직 완력의 힘으로 치환하지만, 아겔은 온도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일전의 거인의 모습을 보여 줬던 것과 달리 이번에 아겔의 몸은 커지지 않았지만, 훨씬 뜨거운 기운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이제 알겠느냐. 방법도 표현도 달리할 수 있다.”

안톤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형상화는 힘의 표현일 뿐.”

“그래. 일전에는 거인의 형상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지.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이다.”

화륵!

순식간에 불이 꺼진 아겔의 몸에서 이번엔 스산한 한기가 새어 나왔다.

공기마저 얼어붙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허공에서 나타난 수십 개의 얼어붙은 검이 안톤과 아리세이아를 향하고 있었다.

“그 어떤 형상이라도 상관없다. 형상은 방법일 뿐이니.”

어느새 두 사람을 포위하고 있던 검들이 한데로 모여 거대한 얼음 고목을 형성하였다.

마치 진짜 나무처럼 땅에 뿌리를 박아 넣고 주변의 모든 것을 잡아먹을 듯 쭉쭉 뻗어 나가던 얼음 고목은 정글의 나무들보다 훨씬 크게 자라났다.

얼음 고목이 뿜어내는 냉랭한 기운에 그 자리에 있던 세 사람의 입에서 입김이 흘러나왔다.

“상황과 환경, 상대와 자신. 그것에 따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하나에 집착하지 말고.”

콰드드드드득!

주변을 한기로 잠식하고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했던 고목은 이번엔 순식간에 압축되기 시작하더니, 아겔의 손안으로 들어왔다.

주름진 손바닥 위에 농밀한 파란색을 띠는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거대한 얼음 고목이 압축된 만큼 엄청난 강도를 자랑할 것 같았으나.

후.

아겔의 입김 한 번으로 꽃은 마치 공기처럼 흐려지더니 바람에 휘날려 사라졌다.

두 사람은 일생일대의 기이한 장면을 보는 듯이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그 모든 장면을 바라보았다.

아겔이 뒷짐을 진 채로 말했다.

“신성력, 마기, 마나라 불리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마법사들의 마법. 결국은 모두 비슷하다. 총체적으로 ‘기’라고 불리는 것들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차이일 뿐. 명심하거라. 그중 가장 느리나 가장 훌륭한 방법이 바로 천천히 단단하게 쌓는 것이다. 알겠느냐.”

“예, 어르신.”

“감사합니다, 영감님.”

두 사람은 바로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내면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깨달은 것을 내면에서 정리하려는 것이다.

말하고 나서 아겔은 자신의 말에 어폐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힘을 쌓는 방법은 항상 지루하고 긴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 지금은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이토록 긴 평화가 이어지리라 생각하지 못한 만큼, 남은 시간 동안 얼마나 큰 폭풍이 밀어닥칠지 모르는 일이다.

근심을 접어 놓은 아겔은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산책을 나간 아리스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

.

.

아리스는 제 언니와 다르게 아겔에게 영혼을 바치진 않았지만, 그게 아겔과 어울릴 수 없는 조건이 되진 않았다.

시원한 향을 따라간 아겔은 금세 아리스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금방 오셨네요, 할아버지.”

“못난이들 가르치느라 늦었다. 걷자꾸나.”

아겔은 조용히 아리스와 함께 숲에 난 길을 걸었다.

근방의 정글은 이미 살기 좋은 형태로 가다듬은 상태였다. 죽고 죽이던 예전의 시스템과 환경은 이제 없다.

오직 다가올 싸움이 있기 전, 잠시라도 편히 살 수 있도록 직원들이 배려해 준 결과였다.

싱그러운 풀 냄새와 새 지저귀는 소리. 맨발에 착 감기는 부드러운 흙의 감촉이 느껴졌다.

시각만 제외하고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는 아겔은 잠자코 그 감각들을 만끽했다.

아리스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이 말없이 발걸음을 맞추어 걷고 있었다.

‘이 평화도 길지 않겠지.’

성좌 교단은 기업가의 파격적인 행태에 비난을 쏟아붓고 있었다. 은하 정부도 마찬가지로 가재는 게 편이라는 듯 똑같은 행보를 보였다.

명분이 있으니, 당장 고독을 수비하는 기업가의 함대를 쳐도 되겠으나 예상과 다르게 고독에서 5년이 흐를 때까지 적들의 움직임은 없었다.

그저 연일 카라이스만령을 공격해야 한다는 이야기만 나돌 뿐.

겁먹은 개가 짖는 듯한 모양새였으나, 그들은 실제로 전쟁을 행할 무력이 있다는 걸 간과해선 안 된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 항상 마음의 준비는 해야 했다.

고독의 주인, 카라이스만은 계속 이어지는 대치에 오히려 우쭐거리는 모양이었다.

그처럼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한 귀족들은 은하 정부와 성좌 교단의 압박 속에서 아직도 멀쩡히 살아 있는 그를 보고 생각이 바뀌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 드넓은 우주를 지배하는 두 세력이 사실은 별거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물론 잘못된 생각이지만, 두 세력의 대응이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고 있었다.

‘싸움이 커지겠구나.’

시간이 되어 전쟁이 나면, 그 부산물을 받아먹기 위해 승냥이 같은 놈들이 움직일 것이다.

그 와중에 아겔이 아는 사람들이 휘말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가 여기 남아 자신과 관련된 자들을 돌보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저 자신과 한번 엮였다는 이유만으로도 추적당하고 최악은 잡혀서 고문에 살해당할 수 있다.

적어도 자립할 만한 힘과 환경 정도는 만들어 주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도 짧지 않은 교도소 생활에서 만난 인연인데, 아무 책임감 없이 헤어지긴 아쉬웠다.

상념에 빠진 아겔에게 아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생각하세요? 안색이 안 좋으세요, 할아버지.”

“아무것도 아니란다. 아까 급하게 먹은 게 체했나 보구나.”

아리스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가끔 할아버지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드는 거 아세요?”

“무슨 생각?”

“혼자서 너무 많은 짐을 지고 가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요. 허리도 안 좋으신데.”

“끌끌, 그게 얼굴에 보이느냐?”

“그럼요. 남들은 몰라도 저는 알아요. 마치 세상의 존망을 짊어지고 있는 것 같은 그런 표정인걸요?”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번 전쟁으로 이 우주가 위태로울 수 있었으니.

그러나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패권을 가진 자들은 어차피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막아서느냐 아니면 멸망하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걸음을 멈춘 아리스가 아겔의 손을 붙잡았다.

“마음이 불편하시거나 그럴 땐 같이 짐을 지진 못하더라도 얘기 좀 해 주세요. 보고 있는 저부터 답답해요.”

“말뿐이라도 고맙구나.”

하나 아리스의 바람과 달리 아겔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나도 참 부족하구먼.’

근심에 빠져 주변 사람들도 끌고 내려가는 것을 보니. 마음을 다스려야 할 것 같았다.

“오늘 산책은 이 정도로 하자꾸나. 수련하는 언니 밥 좀 챙겨 주고.”

“네, 할아버지. 저녁 꼭 드셔야 해요.”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을 이해한 아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걸어온 길로 사라졌다.

아겔은 혼자 남아 앉을 만한 바위를 찾아 헤맸다.

군데군데 우툴두툴한 바위 하나를 찾은 아겔은 그 위에 걸터앉았다.

아겔이 조용히 자리 잡자, 숲도 고요해졌다.

아직 해가 떠 있는 시각이었지만, 마치 밤이 온 것처럼 짐승들의 소리와 심지어 풀벌레 우는 소리까지 잦아들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지나쳤던 인연들을 가늠해 보았다.

몇몇은 살아남았지만, 대다수가 죽음에 이르렀다.

호의를 지니고 있던 자도 적의를 지니고 있던 자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떤 자는 만나자마자 죽이려 했고, 어떤 자는 입을 떼기도 전에 호의를 갖고 접근했으니.

객관적인 무력이 아겔보다 뛰어난 자도 있었다.

베르미스만 해도 현재 아겔을 가볍게 뛰어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봉인을 당하고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그를 편히 보내 줄 수 있었다.

물론 그때는 그랬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다.

‘5년. 밖에선 10개월이 흘렀구먼. 바깥 시간으로 두 달 남았구나.’

새삼 시간이 굉장히 빠르게 흐른다고 느껴졌다. 고독에서 수백 년을 보냈지만, 마치 한순간인 것처럼 느껴졌다.

안전을 택했기에 오래 걸렸지만, 이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었으리라 지금도 확신했다.

이제 1년.

1년만 조용히 보낸다면,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촤아아악……!

흙바닥에 발이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수풀에서 줄리안과 생소한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났다.

이미 기척을 파악한 아겔이었지만, 굳이 자리에서 일어서진 않았다.

줄리안이 죽일 듯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고, 입가에 붕대를 두른 사내도 그를 경계하는 듯했다.

아겔이 입을 열었다.

“이게 누구신가.”

“…….”

사내는 경계 태세를 좀 풀려는 기색이었지만, 줄리안은 여전히 그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아직도 궐련을 물고 있는 줄리안이 말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영감을 건드리면 죽이겠다.”

“그러려고 온 게 아니야, 줄리안.”

입을 가린 붕대는 목과 가슴 아래까지 덮고 있어 낙인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사내는 줄리안과 동수를 이룰 정도의 강자인 듯 보였다.

사내는 아겔에게 다가갔고 줄리안이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아겔이 손을 들자, 줄리안은 권총을 내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사내는 입을 가리고 있는 붕대를 풀었다.

마치 상어와 같은 톱날 이빨이 가득 박힌 죽 찢어진 입가가 드러났다. 치렁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눈동자가 없는 백색의 눈이 아겔을 주시했다.

“거래를 하러 왔다, 아겔라스토스.”

“호오, 그래? 뭐든지 힘으로 빼앗는 위인께서 나와 정당한 거래가 하고 싶었나?”

아겔은 여유로운 태도로 사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내가 말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해서 네게 왔다. 지금 고독은 완전히 네 손안에 있는 거나 다름없지. 나와 내 수하들을 석방해라. 대가는 치르겠다.”

“비싼 걸 바라는구먼.”

아겔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입을 열었다.

“한데, 탈라스. 거래라니.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구먼. 그간 나를 잡아 죽이기 위해서 찾아다니지 않았나.”

“…….”

“상황이 바뀐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모르겠나. 자네가 지금 내 앞에 와서 해야 할 말은 거래하자는 말이 아닐세.”

탈라스의 백색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그럼, 무슨 말을 했어야 하지.”

아겔이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살려 달라고 빌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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