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65)화 (166/186)

165화 고독 방어전 (3)

코르브스는 내면의 어둠을 불러와 눈을 가려야만 했다.

저 엄청난 신성력의 충돌로부터 눈을 보호해야만 했고, 그들이 부딪치는 찰나라도 보기 위해선 어둠이 반드시 필요했다.

전력으로 끌어 올린 어둠으로도 코르브스가 볼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빛이 어디에서 터져 나오는지만 볼 수 있는 정도인가.’

이미 사방은 빛으로 가득했지만, 더 강한 빛이 그 안에서 펑펑 터졌다.

아마 그 빛이 터지는 곳이 사도들이 부딪쳤던 공간일 터였다.

쿠구구구구…….

아겔과 사도들의 싸움과 달리 빛의 사도들끼리 맞붙자 이상 현상이 생겼다.

그땐 공간이 아예 달라진 것 같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빛으로 인해 가열된 공기와 여지없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충격파.

베로니카와 아킬란이 최대한 충격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막는 것 같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상대는 두 사람이 모든 것을 내던지고 싸워도 이길 수 없다던 충성의 사도였으니.

코르브스는 일단 돌아가면서 분신체를 빛 가까이로 보냈다.

강자들의 싸움이 궁금하기도 했고, 개입할 수 있을 만한 틈이 보이면 손을 쓰기 위해서였다.

물론 상대는 11급 각성자에 준하는 자들이기에 과연 자신이 손쓸 틈이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적어도 그냥 도망치는 것보단 나았다.

‘막말로 하나하나가 교도소장보다 센 놈들인데, 내가 비빌 급은 아니지. 적당히 틈만 엿보자.’

넘을 수 없는 벽이라 불리는 소장도 저곳에 무작정 들어갈 순 없으리라.

그러나 코르브스는 해내야만 했다.

퍼드득……!

분신체 수십 마리가 빛이 터져 나오는 공간을 향해 쇄도했다.

사방으로 검은 깃털이 날리고, 깃털에서 새어 나온 어둠이 빛을 밀어내 공간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도왔다.

빛과 세상이 분리된 경계.

그곳을 살짝 넘는 것만으로 분신체가 소멸당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최대한 분신체의 숫자를 줄이며 힘을 집중해 경계선을 넘었다.

지독한 빛의 경계를 넘어서고 나서야 코르브스는 내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어둠과 빛이 맞부딪쳤을 때와 달리 지금 빛의 내부는 어마어마한 굉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세 사람이 어지럽게 맞부딪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 밀리기 시작했는지, 베로니카와 아킬란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빛의 사도라 웬만한 자상은 순식간에 회복되긴 했어도, 핏물이 흘러나온 자국마저 사라지진 않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코르브스가 내부로 들어온 것을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여길 어떻게…….”

“어서 나가라, 까마귀야. 함부로 들어올 곳이 아니다.”

놀란 얼굴을 했어도 한순간도 로드먼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두 사람의 눈은 빠르게 움직였다.

코르브스의 분신체들이 난입하자, 로드먼의 공격이 잠시 멈추었다. 허공에 떠 있는 푸른 창들도 그 자리에 가만히 떠 있기만 했다.

그는 여유로운 태도로 대화할 시간을 주듯이 찬란한 창날을 훑었다. 그곳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아킬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헉헉……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로드먼. 우린 계속 싸울 수 있다.”

“잠시 시간을 주지. 어차피 날 이길 순 없을 테니.”

“우릴 얕보는 건가?”

“아니. 그런 건 아니다. 다만,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주는 거다.”

푸른 눈동자가 날카롭게 두 사도를 직시했다.

“싸움을 재개하면 난 너희를 반드시 죽일 것이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대화할 놈이 까마귀라니. 우습군. 농담이라도 해 봐라. 죽기 전에 한껏 웃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지.”

“큭…….”

로드먼과 베로니카·아킬란의 처지는 완전히 상반되었다.

입고 있는 옷에 수많은 자상과 핏자국이 남아 있는 두 사람과 달리, 로드먼은 처음 모습 그대로였다.

같은 사도라도 실력 차이가 굉장하다는 뜻. 이대로 가면 두 사람은 로드먼에게 살해당할 것이 뻔했다.

결과가 뻔해 보이는 싸움이지만, 그래도 잠시 숨을 가다듬을 틈을 얻은 두 사도에게 코르브스의 분신체들이 다가왔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온 게 아닙니다. 힘을 보태러 왔죠.”

아킬란이 호흡을 회복하고 말했다.

“까마귀야. 네가 무슨 힘을 보탤 수 있다는 거냐.”

“당신…… 9급 각성자인 것 같은데, 그 정도로는 이 싸움에 도움이 되지 않아요.”

두 사람은 부정적인 기색을 보였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도들의 능력 등급은 11급.

9급인 코르브스와는 두 단계의 차이가 있었다.

겨우 두 단계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숫자가 커질수록 그 간극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진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코르브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설명할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사실 지금 시간은 많이 없습니다. 두 분께서 지체하는 동안 행성 분열기가 고독을 꿰뚫을 겁니다. 적어도 이 싸움을 빨리 끝내야 해요.”

까마귀의 손에 어둠이 떠올랐다.

두 사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건…….”

“전 주인님께 영혼을 바쳤습니다. 당연히 그분의 어둠을 이어받았죠.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

그가 어둠을 꺼내 보이자, 두 사람의 표정이 달라졌다.

어쨌든 지금 상황에선 뭐라도 시도해야만 했다.

어차피 시간은 상대의 편이었으니.

표정을 굳힌 세 사람이 다시 싸울 준비를 갖추었다.

둥둥 떠 있는 푸른 창 위에 앉아 있던 로드먼이 창을 잡고 일어섰다.

“다 되었나. 죽을 준비는.”

로드먼의 푸른 눈동자가 사도들 뒤에 있는 코르브스의 분신체들에게 향했다.

“까마귀 하나가 더해진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진 않는다는 걸 모르는가. 어리석기 짝이 없군.”

“글쎄.”

아킬란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유능한 친구인 것 같아서.”

말이 끝나자마자, 세 사도는 빛의 속도로 맞부딪쳤다.

코르브스는 당장 싸움에 참여하기보단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뒤로 물러섰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통찰한 것을 떠올렸다.

‘적어도 세 사람의 속도는 동일하다. 완벽하게. 셋 다 빛의 속도를 내고 있다.’

충성의 사도가 강하다곤 하지만, 세 사람 중에 가장 빠른 것은 아니었다.

속도는 셋이 완전히 똑같았기에 로드먼이 두 사람보다 강한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전투 경험. 오래 살아왔으니, 싸우는 방식과 노련함이 두 사람을 뛰어넘는다. 두 사람보다 오래 사도로 활동했다는 뜻이다. 게다가 갈수록 지치는 두 사람과 달리 충성의 사도는 여전히 힘이 넘치는군.’

이 두 가지 특성이 로드먼이 혼자임에도 두 사람을 압도할 수 있을 만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코르브스는 후자에 개입할 수 없었으나, 전자는 뒤집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전투의 노련함. 싸우는 방식. 내가 뒤집을 건 바로 이거다.’

결심을 굳히자마자, 코르브스의 분신체들이 전부 커다란 날개를 폈다.

하얀 세상에 검은 깃털이 눈처럼 사방으로 휘날렸다.

각각 깃털에 응축되어 있던 어둠의 힘이 폭발하더니 사람 몸집보다 큰 구체 모양으로 변했다.

로드먼은 여유롭게 그 깃털들을 피해 냈다.

“고작 이딴 것으로 날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

그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고개를 꺾어 검을 피해야 했다. 검은 어둠의 구체를 뚫고 나타난 베로니카가 검을 찔러 넣었기 때문이다.

다시 날카로워진 푸른 눈동자를 한 로드먼은 똑같이 구체를 뚫고 나오는 아킬란의 공격을 막아야 했다.

아킬란이 주먹을 휘둘렀다.

“까마귀 친구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로군. 안 그런가, 로드먼.”

“…….”

빛만 가득했던 세상에선 세 사람 모두가 서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어둠의 가장 큰 장점. 색을 지워 버리는 까만색은 로드먼으로 하여금 두 사도의 움직임을 놓치게 했다.

어둠의 구체 뒤로 숨어 버렸으니.

이 하얀 세상에 은폐물이 생겨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로드먼과 달리 두 사도는 어둠 뒤에서도 로드먼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코르브스가 두 사도에게만 볼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일 테다.

가지고 있던 여유가 점차 사라지자 로드먼이 이를 갈았다.

“이런 같잖은 수를…….”

푸른 눈동자에서 빛이 새어 나올 정도로 힘을 응축한 로드먼이 한순간에 신성력을 폭발시켰다.

그의 몸으로부터 터져 나온 신성력이 검은 깃털들과 어둠의 구체를 단번에 날려 버렸다.

그러나 코르브스의 분신체들은 그 폭발에서도 살아남아 깃털들을 휘날렸다.

“뭐야. 생각보다 노련하지도 않네. 대처가 뻔해. 힘만 빼면 사실 별 볼 일 없는 놈이었잖아. 괜히 식겁했네.”

“너무 오래 살아서 뇌가 늙어 버린 건가. 얼마나 돌대가리면 그 좋은 힘을 이딴 식으로 활용하지? 이 정도면 거의 다이아몬드 뇌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방해. 머리는 공격하지 마십쇼! 어차피 안 깨질 것 같습니다!”

“야야, 말 좀 해 봐. 이젠 말도 못 해? 싸울 때마다 뇌가 퇴화하는 저주에 걸린 건 아니지?”

중간중간 떠드는 코르브스의 입심 때문에 열 받는 건 덤이었다.

이마에 핏줄이 한껏 돋은 로드먼이 코르브스의 분신체들을 바라보았다.

“너부터…… 죽여 주겠다.”

허공에 생겨난 수많은 창날이 코르브스의 분신체들을 노렸지만, 베로니카의 검도 똑같이 그것을 막아 냈고, 아킬란의 신권(神拳)도 창들을 박살 냈다.

쾅!

로드먼이 빠른 속도로 날아갔지만, 분신체에 도달할 순 없었다.

두 사도가 굳건히 버티고 있었기에.

힘겨루기에 들어간 아킬란이 말했다.

“많이 급해졌군, 로드먼. 자네답지 않아.”

“나답지 않다고…… 그게 무슨 말이지.”

“욕망이 자네를 집어삼키고, 그 자리를 대신했다는 말이지. 이제 인정하게. 우린 죄인이야.”

“아니…….”

로드먼의 눈이 푸르게 타올랐다.

“난 죄인 따위가 아니다… 아니야……! 아니라고!! 나는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다!!!”

로드먼의 몸에서 강력한 신성력을 방출되며 아킬란을 밀어냈다.

한순간, 시야가 빛으로 물들었지만, 베로니카, 아킬란, 그리고 코르브스는 서로의 눈길을 놓치지 않았다.

함께 싸운 건 처음이었지만,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의 의사를 알 수 있었다.

‘여유를 빼앗은 건 좋았지만, 결국 한 방이 필요해.’

로드먼과 동수를 이루었긴 해도 여전히 시간은 그의 편이었다.

절묘한 한 방으로 그를 쓰러뜨리고 다시 분열기를 막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독이 터져 버리고 말 것이다.

한 방. 빛의 사도 중 수위를 다툴 만한 자를 쓰러뜨릴 일수.

그것이 가능한 자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결국, 이 싸움에 끼어든 코르브스가 해야 할 일이었다. 두 사도는 이미 로드먼에게 많은 수를 읽혔으니.

변수는 코르브스가 창출해야만 했다.

퍼드득!

코르브스의 분신체들이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깃털을 날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을 시도하려 했다.

하나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로드먼을 따라잡긴 어려웠기에 두 사도가 보조해 주어야만 했다.

사도들은 전력을 다해 로드먼의 움직임을 제한했고, 코르브스의 공격이 그에게 닿을 수 있게 했다.

빛이 어둠에 치명적이듯이, 어둠은 빛에 치명적이다.

아겔에게 영혼을 바친 코르브스의 공격이 닿아야만 로드먼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촤악……!

그러나 로드먼도 순순히 당해 주지 않았다. 달려들던 코르브스의 분신체가 로드먼의 창에 갈라졌다.

오히려 분신체를 사냥하려는 듯 로드먼의 기세가 더욱 맹렬해졌다.

빛의 공간에 개입한 코르브스의 분신체는 한정적이었으니, 이 숫자만으로 결판을 봐야 했다.

사도들은 동귀어진할 각오로 로드먼에게 달려들었다.

푸욱……! 푸부북!

“컥……!”

“커흑……!”

베로니카와 아킬란은 몸에 창이 박혔지만, 로드먼에게 접근한 목적은 이루어냈다.

그의 복부에 베로니카의 검이 박혔고, 아킬란이 로드먼의 팔을 꺾어 고정하는 데 성공했다.

두 사도가 로드먼의 몸을 묶은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로드먼이 발작하려 하였다.

“네놈들이……!”

코르브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수인화를 풀고 완전한 인간 형태로 돌아온 그는 손에 어둠의 검을 만들어 내어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쿨럭……!”

로드먼이 피를 토했다.

심장이 정확하게 꿰뚫린 느낌이 손에 감겼다.

그 순간, 로드먼의 입가가 씩 올라갔다.

“드디어 찾았다.”

푸욱……!

코르브스의 눈이 커졌다.

로드먼이 소환한 빛의 창 하나가 그의 가슴을 꿰뚫고 있었다.

“커헉……!”

어둠으로 이루어진 검을 놓친 코르브스는 몇 걸음 물러나 몸을 숙였다.

심장이 멈춘 끔찍한 고통 때문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코르브스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로드먼은 신성력을 강하게 방출해 두 사도를 떨쳐 냈다.

사도들도 꽤 큰 상처를 입고 힘이 다했는지, 로드먼에게 곧바로 달려들지 못했다.

꿰뚫린 심장을 회복한 로드먼은 인상을 찌푸리며 코르브스에게 다가섰다.

“젠장…… 어둠의 힘이라 회복력이 온전치 않군.”

어느새 빛으로 이루어진 세상은 무너지고, 고독의 정글로 네 사람은 돌아와 있었다.

코르브스는 잠깐 고개를 들어 정글을 둘러보았다. 분열기는 여전히 저 멀리서 정글의 땅을 꿰뚫고 들어가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 패배. 코르브스에겐 죽음보다도 그것이 더 고통스러웠다.

이곳을 지켜 내지 못했다는 아픔이 심장을 꿰뚫은 고통보다 아렸다.

로드먼은 코르브스를 내려다보았다.

“겨우 분신체 따위가 광계(光界)로 진입할 순 없지. 당연히 본체가 따라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헉… 헉…….”

심장이 꿰뚫린 코르브스는 간간이 숨을 내쉴 따름이었다.

로드먼은 쪼그려 앉아 코르브스의 턱을 붙잡았다.

“빛이 뭔 줄 아느냐. 빛은 어둠을 꿰뚫는다. 속임수를 간파하고 진실을 바라본다. 나는 한순간도 네 본체를 놓치지 않았다. 그것이 너희가 패배한 이유다. 뭐, 본체를 마지막까지 숨겼더라도 싸움이 조금 더 길어질 뿐, 결과는 똑같았을 것이다. 나는 패배하지 않는다.”

“…….”

“빛은 언제나 승리한다. 비참한 말로로군. 신이 아닌 악마를 따른 대가는 저승에서 받도록 해라, 가여운 까마귀야.”

로드먼이 턱을 놓자, 코르브스의 상체가 기울어졌다.

심장이 꿰뚫렸지만, 코르브스는 쉽게 죽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어둠의 힘을 사용해 심장의 역할을 대신하도록 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한다.

너무나도 큰 타격. 어둠의 힘으로 육체를 복구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숨이 옅어져 가는 와중, 코르브스는 기울어진 세상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점점 까맣게 물드는 세상 속에서도 유일하게 누군지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주인…님……?”

여전한 모습의 노인.

힘을 되찾는 데 실패한 것일까.

그는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코르브스 앞에 나타났다.

‘돌아가시진 않았구나. 다행이다.’

‘나락’에 몸을 던진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아겔도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

헛것인지 몰라도 아겔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코르브스는 만족했다.

쓰러진 그의 목을 주름진 손이 안아 들었다.

예의 메마른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쉴 때가 아니다, 코르브스.”

언제나 듣던 목소리. 알 수 없는 온기가 코르브스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둠이 그의 눈꺼풀을 감겨 주었다.

* * *

아겔은 손수 코르브스의 눈을 감겨 주었다.

언제나 충성스럽게 명을 따라 주었던 오른팔.

마지막 남은 까마귀 수인.

불길하다 여겨져 사냥당했던 이 종족은 오직 코르브스만이 남게 되었다.

여기서 이렇게 가게 둘 수는 없다.

아겔은 코르브스의 꿰뚫린 가슴 위로 주름진 손을 얹었다. 그의 떨리는 손에서 흘러나온 어둠이 코르브스의 가슴을 꾸역꾸역 메웠다.

까마귀의 호흡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고 아겔은 그를 뉘었다.

허리를 들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드먼의 목소리가 들렸다.

“참으로 덧없는 희생이야. 목숨을 바쳐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리란 걸 모르는 모양이더군.”

파직…….

로드먼의 손아귀에서 신성력의 줄기가 번개처럼 스파크가 튀어나왔다. 사도들과 코르브스를 상대할 땐 사용하지도 않았던 힘.

“참으로도 오랜 시간이었다. 네 기다림은 아주 헛된 것이었지.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미련한 숨을 내가 직접 끊어 주마, 아겔라스토스.”

아겔은 말없이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코르브스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어둠이 단검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덧없는지 아닌지는 이제부터 봐야 할 일이지.”

단검을 쥔 아겔이 로드먼에게 쇄도했다.

두 자루의 단창을 든 로드먼은 무기를 교차해 아겜이 내리찍는 단검을 막아 내었다.

‘까마귀보다 겨우 조금 더 진한 정도인가. 이 정도 어둠이라면 충분히…….’

빛과 어둠이 부딪치자, 여유로웠던 로드먼의 표정은 단숨에 일그러지고 말았다.

-----!!

로드먼의 뒤에 있는 정글이 갈라졌다. 쩍 갈라진 대지는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큭……!”

귀를 울리는 소리마저 뚫고 아겔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빨리 쓰러지진 말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