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51)화 (152/186)

151화 수련 (3)

줄리안이 안톤을 향해 정면으로 권총을 겨누었다.

리볼버가 불을 뿜는 순간, 쿠라스크가 뒤에서 안톤을 받쳐 주고 안톤은 방패를 들어 총탄을 막아 냈다.

콰앙-!

빈틈이 생긴 줄리안에게 이오베가 달려들었다.

신성 보호막으로 전신을 감싼 이오베였지만, 그의 메이스는 줄리안의 권총에 간단히 가로막혔다.

구둣발로 이오베의 턱을 올려 찬 줄리안은 곧바로 아리세이아의 한기 가득한 검을 맞이해야 했다.

가슴을 찌르고 들어오는 검을 몸을 틀어 피한 후, 권총을 쥔 손으로 뺨을 쳤다.

입이 터진 아리세이아가 날아가는 동시에 안톤의 전투 망치와 쿠라스크의 뾰족한 손톱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줄리안은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왼팔을 들어 막아 냈다.

콰앙--!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발목까지 땅에 파고들었다.

“끄응…….”

무식한 후배들이 힘만 셌다. 그 와중에 오른쪽 허벅지는 탈라스의 세뇌 능력에 걸려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육체의 주도권을 빼앗고 나아가서는 정신까지 굴복시키는 탈라스의 능력.

이것에 대항하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핸디캡이 너무 많은 매치였다.

“짜증 나는군.”

하나 그뿐이었다. 진심으로 눈앞에서 자신을 공격하는 이 4명의 죄수에게 살의란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도 아겔에게 영향을 받은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옛날이라면 가차 없이 앞을 가로막는 건 전부 죽여 버렸을 텐데.

문득 줄리안은 적을 걱정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헛웃음을 지었다.

‘웃음밖에 안 나오는군.’

알 수 없었단 말로 부정하고 싶은 건지, 정말 아겔에게 영향을 받은 건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는 옛날과 달라졌다는 사실뿐이었다.

결국, 탈라스의 말처럼 줄리안은 이들을 죽일 수 없었다.

벌떡 일어난 이오베와 아리세이아가 다시 달려오는 순간.

줄리안은 어떻게 그들을 막아 내야 할지 빠르게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도와주랴?]

‘영감?’

줄리안은 이를 악물고 옷이 더러워질 것을 각오한 채로 땅을 뒹굴었다.

자신을 내리누르고 있던 안톤과 쿠라스크는 중심을 잃고 땅바닥을 나뒹굴었고, 줄리안은 날아오는 검과 메이스를 차례대로 쳐 냈다.

한순간 틈을 얻은 줄리안은 자리에서 벗어났다.

“뭐야, 다 보고 있었나?”

[당연하지. 그날 이후로 네 영혼은 내 것이 되었는데.]

아겔이 줄리안을 분열의 공좌로부터 구해 준 날로부터 그의 영혼은 아겔의 것이 되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기지 않은 대가라고 했나. 딱히 줄리안에게 해가 되는 일은 없는 것 같아서 별일 아닌 줄 알았는데, 이렇게 멀리서도 대화가 가능할 줄은 몰랐다.

[후배들 상대로 고전하는구나.]

“……어린놈들을 봐주고 있을 뿐이야.”

[안톤은 너보다 나이가 많을 텐데?] 

“약하면 동생이지.”

노인이 웃는 듯한 감정이 줄리안에게 전해졌다.

영혼을 바친다는 게 이런 뜻인가 생각하던 줄리안은 또 날아오는 전투 망치를 피해 허리를 꺾었다.

쿵……!

사방을 점한 4명의 죄수가 줄리안을 향해 압박하는 형태로 다가왔다.

안톤의 전신은 푸른 불꽃에 타올라 거인이 되는 모양새였고, 쿠라스크의 전신도 근육으로 부풀어 올랐다.

이오베의 머리 위에는 찬란히 빛나는 원반 고리가 생겨나고, 아리세이아의 검에선 서리가 꽃의 형태로 맺히기 시작했다.

줄리안은 이들이 형상화를 사용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들이 아무리 미숙해도 혼자선 힘들 텐데. 지금 아이들은 정신을 잃고 본능의 영역에 빠진 거나 다름없는 상태야.]

아겔은 이미 이들이 탈라스의 세뇌 능력에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제야 줄리안은 깨달았다.

“당신이 날 여기로 보낸 이유가 있었군. 겨우 세뇌 능력 따위로 당신에게 영혼을 바친 자들을 조종할 순 없었을 텐데 말이지.”

[당연한 소릴. 선배라는 놈이 매일 뒷짐만 지고 잘난 체하는 게 꼴 보기 싫어서 보냈다.]

“…….”

[가끔은 아이들과 어울려 주기도 해야지.]

아겔이 지도하는 자 중에서는 줄리안이 가장 강하긴 했다.

하나 천성이 워낙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줄리안이라 다른 죄수와 딱히 어울리는 일이 없었다.

[차라리 지금처럼 본능만 남아 있는 게 제각각 형상화의 진정한 모습을 이끌어 내는 데 도움이 될 게야. 네가 어울려 주거라.] 

“하.”

줄리안은 헛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고독의 거두이자, 수십만 약탈자의 정점, 탈라스가 아끼는 자들을 세뇌하고 있는데도 그는 걱정하기보다는 그저 수련의 한 과정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 무슨 자신감인지.

하지만 줄리안은 그의 자신감이 과하다 말할 수는 없었다.

악마의 손길도 물리친 괴상망측한 노인인데, 뭔들 못하겠는가.

[내가 도와주마.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살살 하거라.]

“뭐, 그러든가.”

4명의 죄수와 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줄리안이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아겔에게 영혼을 바치면서 이어진 내면. 알 수 없는 기운이 그의 전신에 엄습했다.

마치 악마를 만났을 때와 비슷한 기운에 줄리안은 잠시 호흡 곤란을 느껴야 했다.

“커헉…! 이 무슨……!”

그가 숨을 가다듬지 못하자, 기회를 엿본 4명의 죄수가 각기 공격해 왔다.

먼저 달려온 안톤. 이제는 키가 5미터는 될 법한 거인 불곰이 되어 있었다.

옷이 더러워지든 말든 줄리안은 가파른 호흡을 내쉬며 재빨리 땅을 굴렀다. 체면이고 뭐고 망치에 맞으면 팔이 부러지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괴력이었기에.

줄리안은 호흡이 불편한 상태로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뒹구는 순간 안톤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그가 방아쇠를 당기자.

콰앙-!

굉음이 주변을 감싸고, 줄리안은 벌어진 결과에 눈을 크게 떴다.

안톤의 형상화가 단 한 방에 무력화되며, 기절한 곰이 나무에 부딪혀 쓰러졌다.

줄리안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자신의 권총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자신도 기를 사용했어도 상대방의 형상화를 단박에 무력화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애초에 기를 활용하는 게 형상화의 묘리.

아무리 이들과 줄리안 사이에 간극이 있다 해도, 그걸 단박에 파훼하려면 적어도 1급수 차이는 나야 했다.

“내가 이렇게 셌나?”

[허튼소리 말고 앞이나 보거라.]

씩 웃은 줄리안은 다음으로 공격을 가하는 쿠라스크를 노려보았다.

사실 순차대로 덤비는 것은 아니었는데, 나머지 둘의 공격에 비해 쿠라스크가 좀 더 빠른 속도로 왔다.

줄리안은 쿠라스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곧장 뒤로 물러섰다.

차례로 날아오는 아리세이아의 검과 이오베의 메이스가 그의 머리를 스쳤다.

정신을 잃어 본능에 잠식되었기에 이들의 공격 패턴은 단순했다. 너무 노골적으로 치명적인 부위만 공격한다.

“그렇게 심장이나 머리만 노리면 상대가 눈치챈다.”

줄리안이 발로 아리세이아의 복부를 차 멀리 날린 뒤, 이오베를 향해 돌격했다.

쾅!

권총과 메이스가 부딪쳤다.

이오베는 공격적인 안톤과 다르게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힘겨루기하는 사이 기절한 줄 알았던 세 사람이 다시 일어나 형상화를 마무리했다.

줄리안이 이를 드러냈다.

“이제 시작이군.”

후웅……!

검은 기운이 줄리안의 전신에 휘몰아치더니, 그의 곁으로 전신이 까맣게 물든 늑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대로 붙어 보자, 꼬맹이들아.”

웬만한 송아지보다도 큰 늑대들이 네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각자 이제 완벽하게 형상화를 구현한 그들은 검은 늑대들과 맞부딪쳤다.

.

.

.

싸움이 시작된 지, 1시간이 지났을 때.

늑대들로 그들을 잠시 묶어 놓은 줄리안은 재빨리 탈라스를 찾아 숲으로 들어갔다.

놀아 주는 것도 좋지만, 본래 목적을 잊어선 안 되었다.

그를 찾아 헤매던 줄리안은 한쪽에서 날아오는 쇠사슬을 보고 고개를 꺾었다.

머리를 부술 만한 추나 날카로운 날붙이, 혹은 낫이 끝에 달린 쇠사슬들이 어지럽게 줄리안 주위를 압박했다.

탈라스의 형상화.

쇠사슬을 쳐 내 소멸시킨 줄리안은 다른 쇠사슬들이 날아온 장소를 향해 마구 방아쇠를 당겼다.

주변이 초토화되었지만, 말 그대로 사방에서 날아오는 쇠사슬이어서 탈라스의 위치를 특정하기 어려웠다.

“큭큭, 저놈들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으면서 날 찾는 거야?”

어지럽게 사방을 옥죄는 쇠사슬 사이로 다시 네 사람이 나타나 줄리안에게 달려들었다.

다시 검은 늑대들을 소환한 줄리안은 쇠사슬을 피하면서 그들과 맞섰다.

확실히 탈라스를 상대하면서 4명을 동시에 막아 내기란 불가능했다.

먼저 그들부터 잠재우기로 한 줄리안은 한가득 기를 모아 권총을 겨누었다.

한쪽으로 달려 동일한 방향으로 따라오도록 유도한 줄리안은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흣……!”

달리던 오른 허벅지가 갑자기 멈춰서 땅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날아온 쇠사슬이 줄리안의 사지를 속박에 허공으로 끌어 올렸다.

“크윽……!”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줄리안은 네 사람과 함께 자신에게 다가오는 탈라스를 볼 수 있었다.

탈라스는 승기를 잡은 줄 알고 낫을 어깨에 건 채로 걸어왔다.

“큭큭, 내 쇠사슬에 붙잡히면 기는 못 써, 줄리안. 그러니까 허튼 반항은 관둬라. 그나저나 실력이 예전만 못하군. 예전엔 악마의 힘으로 압박이라도 했지, 지금은 나약하기 짝이 없구나.”

줄리안은 구속당한 상태인데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졸개들 뒤에서 나올 줄 모르는 겁쟁이 주제에 누가 나약하다는 거냐. 너야말로 나약하구나.”

“다 내 능력일 따름이야, 줄리안. 이게 나의 방식이라고. 내 방식을 나약하다고 폄하하면 안 되지.”

탈라스가 웃는 낯으로 줄리안의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다리가 안 움직이지? 이젠 네 정신조차 네 마음대로 안 되도록 해 줄게.”

줄리안의 머리를 짚은 탈라스는 집중했다.

그는 같은 약탈자 소속으로 일해 봤기에 줄리안을 잘 알고 있었다.

손쉽게 세뇌할 수 있는 놈이 아니지만, 이대로 죽이고 가는 것도 아까웠기에 그는 직접 줄리안을 세뇌하려 했다.

“5년 동안 그 늙은이 밑에서 수련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었나 봐. 네가 이토록 허무하게 내게 무릎을 꿇으니 말이야.”

탈라스는 줄리안이 약탈자에서 탈퇴하기 전부터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언젠간 제대로 세뇌하여 수족으로 부리리라 생각하고 곁에 두었을 뿐.

악마의 힘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줄리안의 사정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정말로 줄리안은 자신과 싸울 때, 악마의 힘을 쓰지 않았고, 그 자존심 강한 녀석이 이렇게 무릎을 꿇게 되었다.

줄리안의 머리에 손을 댄 탈라스는 점점 그의 정신이 자신의 주도권 아래 굴복하는 것을 느꼈다.

이 끔찍한 교도소를 벗어나기 전, 쓸 만한 수족을 얻게 되어 흥이 솟은 탈라스가 중얼거렸다.

“차라리 내 아래에 더 머물러 있었으면, 이처럼 무릎을 꿇진 않았을 텐데. 내가 아니라 늙은이에게 고개를 숙인 대가라고 생각해라.”

“대가?”

사지가 속박당해 있던 줄리안이 반문했다.

탈라스는 마치 강렬한 공격을 당한 듯이 튕겨 나갔고, 겨우 휘청이는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그는 충격받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너……?”

세뇌가 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정신의 주도권을 잡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착각이었다.

한 번에 주도권을 되찾은 줄리안이 여유로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게 끝인가. 잘난 세뇌 능력이라더니, 나는커녕 네 뒤에 있는 놈들도 제대로 구속하지 못했구나.”

“뭐……?”

탈라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어느새 눈동자가 백색에서 원래대로 돌아온 4명을 볼 수 있었다.

그들 모두 적의를 드러내며 탈라스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한 번도 세뇌에 실패한 적이 없던 탈라스는 충격에 빠진 얼굴이 되었다.

“어떻게…….”

“네가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그 영감에게 고개를 숙인 대가라고.”

어느새 쇠사슬을 소멸시키고 풀려난 줄리안은 품에서 궐련을 꺼내 불을 붙였다. 한 모금 연기를 빨아들이고는 일상적인 얼굴로 권총 상태를 살폈다.

“너는 우리가 어떤 지옥을 지나쳐 왔는지 모르겠지.”

5년의 시간.

아겔의 수련을 받은 자들은 그 시간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이후에 일어날 전쟁에서도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끌어 준 시간. 그 시간이 헛될 리가 없었다.

쉬이이이익……!

희미하게 들려오는 바람 소리에 줄리안의 입가에 미소가 담겼다. 

“내 생전 두 번째 악마가 찾아올 줄은 몰랐다. 너에게도 소개해 주지.”

탈라스가 빠져나가려는 사이, 안톤과 쿠라스크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반항할 새도 없이 숲에서 튀어나온 누군가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안녕한가, 탈라스.”

노인의 등 뒤에서 나온 지네가 탈라스의 양어깨를 물어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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