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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62)화 (163/186)

162화 빛의 사도 (4)

아겔은 감각을 극대화했다.

더러운 토사물의 냄새와 목소리가 아니라면, 누군가 서 있다는 기척조차 알 수 없었다.

호흡 소리도, 심장의 울림도 없는 존재. 눈에 보이지 않았다면, 거기에 있는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겉모습은 미남이어도, 토사물이 묻은 피부가 백옥 같아도 저 남자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어둠의 사도.

악마에게 선택받은 지고의 괴물 중 하나인 것이다.

“날파리 두 마리도 전선을 벗어났던데, 여기에 있나?”

한번 던져 보는 물음이었다. 그들이 이곳으로 왔다면, 아겔과 부딪쳤을 거란 사실은 쉽게 유추할 수 있을 테니.

요점은 아겔이 이겼는지 알아보기 위함일 것이다.

노인은 거리낌 없이 말했다.

“내가 가둬 뒀지. 감옥에.”

“…….”

존귀한 존재 중 둘을 더러운 감옥에 가뒀다는 말에 헤페만은 잠시 멍한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혼자서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하……! 아하하하하하……!! 진짜야? 지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그치? 그 날파리를 두 마리 다 잡았다고? 그거 잡기 어려운 건데? 아하하하하하하하---!!”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내며 웃는 헤페만.

그러나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크게 벌어진 눈은 언제든 아겔의 허점을 발견하기만 하면 즉각 달려들 기세처럼 보였다.

진짜로 달려들진 모르겠지만, 아겔은 이미 헤페만의 말에서 의도를 눈치챘다.

“내가 거짓말하는 걸 본 적이 있나?”

순식간에 웃음을 그친 헤페만은 뚫어지게 아겔을 바라보았다.

“……없지.”

헤페만이 고개를 숙였다.

쿠구구구구…….

땅이 깊은 곳으로부터 요동치는 듯했다. 권능도 능력도 아닌, 그저 분신체가 가진 힘을 조금 개방했을 뿐이었다.

코르브스는 압력을 견디지 못해 바로 무릎을 꿇었다. 반면 아겔은 여전히 멀쩡하게 서 있었다.

“아겔라스토스. 날파리들을 따라오면서 설마설마했는데, 정말일 줄이야. 네가 살아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어둡게 가라앉은 헤페만의 목소리.

“네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았다면, 만사 제쳐 두고 왔을 텐데. 큭큭큭.”

사나운 기운이 점점 증폭하려는 듯했다. 아겔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죽고 싶나?”

“…….”

“거기까지만 하게. 내 인내심이 깊지 않아서 말이야.”

아겔이 걸어가 헤페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의 힘이 강제로 누그러지기 시작했고, 헤페만이 눈을 크게 떴다.

“자네 주인이 왜 내게 반기를 들지 않았는지 생각하게.”

그제야 땅의 진동이 점차 가라앉았다.

그의 주인인 ‘탐식(貪食)’이 아겔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자신에게도 숨긴 이유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겔이 손을 내리자, 헤페만이 토사물이 묻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쓱 훑어내렸다.

이내 진지한 얼굴이 사라진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진 않다. 우리 사는 세상이 다 이런 거 아니겠어? 먹을 만한지 가늠해 보고 틈이 보이면 무자비하게 찔러 버리는 그런 운명이잖아. 안 그래?”

“알고 있으니, 괜찮네.”

“시원시원하군. 역시 아겔이야.”

“여긴 왜 왔나?”

헤페만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와 형제들은 갑갑해서 내계(內界) 영역을 좀 휘젓는 와중에 역시 날파리들이 나타났다. 재밌게 놀고먹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데, 그 녀석들이 갑자기 자리를 뜨는 게 아니겠어? 형제들은 내버려 두라고 했지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그렇게 헤페만은 빛의 사도를 쫓는 와중에 몇 가지를 추론할 수 있었다.

내계 영역에 전쟁을 일으킨 자신들을 내버려 두고 나올 정도면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머릿속 한구석에서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물론, 이곳에서 당신 얼굴을 보기 전까진 확신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진짜 살아 있었을 줄은 몰랐지.”

아닌 척 쾌활하게 대답하고 있었지만, 아겔은 그의 말투 하나하나에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의 초조함, 약간은 긴장한 기색.

어둠의 사도라는 자리 때문에 내색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마음은 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큰 이유는 없어. 궁금해서 날파리들을 쫓았을 뿐. 노는 것도 마다하고 왔지만, 그만큼 큰 수확은 얻은 것 같아서 말이야. 근데 막상 널 보니 해야 할 게 생각이 났네?

“해야 할 일?”

그는 아겔을 보고 히죽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조각 같은 몸이 기울어졌다.

허리를 숙인 그는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내 동생을 살려 줘서 고맙다.”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는지 코르브스는 당황했고, 아겔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허리를 편 헤페만은 엎드려 있는 아피스토의 민머리를 붙잡고 끌어 올렸다. 그의 손에 대롱대롱 달린 아피스토는 헤페만보다 키가 컸기에 하반신은 땅에 끌린 채였다.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아피스토.”

그는 아피스토의 머리를 붙잡은 채로 인사시키는 듯이 위아래로 흔들다가 토사물 위에 처박았다.

기절한 아피스토는 전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별거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은 아겔은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아피스토가 자네 동생이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구먼. 그냥 먹을 걸 주면 잘 따르길래 곁에 둔 적이 있었지.”

“생긴 건 딴판이지만, 소중한 동생이다. 어렸을 때부터 먹성이 좋아서 키우는 데 애를 먹었어. 애지중지 키웠는데, 헛되이 죽으면 키운 고생이 사라지잖아.”

시원한 미소를 지은 헤페만이 손짓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정말 오랜만인데, 대화나 좀 하자.”

바닥에 흩어져 있는 토사물들이 의자의 형태를 갖추었고, 헤페만은 그 위에 앉았다.

아겔과 코르브스 옆에도 토사물 의자가 생겼다. 아겔은 아무렇지 않게 의자에 편하게 앉았고, 코르브스는 부리를 씰룩였다.

헤페만이 까마귀 수인을 보고 말했다.

“안 앉아?”

코르브스가 고개를 숙였다.

“저는 종입니다. 감히 주인들과 자리를 겸할 수 없습니다.”

“큭큭, 주제 파악이 아주 마음에 들어. 합격! 감히 어둠의 사도들이 대화하는 데 옆에서 엿보고 있길래 죽이려고 했더니, 그나마 제 주제는 아는구나? 남 말을 잘 훔쳐 듣는 새가 되도록 해라.”

“조언 감사드립니다.”

코르브스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꺼지라는 헤페만의 의도를 읽은 것이었다.

코르브스가 사라지자, 헤페만이 두 손을 깍지 끼고 말했다.

“그래서 아겔. 빛의 사도들이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걸 눈치챈 것 같은데. 여기 계속 박혀 있는 건 혹시 함정이야?”

“딱히 노린 건 아닌데, 그런 모양새가 되었구먼. 두 명이나 사로잡았으니. 그냥 집이라 생각하고 떠나지 않았던 것뿐일세.”

“의도한 게 아니었다고? 그럼 날파리들은 어떻게 잡았어? 날파리 같아서 잡기 어려운 놈들인데.”

헤페만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혹시 그때……의 힘을 다 되찾은 거야?”

솔직히 질문하는 헤페만에게 아겔은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아직 일주일 남았지. 두 친구는 일부러 내게 잡혔네. 죄책감이 있는 모양일세.”

“아하……! 그러고 보니 인내랑 자비는 원탁 소속이 아니구나! 하기야 진짜로 날뛰었으면 이런 조그만 행성은 개박살이 났을 테지. 머저리 같은 놈들.”

다리를 꼰 헤페만이 손가락을 씹으며 아겔을 바라보았다.

마치 가지고 싶은 장난감, 혹은 먹고 싶은 간식을 상대가 가지고 있지만, 달라고 말하기 힘든 얼굴 같았다.

아겔은 딱히 빛의 사도 두 명을 헤페만에게 넘겨줄 생각이 없었기에 고개를 저었다.

“관심 끄게. 내 손님일세.”

“쳇. 그렇게 말하면 포기할 수밖에 없잖아. 짜증 나네. 배고파졌어.”

“근처에 먹을 만한 게 없나?”

“많아. 최근 전쟁으로 행성 몇 개를 약탈했거든. 근데 전부 아껴먹고 싶은 것들이야. 숙성되면 꽤 맛있을 것 같아서. 행성에 가둬 놓은 녀석들. 강제로 살찌우고 있어. 살은 뒤룩뒤룩 쪘는데, 무력감으로 무너진 놈들은 아주 별미이니까. 너도 먹어 볼래?”

어둠의 사도들은 대개 이런 놈들이었다. 그가 약탈한 행성의 주민들은 아마 이런 토사물과 같은 것들을 먹으며 연명하고 있을 것이다.

“내게 그런 제안을 하는 건 자네뿐일 걸세.”

“큭큭, 나에게 예의를 바라지마. 우리 주인님도 딱히 내게 그런 걸 바라지 않거든.”

“그야 재롱부리는 아들 같아서 그렇지 않겠나?”

“나도 알아. 주인님은 내 재롱을 좋아해. 알고 있으니까 그런 거지.”

헤페만이 손짓하자 토사물로 이루어진 컵이 만들어졌고, 그는 컵 안에 담긴 걸쭉한 액체를 차 마시듯 음미했다.

아겔에게도 컵이 만들어졌지만, 정중하게 거절했다.

“차가 싫으면 식사라도 준비할까?”

“이미 식사했네. 게다가 먹다 남은 걸 먹는 취미는 없네. 친구가 아닌 자와는 차도 마시지 않는 편이라.”

헤페만은 토사물로 이루어진 컵의 찻물을 할짝거렸다.

“흐음, 이 맛있는 걸 마다하다니. 이해해. 하지만 먹을 것은 귀중하게 대하는 게 좋을걸.”

“이미 66년간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살아왔지. 먹을 것은 아주 소중하다는 걸.”

시간이 언급되자, 컵을 잡은 헤페만의 손이 굳었다.

그래도 입술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66년이나 기다린 거야? 아니지. 여긴 시간이 다르잖아? 바로 근처에 울라도르가 있으니까. 어디 보자, 중력 때문에 시간이 다르면…… 세상에 6배야. 거의 400년이나 기다렸네? 그만큼 화가 났어?”

“…….”

아겔은 대답하지 않았다.

헤페만은 자신이 아슬아슬한 위치에 있다는 걸 깨닫고 씩 웃었다.

“미안. 하지만 이건 알아줬으면 좋겠어. 아주 든든해. 당신만큼 믿음직한 인물이 없지.”

탐식의 사도인 헤페만은 말하자면, 승냥이나 이리와 다름없다.

아겔이 살아 있는 걸 확인했으니, 곧 그가 무슨 일을 벌일지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을 모조리 주워 먹으려 할 놈이었다. 조금은 얄미운 녀석이었다.

“그나저나 충성 놈이 여기로 달려오는 것 같던데. 알고 있어?”

“알고 있었네.”

“아쉽네. 몰랐으면 거래하려고 했는데.”

“사도들을 건네주기엔 너무 싼 값이지.”

그는 어지간히 빛의 사도들을 원하는지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강제로 뭔가 해 볼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헤페만이 씩 웃었다.

“그럼, 널 지켜 주는 건? 그 정도면 날파리들을 받아 갈 만한 값은 되지 않나? 잡힌 놈들이야 네게 죄책감이 있었다고 해도 충성은 그렇지 않을 텐데.”

“사양하겠네. 딱히 도움일 필요하진 않구먼.”

“아깝다, 아까워. 그놈들은 무슨 맛일까 궁금했었는데. 내 소원이야. 날파리 하나 먹어 보는 거.”

“소원을 성취하길 바라겠네.”

헤페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벌써 갈 생각인가?”

“에휴, 그래. 이제 가야지. 배고프다.”

“다른 볼일은 없나.”

“살아 있는 거 봤으니 됐어. 날파리 잡으러 왔는데, 주지도 않으니 그냥 돌아갈 수밖에.”

“잠깐.”

돌아가려는 그의 뒤로 아겔이 그를 불러세웠다.

헤페만의 목이 180도 꺾여 돌아가 아겔을 바라보았다.

“왜…… 내게 바라는 게 있어? 나와 거래할 생각이 생긴 거야?”

아겔은 고개를 저었다.

“아피스토를 데려가게. 이제 내 곁에 있으면 위험할 테니.”

헤페만의 입이 찢어졌다. 정말로 그의 멀쩡한 입술이 귀까지 찢어져 날카로운 이빨들이 드러났다.

“큭큭,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는데, 당신은 참 성격도 좋아. 기분이다. 나중에 도울 일이 있으면 한 번은 꼭 도와줄게.”

“딱히 필요 없네.”

“언제든 말만 하라고.”

헤페만은 뒤돌아 손을 흔들었다.

백옥 같은 피부의 미남은 천천히 허물어져 다시 토사물이 되었고, 주변에 흩어져 있던 모든 토사물이 전부 아피스토의 커다란 입안으로 들어갔다.

“으거거거거걱……!”

기절해 있던 아피스토의 입으로 토사물이 전부 빨려 들어갔고, 그의 육중한 몸도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제 입으로 들어갔다.

방금까지 어둠의 사도가 머물렀던 자리는 완전히 깔끔해진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제야 코르브스가 숨을 들이쉬며 나타났다.

“후. 정말 쉽지 않은 자군요.”

“사도들이 다 그렇지. 특히 어둠의 사도들은 말이 잘 안 통하는 놈들이란다.”

“유의하겠습니다. 행동 하나만 잘못해도 목이 날아가겠군요.”

헤페만을 보내고, 아겔은 천천히 걸어 평상 위에 걸터앉았다.

코르브스가 말했다.

“차라도 준비할까요?”

“아니다. 좀 쉬고 싶은데. 손님들이 자꾸 몰려오는구나.”

“예?”

까마귀 수인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가면 속 그의 검은 눈이 하늘의 대기권을 꿰뚫어 보았다.

어느새 소리 소문도 없이 함대가 도착해 있었다. 고독 전체를 포위할 만한 기사단 함대가.

“……충성의 사도.”

두 사람이 무슨 대응을 취하기도 전에 하늘에서 거대한 빛의 기둥이 떨어졌다.

콰아아아아앙……!

빛의 기둥은 땅을 꿰뚫더니, 한쪽으로 움직이면서 행성 표면을 휩쓸어 버렸다.

아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가 과하구나.”

코르브스가 아겔을 붙잡고 레이저 포격을 피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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