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기업가와의 거래
황금의 행성, 아우레아.
성좌 교단의 본거지인 ‘성궁(聖宮)’이 있는 이곳은 태양이 지지 않는 곳이었다.
밤이 없는 이곳은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온도와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물론 자연적인 것은 아니었다. 성좌가 내린 축복과 교단의 핵심 인물들이 관리하는 곳이기에 해가 지지 않음에도 자연스러운 기이함이 서려 있는 곳이었다.
성궁의 최상층, 추기경 회의실.
그곳에는 부수석 추기경 가서스를 포함한 추기경단 대부분이 모여 있었다.
수석추기경 마크 바티스타와 오데이아를 비롯한 소수의 추기경은 보이지 않았다.
사제 한 명이 한쪽 비어 있는 공간에 홀로그램 화면을 띄웠다.
“이번에 고독을 치러 갔던 기사단 모함에서 전달받은 화면입니다. 바로 보시죠.”
가서스를 비롯한 추기경들은 유심히 상황을 살폈다.
정확히 고독의 대기권에서 찍은 아겔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춘 화면들. 모함을 침투하고 포격과 행성 분열기를 막아 내는 그의 위용에 추기경 중 누군가는 침음을 흘렸다.
-영악하군.
-역시 악마답다.
-흐음…….
충성의 사도가 아군 기사단 함대를 쓸어버리라는 명령을 내린 것에도 큰 동요를 보이지 않는 추기경들이었다.
외려 순교자들을 위해 짧게 기도문을 읊조리는 추기경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 그들도 마지막 부분에서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고독에 홀로 내려간 충성의 사도는 패배했는지 돌아오지 못했고, 뒤늦게 도착한 빛의 사도들이 고독을 없애 보려 했지만.
-세상에 맙소사…….
-저, 저게 뭐지?
추기경들이 홀로그램 화면을 보고 기함했다.
거대한 검은 손이 갑자기 나타나 항성 라비스를 산산 조각낸 것.
검은 손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고독을 가두고 있던 사도들의 신성력을 부수며 고독을 덮었다.
커다란 손은 고독을 감싸 쥔 채 튀어나왔던 블랙홀로 다시 빨려 들어갔고, 고독이란 행성은 온데간데없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화면이 종료되자, 회의실에 침묵이 감돌았다.
조용한 회의실에 누군가 읊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악마…….
방금 보았던 영상에서 나온 검은 손. 그것은 가히 악마가 현세에 강림했다고 봐도 무방할 만한 끔찍한 것이었다.
어찌 사람이 저만한 힘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추기경 중 하나가 가서스에게 물었다.
-가서스 경.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가서스는 하나로 땋은 수염을 가다듬었다.
“사라진 고독의 행방은 찾았는가?”
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고독이 사라진 이후, 공간이동의 반응이 정부 구역 곳곳에서 일어났으니, 그곳을 확인하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정부에게 협력을 요청해서 고독을 없애도록 하지.”
은하 정부는 대외적으로는 교단의 동맹인 단체.
거대한 영역을 아우르는 만큼 어마어마한 권세와 힘을 갖추고 있었다.
이번 일은 교단만의 일은 아니었기에 정부도 협력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서스가 말했다.
“사도님들의 행보는 어찌 되었지.”
그 물음에 사제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답했다.
“우선…… 원탁 소속 사도님들은 당연히 고독을 추적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이외의 분들은…….”
자비와 인내의 사도는 이미 아겔에게 붙잡혀 버렸다. 그리고 이번에 선발대로 나섰던 충성의 사도도.
원탁 소속이 아닌 소망과 양선의 사도도 아겔 쪽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컸다.
가서스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빛의 사도가 다섯이나 투입된 전투였는데도 아겔을 죽이는 데 실패했다.
4명의 사도가 뒤늦게 도착했다곤 하지만, 변명에 불과하다. 사도가 다섯인데 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아겔이 100년 전에 보여 줬던 그 힘을 전부 되찾았다는 말이 될 수도 있었다. 그 의미를 모르는 추기경은 이 자리에 없었다.
추기경 중 하나가 우려를 표하는 얼굴로 말했다.
-상황이 매우 좋지 않소. 이렇게 된 거… 그냥 아겔에게 그녀를 넘기는 게…….
홀로그램 영상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는지, 그 추기경은 약한 소리를 했다.
가서스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추기경들을 돌아보며 그들의 표정을 살폈다.
미약한 두려움, 미지에 대한 공포.
그것이 조금씩 얼굴에 드러나 있는 게 가서스에겐 보였다.
가서스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아겔에게 그녀를 돌려주는 건 좋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산드리 경. 지금 그녀가 우리 수중에서 떠난다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겠지요.”
추기경들이 침묵했다.
이들은 100년 전 사도 전쟁 때부터 이미 노년에 접어든 자들이었다.
아직도 이들이 살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질서의 힘을 남용해 그 숨이 붙어 있을 수 있던 것이다.
질서의 힘을 정기적으로 취하지 않는다면, 순식간에 노화가 진행되어 백골이 될 터였다.
“아마 끔찍한 꼴로 죽어 가겠죠. 아직 우주의 평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악독한 무리가 곳곳에 만연하고 그들의 대장격인 아겔라스토스라는 문제도 남아 있어요. 그것들을 정화할 때까지 우린 죽을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게 모두 성좌님의 뜻입니다.”
부드럽고 온화한 설득에 추기경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마음을 다잡았다.
-흠흠…….
-그게 맞지.
-평화로운 우주를 만들기 위해 우리 한 몸 희생하는 게지.
가서스가 팔을 펼쳤다.
“이제 아겔라스토스라는 거악을 어찌 처단할지 고민해봅 시다. 원탁의 사도님들과 협력한다면 반드시 할 수 있습니다.”
곧 추기경 회의실의 온도가 올라갔다. 열띤 목소리가 서로를 향해 날아들었다.
가서스는 식어 버린 차를 음미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사제 한 명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가서스 님.”
밋밋한 찻물을 목으로 넘긴 가서스가 사제에게 조용히 말했다.
“원탁에 소속된 어둠의 사도들을 호출하라. 만날 장소는 내가 정할 테니 모일 준비를 하라고.”
말을 들은 사제는 흠칫 놀랐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 * *
아겔은 반 정도는 폐허가 된 고독의 정글에 앉아 있었다.
이곳은 외계(外界). 은하 정부와 성좌 교단의 영역이 아닌 외부 영역이었다.
지성체들이 주를 이루는 광대한 ‘사투스(Satus) 구역’에서 인적이 드문 가장자리 영역을 외계라고 불렀다.
소행성들이 가득하고, 열과 빛을 발하는 항성이 적은 이 외계는 대외적으로 본능으로만 움직이는 생명들이 살아가는 곳이었다.
문명이라고는 눈을 뜨고 찾기 어려운 곳.
그러나 내계와 달리 외계를 근거지로 하여 살아가는 자들도 있는 법이었다. 음습하고 어두운 곳이니, 대중의 시선을 피해 접선하기에도 좋은 장소였다.
아겔은 평평한 바위 하나에 앉아 외계의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드디어 되찾은 시력.
흐르는 냇가에 비쳐 보았던 자신의 눈은 눈동자가 없는 검은색이었지만,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기쁨이었다.
66년간, 고독의 시간으로 400여 년을 어둠 속에서 살아온 그에게 다양한 색감은 질리지도 않는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청각과 후각, 촉각과 이제는 거의 흐려지는 미각만을 가지고 살아온 아겔에게 다시 더해진 시각은 마음의 활력을 돋아 주었다.
아겔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록 밝고 예쁜 은하수 같은 것은 없는 외계였지만, 때때로 스쳐 지나가는 유성들을 보기엔 좋았다.
고독의 대기권을 스쳐 지나가는 먼지들이 형형색색으로 타오르는 모습은 마치 불꽃놀이를 보는 듯했다.
파아아앗…….
마법진이 아겔 주위로 나타나더니, 두 사도가 나타났다.
베로니카와 아킬란은 조용히 아겔 옆에 앉았다.
“아겔. 크록투스를 동력실이란 곳에 데려다주고 왔소. 그곳은…… 참으로 다루기 어려운 곳 같더군.”
“잘했네. 함부로 만지지만 않으면 고독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기도 하니 걱정하지 말게.”
아킬란이 조금 우려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아겔. 로드먼은 어디에 데려다 놓은 거요. 그는 우리와 달리 죄책감으로 묶인 사내가 아니오. 가둬 놓아도 부수고 탈출할 가능성이 있소.”
아겔이 답했다.
“이곳에 ‘나락’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네. 그곳에서 신성력을 쓸 수는 없을 걸세.”
“……나락?”
“아주 깊은 구덩이지. 자력으로는 빠져나오지 못할 거라네.”
자력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신성력까지 봉인되는 장소. 이 우주에 그런 장소는 없다.
하지만 아겔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 것이다.
두 사도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새삼 그가 그곳에 자신들을 던져 넣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었다.
아킬란이 궁금한 게 있다는 듯 질문했다.
“아겔, 저번에 크록투스의 영혼을 취했다고 하지 않았소.”
“그랬지.”
“정말로…… 크록투스는 뭔가 좀 변한 것 같더군.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거요. 교단의 기사들은 성좌께 영혼을 바친 자들이오. 기사단장인 크록투스는 말할 것도 없지. 헌신의 맹세를 깨고 그런 일을 할 수가 있는 거요?”
힐난하는 듯한 말투가 아니었다. 빛의 사도인 아킬란조차 알지 못하고 정말 궁금했기에 하는 질문.
성좌기사단에 입단하는 자들은 모두 성좌에게 영혼을 바치겠다는 ‘헌신의 맹세’를 한다.
그로 인해 여타 다른 악의 세력에게 영혼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도록.
실제로 헌신의 맹세를 한 자들은 성좌가 그 영혼을 보호해 주기에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영혼을 빼앗겼던 일이 없었다.
적어도 기록된 바로는.
그 전례 없는 일을 아겔이 했다는 것이었다.
아겔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영혼을 다루는 건 성좌들이 하는 일이 아닐세. 물론 자네들이 한다는 그 맹세로 인해 성좌들이 영혼을 보호해 준다는 말도 틀리진 않지만.”
“그럼……?”
“영혼을 다루는 일은 내가 하는 일일세.”
얼핏 들으면 오만한 말이었지만, 그 말을 하는 자가 이 노인이었기에 아킬란은 반박할 수 없었다.
베로니카가 아겔의 눈을 유심히 살폈다.
“눈은 도대체 어떻게 되찾은 거죠? 원래 눈이 없는 것 아니었나요?”
“처음부터 눈이 없던 건 아닐세. 그저 붕대로 눈을 가리고 다녔을 뿐이네.”
“왜 멀쩡한 눈이 있는데, 가리고 다녔죠?”
“어둠의 사도들이 시험을 받고 사도가 된 것은 알고 있나?”
아겔이 조금 엇나간 것 같은 주제를 언급했지만, 팔짱을 낀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아겔. 그들은 각자 끔찍하고 역겨운 시험을 통과하고 어둠의 사도가 된 자들이죠.”
아겔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비슷하네. 나의 경우는 66년 6개월 6일 6시간 6분 6초를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살아남는 것이었지. 어차피 눈이 있어도 볼 수 없었고, 오직 다른 감각으로만 살아왔다네.”
“…….”
아킬란과 베로니카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성좌의 선택을 받는 빛의 사도들과 달리 어둠의 사도는 악마의 시험을 받는다.
각자 끔찍한 시험을 견뎌 내고, 그 직위를 받는다. 공좌들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혹은 개인의 사욕을 위해서.
뭐든 상관없다. 시험만 통과하면 어둠의 사도가 될 수 있다. 그 시험이 너무나도 끔찍하고 어려운 것이라 문제였지.
한참 흐른 정적 속에서 아킬란이 질문했다.
“그렇다면…… 오직 복수를 위해 그 시간을 견뎠단 말이오.”
아겔이 고개를 저었다.
“내 진정한 목표가 복수가 아닐세. 그건 부차적인 일이지.”
아킬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그녀를 되찾으러 갈 생각이오? 쉽진 않을 텐데.”
“급할 것 없네. 우선 정산할 게 있어서 말이지.”
“정산?”
쉬이이이익……!
어디선가 공간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킬란과 베로니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고, 고독 상공에 이제 막 도착한 함선들을 볼 수 있었다.
펑펑펑펑펑……!
최소 수백 단위의 함선들이 워프해 오는 소리가 하늘에서 울려 퍼졌다.
거대한 함선 중에는 기사단 모함의 크기를 넘어서는 것은 없었지만, 숫자만큼은 뛰어넘었다.
웬만한 함대 규모는 저리 가라고 말할 수 있는 규모에 아킬란과 베로니카는 굳은 얼굴을 했다.
“이건 함대는…….”
“기업가의 함대라네. 내가 불렀지.”
고독이란 행성 교도소를 만드는 것은 기업가가 정부와 교단에 건의한 일.
사실 그것은 아겔과 기업가가 이전부터 계획하고 진행했던 일이기에 두 사람이 만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킬란이 말했다.
“자리를 비켜 줘야 하오?”
“그럴 필요는 없네.”
아겔이 대답하자마자, 주변에 빛이 어렸다.
함선으로부터 쏘아진 빛을 통해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거리 순간이동 기술이 이 자리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하늘에서 고독의 땅으로 강림한 빛줄기는 단 3개.
그 속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교도소장 슈리오센 아글라이거.
봉인술사 라반.
그리고 기업가.
합법과 불법의 영역을 드나들며 어마어마한 자본을 끌어모으는 그는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우주에서 영향력 있는 ‘귀족’이었다.
그를 보좌하는 소장과 봉인술사도 10급에 달하는 강자들. 물론 아겔 옆에 서 있는 두 사도에 비해선 손색이 있었지만, 어디 가서 무시당할 만한 자들은 절대 아니었다.
셋 중에서 가장 젊어 보이는 기업가는 얇은 눈으로 미소를 짓고 있는 청년이었다.
“오랜만이군요, 아겔라스토스. 곁에 멋진 친구분들도 두셨군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카라이스만이 절제된 동작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흠잡을 데 없는 깔끔한 인사였지만, 왠지 모를 장난스러움이 담겨 있는 듯했다.
아킬란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도 반갑다, 카라이스만.”
“하하, 고명하신 자비의 사도께서 제 이름을 알고 계시다니 이것 참 영광입니다.”
“모를 수가 있나. 암중에서 갖은 방법으로 돈을 쓸어 담는 거악의 이름인데.”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악명 높은 거악이 되도록 노력해보도록 하지요.”
아킬란은 카라이스만을 노려보았다.
“자네…… 인간이 아니었군.”
정체를 꿰뚫어 보는 빛의 사도의 눈에 카라이스만은 어깨를 으쓱했다.
“휘유~ 역시 빛의 사도이십니다. 전 인간이 아니죠. 어떤 종족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거북이?”
카라이스만이 가볍게 박수했다.
“정답입니다. 대부분 제가 수인이라고 하면 하이에나나 이리, 늑대 같은 것을 떠올리곤 하는데, 역시 사도님을 속일 수는 없군요.”
카라이스만은 씩 웃으며 마치 의자에 앉는 것처럼 허공에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아 소장과 봉인술사가 카라이스만 양옆에 섰고, 빛의 사도들도 아겔 옆에 서서 세 사람이 마주 본 형국이 되었다.
소장과 라반은 사도들을 마주해 조금 긴장한 듯한 얼굴이었고, 사도들은 조금 날카로운 기색으로 상대편을 바라보았다.
긴장하지 않은 것은 오직 아겔과 카라이스만뿐인 자리였다. 다리를 꼬고 앉은 카라이스만이 아겔을 보고 말했다.
“흠흠. 부담스럽군요. 참으로 무서운 눈입니다. 온통 검은색밖에 없다니…… 죄송하지만, 절 똑바로 보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아겔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잡담은 그만하지. 본론으로 들어가세.”
카라이스만이 두 손을 비비며 말했다.
“하하, 죄송합니다. 우선 축하한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드디어 66년을 채우셨군요. 저는 이때만을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아겔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찰나 같았지.”
“그런가요? 제 일생에서는 이렇게 느리게 흐르는 66년은 처음이었습니다. 어쨌든 거두절미하고, 거래 내용을 다시 짚어 보도록 하죠. 괜찮습니까?”
“그러세“
딱.
카라이스만이 손가락을 튕기자, 소장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아겔과 카라이스만이 지장을 찍은 계약서. 온전하게 보관된 계약서엔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계약서상 내용을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을’, 에드워드 카라이스만은 ‘갑’, 아겔라스토스가 행성 ‘고독’에서 66년 6개월 6시간 6분 6초 동안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돕는다.”
생각보다 간단한 내용이었지만, 실은 간단하지 않은 일이었다.
고독이란 행성 감옥을 준비하고, 정부와 교단의 시선을 피해 아겔을 숨겨 주어야만 했으니까.
‘돕는다’란 애매하고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말에는 그런 의미까지 전부 포함된 것이다.
아무리 독자적인 영역을 가진 귀족, 카라이스만이라도 리스크가 큰 내용이었다. 자칫 잘못하여 들키게 된다면, 교단과 정부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으니.
아킬란이 말했다.
“처음부터…… 두 사람이 계획했던 일이었군.”
고독이란 우주 최악의 범죄자들만을 집어넣는 교도소를 만들고 그곳에 아겔을 숨긴다. 지금까지는 성공적으로 이행된 일이었다.
카라이스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100년 전. 사도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아겔이 제게 와서 거래를 제안했죠. 일생일대의 기회였습니다.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내게 찾아와 거래를 제안하다니. 이런 제안은 제가 살아온 수백 년의 세월 동안 가장 흥분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황홀한 얼굴로 옛일을 회상하는 듯했다.
이득과 재산에 극도로 집착하는 광기가 엿보이는 듯했다.
아킬란이 침을 삼켰다.
“그럼, 네가 요구한 것은 무엇이지.”
카라이스만이 대답하기 전에 아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악마.”
“……?”
아킬란과 베로니카는 자신들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러나 이어진 아겔의 확답으로 경악을 감추기 어려웠다.
“악마를 사로잡아 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