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악마를 믿는 자들 (3)
빛은 감춘 것을 드러내고, 어둠은 모든 것을 감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테지만, 아겔은 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부터 이질감을 느끼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이 젊은 처자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찌르르하고 울렸다.
하나 아겔은 곧바로 그 거짓의 가면을 벗겨 내지 않았다.
“진정하고 말하게. 이 마을 사람들이 자넬 왜 죽이려는지.”
한동안 숨죽여 울던 여자는 가까스로 울음을 그쳤다.
한가득 고인 눈물을 두 팔로 비벼 닦아 내는 모습은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우, 우선 이 마을에 대해 아실 필요가 있어요…… 사실 이 마을 사람들은 전부 잡혀 온 사람들이에요. 알고 있나요?”
마물 인간의 기억을 읽어 알고 있었지만, 아겔은 고개를 저었다.
“몰랐네. 이곳 사람들이 전부 잡혀 온 사람들이라니. 내 외계를 탐사하면서도 그런 일은 본 적이 없네만.”
“거짓말이 아니에요, 믿어 주세요.”
“일단 알겠네. 계속 이야기해 보게.”
“네…… 보셨다시피 이 마을엔 어린아이와 노인이 없어요. 전부 제물로 바쳐졌거든요.”
“제물로 바쳐졌다라…….”
“늙은 자들이나 어린아이들은 전부 제물로 바친다고 어디론가 끌려가요. 어떻게든 이곳에 적응해 아이를 가지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그들이 와요. 아이들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몇 번의 합방으로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자도 제물이 되어요. 전 아이를 가지지 못한 게 몇 해째 되고 있어요. 제발요. 절 살려 주세요.”
감정 섞인 말투에도 아겔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그들? 그들이 누구란 말인가.”
여자가 침을 삼키고 말했다.
“그들에 관해선 이야기하면 안 돼요. 잡혀갈지도 몰라요.”
“적이 누군지 알아야 내가 도와주지 않겠는가.”
“아, 안 돼요. 말할 수 없어요.”
“그럼 나도 도와주기가 어렵지. 적이 누군지 모르는데 함부로 움직일 수 없지 않겠는가.”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에게서 구해 달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냥 나랑 한번 자요. 지금이 가임기이니 충분히 아이를 가질 수 있어요.”
헛웃음이 나오는 요청에 아겔은 거절했다.
“미안하네. 아내가 있는 몸이라. 그리고 이런 늙은이에게 너무 수치스러운 것을 바라는군.”
“제발요. 딱 한 번만요. 그럼 저도 더 이상 귀찮게 굴지 않을게요. 이번이 제 마지막 기회에요.”
그녀는 자신의 애처로움을 호소하듯이 말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아겔은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지. 그럴 수는 없네.”
그가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여인의 눈이 조금 바뀌었다.
두려움에서 약간의 분노로.
그녀는 아겔의 가슴을 밀어 쓰러뜨리면서 옷을 벗으려 했다.
“씨발……! 도대체 아내가 있는 게 무슨 상관이야! 그냥 씨 한 번만 주면 되잖아……!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 괴물들에게서 날 구해 주지 않아도 되니까! 그 정돈 해 줄 수 있잖아……!”
아겔의 몸에 올라탄 그녀가 고개를 숙이기 전.
주름진 손이 그녀의 목을 콱 붙잡았다.
“컥……!”
“선을 넘는구먼.”
아겔이 다른 손을 여인의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얼굴 앞에 있는 기이한 흐릿함을 붙잡은 아겔은 그대로 그것을 찢어 버렸다.
허상이 찢어지며, 여인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목을 놓아준 아겔은 천천히 일어서며 뒤로 넘어간 여인을 바라보았다.
마물.
그것도 인간의 형상과 비슷한.
방금까지 인간의 얼굴은 사라지고, 흉측한 모습의 마물이 고통으로 버둥거리고 있었다.
“잡혀 왔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란 건 알고 있네. 아마 그 모습이 되기 전에도 자넨 확실히 인간이었겠지.”
“끄아아아악…… 내, 내 얼굴……!”
“아이를 못 낳았다면, 자네가 그 꼴이 되진 않았겠지. 6명…… 아이를 낳아 살기 위해 제물로 바쳤으니, 자넨 마물이 되어 가는 거라네.”
아겔에게 했던 말과 달리 그녀는 이미 아이를 낳아 제물로 바친 상태였다. 순식간에 그녀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온 아겔은 여섯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물론 계속해서 아이를 낳지 못하면, 제물로 바쳐진다는 말은 사실일 거다.
하나 살기 위한 것 말고도 그녀가 아이를 낳아 바치려는 이유는 더 있었다.
아겔이 담담히 말했다.
“처음이 어렵지. 아이를 낳아 바치는 것.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는 쉬웠을 게야. 아이를 제물로 바칠 때마다 쾌락이 느껴졌을 테니.”
음행의 공좌는 아이를 제물로 바친 자들에게 쾌락을 선사한다.
그리고 아이를 바친 자는 평범한 사람이었을 때는 느껴보기 힘든 색다른 쾌락을 느끼고 점점 마물을 닮아 간다.
마물의 힘을 얻기 위해 악마에게 제물을 바치는 자들도 있었다.
하나, 그것은 겨우 악마의 하수인이 되는 일이란 걸 아는 자는 많지 않았다.
한 번 제물을 바치고 마물이 되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정신력이 아주 나약하거나 강력하지 않은 이상, 자살도 제대로 못 하는 게 현실이다.
돌연 여인이 벌떡 일어나 표독스러운 얼굴로 아겔을 바라보았다.
“힉힉힉…… 전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네. 그럼 앞으로 네 운명이 뭔지는 알아? 바로 죽음이야. 네 숨이 끊어지면, 난 네 아랫배를 파서 끄집어낸 체액으로 다시 한번 제물을 준비할 거다.”
돌이킬 수 없다.
알아서 공좌에게 제물을 바치는 하수인. 그 행위로 인해 악마가 주는 보상을 거역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 시작이 타의든, 자의든 상관없다.
이것이 악마를 믿는 자들이었다.
캬아아악!
여자가 날카로운 손톱을 휘두르며 아겔에게 달려들었다.
아겔은 물러서지 않고 선 자세로 일장(一掌)을 내질렀다.
쾅-!
벽이 완전히 박살 나며, 여자가 밖으로 튕겨 나갔다.
부스스 피어오른 먼지 사이로 아겔이 마을로 나갔다.
마을 사람들이 전부 아겔이 들어간 집을 에워싸고 있었다. 처음부터 아겔을 죽일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촌장이 아겔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쯧, 눈치챘군.”
“제가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괜찮다. 그들이 오고 있으니. 아무리 강해도 그들 앞에선 힘을 쓰지 못할 거다.”
아겔은 천천히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이 어둠의 힘으로 둘러싼 가면, 허상들이 눈에 들어왔다. 잘 꾸며진 것이었지만, 아겔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우우웅…… 탓!
마을 사람들이 가타부타 말없이 공격을 시작했다.
전사들이 쇄도하는 동시에 촌장과 여인들의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겔은 뾰족한 나무 창들을 피하면서, 정신을 흔드는 환각을 느꼈다.
'음행은 환각, 정신 착란의 권능이 있지.'
공좌에게 제물을 바쳤으니, 그 악마의 힘을 쓸 수 있는 게 당연하다. 하수인이니 그 정도 보상은 베풀어 주는 것이다.
신성력이나 강한 정신력, 혹은 맑은 빛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면, 이런 환각에 대응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아겔에겐 전부 헛수고나 다름없었다.
주름진 손이 땅을 짚었다.
그리고 진짜 환각이 시작되었다. 순식간에 마을이 어두워졌다.
밤이라 어두운 건 당연했지만, 마을을 밝히는 횃불들이 그대로 빛을 내고 있는데도 주변이 심연에 잠긴 것처럼 어두웠다.
마을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의 발 정도였다.
-젠장……! 앞이 안 보여!
-어딨어! 그 늙은이 어디에 있냐고!
-끄악! 함부로 창 휘두르지 마!
마을의 분위기가 당혹스러움에 물들었고, 아겔은 멈추지 않았다.
“제이콥.”
그가 천천히 땅을 짚은 손을 떼자, 무언가가 픽픽 땅을 뚫고 올라왔다.
-크륵… 크르르륵…….
그건 고블린의 손이었다. 얇고 야윈 고블린의 손.
갈라지고 날카로운 손톱을 가진 손이 먼저 땅을 뚫고 나왔고, 이윽고 그 본체도 모습을 드러냈다.
-키에에에엑……!
-켁켁켁켁켁!
보부상, 제이콥.
수많은 제이콥이 땅을 뚫고 나와 어둠을 헤매고 있는 마을 사람들, 아니 마물 인간들에게 달려들었다.
-이게 뭐야!
-고블린들이다! 별거 아니니까 죽여!
고블린 따위는 마물의 발끝도 쫓아가지 못하는 존재. 마물 인간들은 창과 주먹, 발길질로 제이콥들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고블린들의 몸은 창과 주먹에 스칠 때마다 연기로 화해 사라졌고, 또 다른 고블린이 계속 몰려왔다.
허상 같은 고블린들은 손톱을 휘둘러 마물 인간들의 몸에 상처를 냈다.
마물 인간들의 공격은 통하지 않았지만, 고블린의 공격은 통했다. 혼비백산한 마물 인간들이 더욱 발광했으나 제 체력만 깎아 먹는 자충수였다.
아겔은 느긋하게 서로를 찌르는 마물 인간들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어둠 사이로 활보하는 7~8살 된 아이만큼 조그만 고블린들. 저 제이콥들이 가짜일까 진짜일까. 그들은 날카로운 손톱이 살과 피부가 찢겨 나가는 와중에도 알지 못할 것이다.
아겔은 아까 자신의 방에 들어왔던 젊은 여인을 찾았다.
어둠이 마물 인간들의 시야를 가린 것과 달리 아겔은 어둠 속에서도 단번에 그녀를 찾아내었다.
제이콥들이 손톱으로 그녀의 손발을 찍어 도망치지 못하게 잡아 두고 있었다.
“끼아아아아악-! 이거 놔라, 이 고블린 새끼들아!”
그녀는 아겔을 보자마자 더욱 크게 비명을 질렀다.
아겔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컥……!”
“네게 자식이 있었다면, 딱 이만한 키였겠지.”
아겔이 고개를 돌려 젊은 여인의 팔을 붙잡고 있는 고블린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눈물이 흐르는 눈도 고블린을 흘긋 바라보았다.
“컥컥…….”
“이승에서 사과할 기회는 없어졌구나. 그게 얼마나 애통한 일인지 저승에 가서 깨닫거라.”
아겔은 턱을 놓아주고 몸을 돌렸다.
검은 침을 뚝뚝 흘리는 고블린들이 여인에게 이빨을 가져갔다.
“끼아아아악……! 아파! 아파아아악--!! 끄어어어어억…….”
살점이 씹히는 소리를 뒤로하고 아겔은 이번엔 촌장을 찾았다.
촌장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주변을 감싼 수십 마리의 제이콥들을 창으로 찌르고 있었다.
“오지 마! 오지 마, 이 미물 새끼들아!”
“내 친구를 미물이라고 말하니, 참 섭섭하군.”
“너……!”
다가온 아겔을 보고 촌장이 눈을 치켜떴다.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줄 알아? 이미 그들을 불렀다. 그들이 오면 넌 끝이야!”
“마물 군대 말인가.”
아겔은 태연하게 턱수염을 쓸었다. 그가 뭔가 아는 듯한 기색에 촌장은 눈을 크게 떴다.
“너…… 그들을 알아?”
“이 행성에 와서 한 친구가 가르쳐 주었다네. 공교롭게도 난 그 친구들을 만나야 했는데, 이렇게 자네가 불러 주었으니 고맙다고 말해야 하나 고민 중이네.”
“너… 너는 도대체…….”
푸확!
촌장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아겔이 벌레 단검을 휘둘러 창을 든 팔을 잘라 버렸다.
“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그에게 고블린들이 달려들었다.
살점 씹히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겔은 마을이 잠잠해질 때까지 밖으로 나와 별이 거의 보이지 않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쪽에서 빛이 번쩍이는 걸 보니, 아직 고독을 지키는 기업가의 함대가 마물 군대와 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밀리진 않겠지. 그런데…….”
아겔은 고개를 내렸다.
저 멀리서 지축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구원 요청을 했다더니, 벌써 올 줄은 몰랐다.
마물의 군대.
음행의 사도가 직접 이끄는 괴물로 이루어진 군세.
사도 전쟁에서 공포스러운 존재들이라 알려진 그들이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었다.
“드디어 신전에 갈 수 있게 되었구먼.”
어떻게 그들을 상대할까 고민하던 아겔은 탄식을 냈다.
“델라무…… 너도 난리 통에 죽은 모양이구나.”
제때 확인하지 못했는데, 싸움꾼 델라무도 이미 죽은 모양이었다. 아마 원탁이 고독의 복도를 싹 쓸어버릴 때 그랬던 것 같다.
“다 싸우지 못한 한(恨)은 여기서 다시 풀게 해 주마.”
아겔이 팔을 들었다. 땅을 향한 손바닥에서 검은색 먹물 같은 것이 끈적하게 흘러나왔다.
바닥에 툭툭 떨어진 먹물은 이윽고 사람의 형체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싸움꾼 델라무.
죽었던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영감.]
저승에서 돌아온 델라무는 아겔을 바라보았다.
아겔은 손을 들어 앞으로 달려오는 마물의 군대를 가리켰다.
“네 적이다.”
“…….”
델라무는 자신의 죽음이 억울하다든가 그런 말은 지껄이지 않았다.
그저 싸울 대상을 가르쳐 주자, 검게 물든 입꼬리가 씩 올라갈 뿐이었다.
[고마워, 영감.]
아겔과 델라무가 동시에 마물 군대를 향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