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선전 포고 (1)
교단이란.
우주에 존재하는 11 성좌가 내세우는 가치 아래에서 통합된 단체.
사랑, 믿음, 소망, 충성, 양선, 화평, 희락, 인내, 온유, 절제, 자비.
그들은 오랜 시간 힘과 능력이 쌓인 종교가 되었고, 우주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성좌가 버젓이 존재하는데, 그들 중 하나를 믿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 될 정도였으니.
그러나 과도한 힘은 인간의 마음을 변질시키기 마련이었고, 숭고한 본래의 목적은 타락했다.
교단의 권세를 장악한 자들의 속마음에 스멀스멀 욕심이 피어났고, 결국 건드려선 안 될 영역까지 손을 뻗쳤다.
아겔은 팔짱을 끼고 싸움터로 변한 평원을 살폈다.
약하다. 너무 무르다.
교단의 기둥 중 하나인 기사단. 그곳에 소속되었다는 자들이 제대로 된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쓰러져 갔다.
차라리 5년 전 몰살했던 원탁의 상급 죄수들이 더 강할 지경이었다.
그저 세를 불리고, 제 욕심 채우기에 급급하여 억지로 기사단 인원을 채웠기에 나타난 결과.
기사들의 수준이 형편없었다.
“정리하는 건 어렵지 않겠구먼.”
습격하는 맛조차 나지 않았다. 학살이라 봐도 무방했으니까.
거대한 지네가 턱을 벌려 달려드는 기사를 단숨에 토막 내는 광경.
지네의 등장을 보고 죄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줄행랑쳤다.
기사들은 갑작스러운 거대 지네의 등장에 혼란에 빠졌다.
-크윽……! 갑자기 어디서 이런 괴물들이……!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검을 들고 어쩔 줄 몰라 했다.
특수 합금으로 만들어져 중형선의 포격도 한두 번 튕겨 내는 갑옷을 입고, 거기에 신성 보호막까지 덧씌운다 해도.
지네의 큰 턱이 단숨에 사람을 토막 내는 모습을 보고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자는 드물었다.
특히나 몸이 잘려 나가는 자는 방금까지 아무 일 없는 듯이 대화를 나누었을 동료였을 테니.
그렇기에 아겔은 오히려 더 잔인하게 기사들을 유린했다.
기세를 잡아야 했다. 감히 대항할 의지조차 품지 못하도록.
쾅……!
또 하나의 지네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거대한 아가리 속으로 기사 몇 명이 삼켜졌다. 아가리 속 어둠으로 삼켜진 그들은 신성력으로 빛조차 발하지 못하고 기절할 터였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기사 100여 명을 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3분조차 걸리지 않았다.
황당한 감정을 느끼고 있던 아겔은 이내 폭발하는 듯한 신성력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이제 등장하는구먼.”
주변을 하얗게 물들일 정도의 빛. 저쪽 평원 중앙에서부터 누군가 제 몸보다 길쭉한 대검을 들고 돌격해 오고 있었다.
아겔은 보이지 않아도 그가 기사단의 단장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만한 신성력을 내뿜을 수 있는 자가 흔하진 않을 테니까.
실력으로 봤을 때는…….
“호오…… 그래도 주술사의 분신체 정도는 되는구나.”
주술의 사도, 카흘탁.
그가 아겔을 죽이기 위해 고독에 보낸 분신체와 싸우면, 그럭저럭 재미있는 구경을 할 수 있을 만한 실력인 듯했다.
한껏 빛을 내뿜던 단장은 익숙하게 형상화를 사용했다.
반투명한 거대한 갑주가 그의 전신을 보호하는 듯 모습을 드러냈다.
공격형이 아닌 방어형 형상화는 오랜만이라 아겔은 여흥을 느꼈다.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쾅……!
거대한 지네 한 마리와 단장이 격돌했다.
커다란 턱을 대검 하나로 우뚝 막아선 기사단장.
지네의 크기는 중형선에 버금갔고, 그 앞을 막아선 단장은 한 마리의 개미처럼 보일 지경이었지만, 어쨌든 그는 지네를 막아 내는 데 성공했다.
거기에 더해.
“으아아아아압……!”
큰 기합을 내지르며 지네를 밀어내는 단장. 주르륵 밀려난 지네는 충격에 잠깐 몸을 가누지 못하는 듯했다.
그 모습에 기사들이 환호했다.
-역시 단장이야……!
-못생긴 지네 자식들 모조리 무찌르자!
단장의 등장에 기사들이 용기백배하여 검에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의욕이 가득 찬 그들의 얼굴과 단장의 얼굴은 좋지 못했다.
한 번의 격돌로 지네의 힘을 가늠했기 때문이다. 그가 밀어낸 지네는 아직 소멸하지도 않았다.
“키에에에에엑-!”
아겔은 자신이 타고 있는 지네를 제외한 아홉 마리를 움직여 기사들을 상대했다.
검을 들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녹색 거대 지네들이 곤두박질쳤다.
쾅! 쾅! 쾅!
확실히 단장의 힘은 발군이었다.
홀로 지네 3마리와 대치하는 기사단장. 그러나 그와 달리 단원들의 수준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머지 여섯 마리의 지네는 말 그대로 학살을 자행했다.
싸움을 살피던 아겔은 판단했다.
다른 권능을 쓰지 않아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듯했다.
‘이제 살상은 그만.’
아겔의 뜻을 받은 지네들은 곧 턱으로 기사들을 조각내기를 멈추고, 아예 뱃속으로 삼켜 버렸다.
기사단장은 어떻게든 자신을 구속하려는 지네들을 벗어나 단원들이 삼켜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만큼 헛된 일이었다.
그가 손 쓸 새도 없이 수백 명의 기사가 지네 아가리 속으로 들어갔다.
충분한 숫자를 제압한 아겔은 땅 가까이 지네를 몰고 갔다.
이제 지상에 남아 있는 기사들은 기껏해야 서른.
모두 헐떡이고 있는 모습과 다르게 아겔은 여유로운 걸음으로 지네 머리 위에서 내려왔다.
기사단장은 숨을 헐떡이진 않았으나, 다소 힘을 소모한 듯하긴 했다.
아겔은 단장에게 말했다.
“잘 싸우는구먼. 이름이 뭔가?”
“…….”
단장은 아겔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겔은 계속 말을 걸었다.
“이름은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네. 대신 몇 가지 묻고 싶구먼. 자네는 교단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인가?”
“뭐……?”
아겔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단장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성좌기사단인 것 같은데, 자네처럼 약한 자가 단장이라니. 내가 알고 있던 때와 너무 다른 것 같아서 말일세.”
“…….”
아겔의 말을 모욕적으로 여겼는지, 단장은 대답하지 않고 대검을 들어 올렸다.
아까와 같은 신성력이 그의 손에서 아른거렸다.
“문답무용.”
짧게 읊조린 기사단장이 아겔에게 달려들었다.
쾅!
땅이 움푹 팰 정도로 빠르게 달려 나간 단장이 아겔을 향해 대검을 내리쳤다.
길이만 해도 아겔 키의 두 배는 될 법한 대검이라 단숨에 몸을 일도양단할 기세였다.
그러나.
콰득……!
어느새 나타난 거대 지네가 대검을 물었다. 아겔의 코앞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멈춘 단장의 눈에 핏발이 섰다.
“흐읍……!”
대검을 포기한 크록투스는 건틀릿을 착용한 주먹을 내지르려 했다.
자그마한 지네들이 땅에서 솟아나 그의 전신을 구속하지만 않았더라면, 성공했을 공격이었다.
“끄으으으…….”
지네들에 의해 몸이 속박된 크록투스는 부들부들 떨었다.
아겔이 잠잠하게 말했다.
“내가 왜 서른 명은 남겨 두었다고 생각하나?”
서걱!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대 지네 한 마리가 기사 하나를 토막 냈다.
단장 크록투스는 핏발이 선 눈으로 소리쳤다.
“네 놈……!”
“묻는 말에 대답하면 죽이지 않겠네. 난 살인마가 아니야.”
“내 기사단을 멸절해 놓고도 그런 소리가 나온단 말이냐!”
아겔의 손짓에 거대 지네 한 마리가 턱을 쫙 벌렸다. 그러자 아가리 속에 있던 기사들이 무더기로 땅에 후두둑 떨어졌다.
“……!”
크록투스는 눈을 크게 떴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듯했지만, 지네에게 잡아먹혔던 기사들은 분명 살아 있었다. 기사들은 미약하게나마 호흡하고 있었다.
“전부 죽이진 않았네. 그리고 남은 자들이라도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끄으으으…… 이 괴물…….”
욕지거리를 내뱉었어도 단장의 몸부림이 점점 가라앉았다.
아겔이 손을 움직이자, 기사단장을 옭아매고 있던 지네들이 떨어져 나갔다. 거기에 그들을 노려보던 거대 지네들도 모조리 유령처럼 사라졌다.
자신을 풀어 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단장이 눈을 크게 떴다.
“대화할 생각이 들면 오게.”
아겔은 거리고 조금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 나무 평상 위에 편안하게 앉았다.
거대 지네가 헤집어 놓은 평원에 유일하게 하나 남은 평상이었다.
풀어 줘도 자신을 해할 수 없을 거라는 자신감.
교단의 기사라는 자긍심에 금이 갔지만, 기사단장은 달려들 수가 없었다.
저 정도 형상화를 사용하는 자라면, 여기에 있는 기사들을 일거에 몰살할 수 있다.
-단장님…….
기사 한 명이 다가와 그를 불렀다.
크록투스의 푸른 눈이 떠졌다.
“쓰러진 전우들을 수습해라.”
명령을 남긴 크록투스는 홀로 아겔이 앉아 있는 평상을 향해 걸어갔다.
.
.
.
아겔은 크록투스가 옆에 앉는 것을 느꼈다.
공격당할 법도 하건만, 아겔은 전혀 개의치 않는 기색으로 여전히 앞만 보고 있었다.
크록투스는 옆에 앉아, 힐끔 아겔을 바라보았다.
붕대로 눈을 감고 있는 노인. 거기에 알 수 없는 거대 녹색 지네들을 형상화로 부리는 괴물.
이 정도 수준이라면, 교단의 추기경들과 붙어도 손색이 없는 실력의 강자였다.
‘기사들을 살려야 한다.’
심호흡하며 마음을 추스른 크록투스가 먼저 운을 뗐다.
“뭘 묻고 싶은 거지.”
“여기엔 왜 왔나?”
크록투스는 교단이 내려 준 임무에 대해 말해야 했기에 그는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임무 발설은 중죄이지만, 기사단이 몰살당하는 것보단 나았다.
“……당연히. 죄수들을 압송하기 위함이다. 기업가는 강제로 고독을 점거했고, 이 교도소는 파괴될 위험이 있으니까.”
“그렇군. 다른 이유는 없나? 특정 인물의 생포 같은 것 말일세.”
크록투스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받은 임무는 오직 하나다. 고독에 침투하여 죄수들을 다른 행성으로 압송하는 것. 그 이외에는 없다.”
“성좌에게 맹세코 없나?”
아겔의 물음에 크록투스는 턱에 힘이 들어갔다.
한차례 화를 가라앉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충성의 성좌, 피데스 님의 이름 앞에 맹세한다. 다른 임무는 없었다.”
“진짜로군.”
아겔은 고개를 끄덕이며 턱수염을 쓸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나?”
“이상하다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왜 자네들은 기업가의 함대에 맞서는 게 아닌 죄수 압송이란 임무를 맡았는지 말이야.”
“…….”
“병력이 하나라도 아까운 싸움이 될 텐데, 지금 당장 중요한 일이 아닌 죄수 압송 임무를 맡았다니. 죄수 압송은 기업가 함대를 몰아내고 나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 아닌가?”
크록투스는 굴하지 않고 말했다.
“우린 임무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명령이 내려오면 그저 행할 뿐.”
“군인답구먼.”
“그리고 효율의 문제다. 함대를 몰아내고 죄수 압송을 동시에 행하는…….”
크록투스의 말을 아겔이 가로챘다.
“이렇게 생각해 보진 않았나. 함대를 상대하는 것보다 죄수를 압송하는 게 더 중요한 문제라고.”
“뭐……?”
크록투스는 얼빠진 얼굴을 했다. 어찌 적을 상대하는 것보다 남아 있는 죄수 압송이 더 중요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곧바로 반론을 펼치지 못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죄수 압송이 더 중요하지 않았더라면, 먼저 기업가의 함대를 몰아내라는 명령을 내렸을 것이기에.
“내 생각엔 자네 위에 있는 자들은 기업가 함대를 고독에서 몰아내는 것보다 고독에 있는 죄수를 찾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한 걸세. 그 이유가 궁금하진 않나?”
“…….”
아겔의 질문에 크록투스는 입을 다물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왠지 너무 위험한 진실에 접근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대답하지 않자, 아겔이 끌끌거리며 말했다.
“묵묵한 친구구먼. 그럼 다른 것 좀 물어봄세. 자네들이 실패하면 또 누가 오는가?”
대답할까 고민하던 크록투스는 결국 입을 열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아겔이 기사들을 죽일 것 같았기에.
“……12, 9, 8성좌기사단이 차례로 올 거다.”
“그렇군. 그럼 그중에 누가 제일 싸가지가 없는가?”
“싸가지……?”
크록투스는 황당한 얼굴을 했지만, 아겔은 진지했기에 그는 곧 입매를 다듬었다.
“……12성좌기사단장이 제일 싸가지 없다.”
“그렇구먼. 기억해 두겠네.”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지?”
“아, 별거 아닐세.”
아겔이 크록투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득 크록투스는 그가 눈을 붕대로 감고 있어도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노인의 입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전 포고를 할 건데, 편지가 필요하거든.”
크록투스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