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72)화 (173/186)

172화 마물 군대 (2)

[젠장,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거리지?]

탈라스는 제멋대로 움직이는 몸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분명 저승에 있었는데, 저 괴물 같은 노인네가 다시 이승으로 자신을 불러낸 것이다.

[내가 왜 네놈 마음대로 움직이는 거냐고! 대답해-!]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 자신을 죽인 저 노인을 찢어 버리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세뇌 능력으로 육체의 통제권을 빼앗았던 죄수들처럼 탈라스 자신도 본인의 능력에 당하는 듯한 느낌에 분노를 느꼈다.

고래고래 아겔을 죽이겠다고 소리치는 것과 다르게 탈라스는 꽤 큰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원래는 9급이었을 탈라스. 아겔이 불러내 더욱 강한 힘을 가지게 된 그는 평범한 마물들 따위가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 형상화된 검은 쇠사슬이 마물들을 옥죄어 터뜨려 버렸고, 두 손에 든 낫은 앞을 가로막는 건 무엇이든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탈라스가 지나간 자리에는 온전한 마물의 시신이 아예 없을 정도였다.

현재 8급의 힘을 내는 델라무보다 겨우 1급수 위였지만, 거의 9급 각성자 끝자락의 위용을 보여 주는 탈라스였다.

아겔이 끌끌거렸다.

“저승에 있다가 이승에 올라왔으면, 감사할 줄 알아야지. 꽥꽥거리는 건 듣기 싫으니 입 좀 닫게.”

[읍, 읍읍! 읍읍읍 읍읍읍 읍읍!(너, 진짜! 언젠간 복수할 테다!)]

탈라스는 그때부터 입이 달라붙어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미친 듯이 날뛰는 델라무와 탈라스, 두 사람과 달리 주술을 사용하던 위령은 슬그머니 아겔 쪽으로 붙었다.

[영감님. 마물이 끝도 없이 와요.]

“그게 놈들의 장점이지.”

확실히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평선 너머에서 마물들이 끝도 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 행성에 있는 마물은 전부 이곳으로 달려올 기세였다. 이러면 행성을 부수지 않는 이상, 손쉽게 마물의 군단을 쓸어 버릴 방법은 많지 않았다.

위령이 손가락을 움직여보았다.

[이 불완전한 부활…… 저흰 지치지도 죽지도 않는군요. 만약 이승에 계속 머물 수만 있다면, 영원히 싸울 수도 있겠어요.]

“그게 너흴 부른 이유지. 난 허리 아프니까.”

아겔의 농담에 위령이 빙긋 웃었다.

[훗.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요. 그런데 찾으시는 게 있으신 거죠? 이곳 기운이 참 요상한데, 뭘 찾고 계신 거죠?] 

아겔은 거리낌 없이 말해 주었다.

“공좌의 신전으로 가는 입구를 찾고 있다.”

위령의 눈이 커졌다.

[과연…… 공좌의 신전. 손쉽게 도달할 수 없는 곳이라고는 들었어요. 어떻게 갈 수 있는 거죠?]

“너희들이 마물 군단을 적당히 두들겨 패면 입구가 알아서 제 발로 올 게다.”

[아.]

뭔가를 깨달았단 눈빛을 한 위령이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영감님. 입구란 그런 의미였군요.]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 자, 이제 가 보거라.”

[네.]

아겔 곁에 있던 위령도 천천히 걸음을 옮겨 마물 군단이 몰려드는 곳으로 향했다.

저승에서 돌아온 3명의 망자가 상대하고 있는데도, 마물의 군대는 사라질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많아지는 듯했다. 새로 나타나는 마물들이 많아서 그런지 시체가 점점 쌓이며 이젠 발 디딜 땅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겔의 눈은 개미 떼처럼 모인 마물 군대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가 찾는 것은 마물의 ‘장수’. 사도 밑에서 마물 군단을 이끄는 역할을 맡은 자들이다.

100년 전 사도 전쟁 때, 마물이 전 우주를 공포로 몰아넣었을 수 있었던 건 단순한 잔혹성이나 숫자 때문이 아니었다.

사도의 명령을 받아 마물 군대의 수를 나누어 전술적으로 공세를 퍼붓던 장수들.

전쟁이 뭔지 이해하고 있는 그들의 존재는 마물에 대한 공포감이 커지는 데 확실한 몫을 했다.

그들은 평범한 마물과 달리 본능만 남아 있는 게 아니라, 지략과 기술을 두루 갖춘 자들.

손쉽게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휙.

마물 군대 한가운데서 붉은 안광이 움직였다.

아겔은 그 시선이 따라가는 곳을 놓치지 않았고, 그 끝에는 주먹만으로 마물들을 갈아 버리고 있는 델라무가 있었다.

내지르는 주먹의 충격에 흙먼지가 즐비한 곳이었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자라면 겨우 흙먼지 따위에 적을 공격하지 못하는 자는 없다.

마물의 물결 속에서 날카로운 암초와 같은 공격이 델라무에게 향했다.

[흡……!]

델라무는 기습이란 걸 눈치채긴 했지만, 완전히 피하긴 이미 늦었다.

몸을 쪼개 버릴 듯이 휘둘러지는 거대한 양날 도끼.

피하는 대신 억지로 몸을 비틀어 주먹을 내질러 보았으나 역시 결과는 선공을 가한 쪽의 손을 들어주었다.

콰아아앙-!

공격과 공격이 맞부딪치는 충격파가 터져 나오면서 마물의 물결이 한순간 뒤로 밀려났다.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팔 한쪽이 완전히 날아가 버린 델라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키가 5미터쯤 되어 보이는 미노타우르스도.

“우우우움…….”

낮고 중후하게 깔리는 목소리를 가진 놈은 마물 중에서 그리 큰 편에 속하진 않았다.

지금 있는 마물들만 해도 큰 것은 20미터를 가볍게 뛰어넘는 놈들도 있었기에. 

그러나 놈이 가지고 있는 힘은 ‘장수’에 걸맞은 것이었다.

델라무는 팔이 한쪽 없는 모습으로도 전혀 아파하는 기색이 없었다.

심지어는.

꿀렁…… 뚝. 뚝. 뚝.

잘려나간 왼팔의 단면에서 먹물이 쏟아져 나왔고, 어느새 다시 복구된 팔을 볼 수 있었다.

델라무는 되찾은 왼팔을 움직여 보았다.

[이거… 끝내주잖아…….]

가히 도마뱀에 비견할 만한 회복력.

죽지 않는다. 지치지도 않는다. 이대로라면 영원히 싸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2차전. 해 볼까, 소 새끼야?]

“움머어어어어-!”

입가에 미소를 띠고 달려드는 델라무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이 전장에서 가장 작은 게 아닐까 싶은 노인이었다.

쾅!

어떤 공격을 받았는지도 모르고 미노타우르스가 한없이 멀리 튕겨 나갔다. 마물들을 쓸어 버리며 튕기는 마물 장수.

아겔이 뒷짐을 지고 말했다.

“내가 널 저승에서 불러왔지만, 이게 만능은 아니다. 시간의 한계가 있다.”

[그렇군. 그럼 이제 곧 우리 모두 돌아가는 건가?]

아겔이 고개를 저었다.

“다는 아니지. 탈라스 녀석은 이미 돌아갔고, 위령은 너보다 조금 더 오래 이승에 머물 수 있을 게야.”

[기준 같은 게 있나 본데. 그게 뭐야, 영감.]

아겔이 턱수염을 문질렀다.

저승의 사자(死者)를 이승으로 불러내는 건 아겔의 능력이지만, 이곳에 머무는 시간은 오직 본인에게 달린 일이었다.

“생전에 지니고 있었던 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있다.”

[생전의…… 빛? 그게 뭔데. 나한테 그런 말 한 적은 없잖아.]

“어차피 돌대가리에게 설명해 봐야 무얼 하겠느냐.”

[젠장, 나 가방끈 짧다고 무시하는 거야? 다음번에 이승으로 날 부를 땐 가만 안 두겠어.]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델라무가 짧은 이별을 고했다. 돌아갈 시간이란 걸 아는 것이다.

[다시 보자고, 영감. 아, 눈 되찾은 거 축하해. 그 무서운 눈을 여태 잘도 숨기고 다녔네. 확실히 붕대를 감고 다니는 게 더 낫긴 하다.]

“예끼, 놈아. 얼른 꺼져라.”

델라무를 이루고 있던 먹물 같은 어둠이 축 늘어져 바닥에 흩어졌다.

아겔은 슬슬 걸음을 옮겨 즉사한 미노타우르스 시체를 향해 걸었다.

위령도 어느새 아겔 곁으로 와 있었다. 그녀가 주술로 방어진을 펼쳐 놓아서 접근할 수 있는 마물이 없었다.

[이놈이…… 신전의 입구 역할을 하고 있었던 거군요?]

“역시 령아는 말이 잘 통해서 좋구나. 이승으로 자주 불러 주마.”

[칭찬 감사해요, 훗. 그런데 이렇게 보면 한 8급 마물 정도 되는 것 같은데, 단번에 죽이셨네요. 이젠 정말…… 죄수는 아니신 것 같아요. 옷만 어떻게 하면 좋겠네요.]

여전히 죄수복을 입고 있는 아겔이었지만, 분위기 자체가 이전과는 매우 달랐다. 목에 찍혀 있는 51이란 붉은 낙인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아겔이 죄수복을 털며 말했다.

“내 기업가 놈에게 정장 한 벌 맞춰 달라 해 보마. 그럼 되겠지?”

위령이 단아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죠.]

돌아갈 시간이 되자, 위령도 작별을 고했다.

[가 볼게요, 영감님. 몸조심하세요. 언제든 불러 주시고요. 줄리안이 다른 여자에게 눈독 들이지 않도록 잘 봐 주시는 것도 부탁드려요.]

“오냐. 놈이 다른 여자를 보는 순간 눈알 두 쪽 다 뽑아 주마.”

[호호, 이승에선 결혼식을 못 했으니, 저승에선 주례 서 주실 거죠?] 

“물론이다. 꼭 가마. 하객 걱정은 말아라. 아주 많이 올 테니.”

청아한 미소를 짓고 있던 위령도 먹물처럼 흘러내려 바닥에 쏟아졌다.

아겔은 위령의 주술진이 사라지는 순간, 쓰러진 마물 장수의 눈 하나를 뽑아 냈다.

촤악!

이것이 신전으로 가는 ‘키’.

마물 장수는 어둠의 사도가 직접 택해 기르는 만큼, 입구를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모든 마물 장수의 눈이 신전으로 가는 통로가 되진 않았지만, 지금은 단번에 찾을 정도로 운이 좋았다.

“일이 잘 풀리는구먼.”

마물들이 쏟아져 오는 것과 동시에 아겔이 손에 쥐고 있는 눈알을 꽉 쥐어 터뜨렸다.

그리고 노인의 모습은 마물 군대 사이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 * *

공좌의 신전. 혹은 악마의 신전이라 불리는 장소.

그곳이 존재하는지조차도 대다수 사람에겐 아직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가는 방법도, 갔다 온 사람도 전무한 그저 허공을 나돌기만 하는 소문. 그러나 악마의 신전은 분명 존재하는 곳이었다.

지금 이곳도 악마의 신전 중 하나였다.

광활한 우주 같은 공간. 별빛이 사악한 녹빛으로 빛나는 곳에 덩그러니 거대한 신전이 하나 있었다.

신전 바로 앞에는 거대한 술잔을 떠받치는 사람의 석상이 있었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조금은 취한 듯한 표정. 술잔을 받치고 있는 자세가 흔들리는 듯함을 표현한 예술품이었다.

석상을 지나 신전 입구에 들어가자, 거대한 광장 같은 곳이 있었다.

질펀하게 술을 마셔 대는 자들의 그림이 바닥에 그려져 있었고, 벽에는 마치 새겨진 듯 정교한 음각 그림이 있었다.

천장에는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술잔들이 둥둥 떠 있었는데, 모두 불이 붙어 사방을 밝혀 주고 있었다.

신전의 가장 안쪽.

고풍스러운 문을 지나니, 두 사람이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쪽은 고주망태가 된 것처럼 술잔을 쥐고 있었고, 한쪽은 퉁명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기다리다 못한 퉁명한 얼굴의 사내가 말했다.

“방탕. 탐식은 언제 오는 거지?”

“히끅. 기다려, 디블. 또 뭐 먹느라 늦나 보지. 꿀꺽꿀꺽…… 캬아. 너도 술이나 한잔해.”

“난 됐다.”

술잔을 비운 고주망태의 모습은 거지처럼 처참하다고 말할 정도로 엉망인 모습이었지만, 왠지 모를 음험함이 겉도는 자였다.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헤실헤실 웃고 있었는데, 술로 인한 취기 때문이었다.

디블이라 불린 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뒤로 의자에 기대었다.

긴 로브를 입고 후드까지 쓰고 있어 신체 부위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팔짱을 끼고 있는 손은 거무튀튀한 비늘과 날카로운 손톱이 있는 모습이었다.

콰앙……!

술을 들이켜는 소리만 가득했던 신전 깊은 곳에서 고풍스러운 문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오염된 음식물을 몸에 묻힌 조각 같은 나체의 남성이 부서진 문을 넘어 들어왔다. 파리와 같은 것들이 그의 몸 주변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 친구들. 세상에 허기 좀 달랜다는 게 이렇게 시간이 갈 줄은 몰랐네.”

디블이 낮고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냈다.

“크르르르…… 지금 수작 부리는 거냐, 헤페만. 내가 왜 너흴 불렀는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날 시험하는 거냐.”

헤페만은 아름다운 금발을 한 번 쓸어넘기고 말했다.

“워워, 진정하라고, 디블. 내가 위험을 무릅쓴 채 놈과 만나고 와서 이렇게 이야기해 주잖아. 그냥 말해 주기에는 오히려 내 쪽이 섭섭한데?”

디블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어서 말해. 아겔이 뭐라고 했지.”

분열의 사도, 디블 즈이어는 최근 자신이 점찍어 두었던 괜찮은 영혼 하나를 빼앗기는 경험을 했다.

정확하게 ‘자신’이라고 말하긴 뭐했지만, 이미 어둠의 사도인 그는 악마와 거의 동화되었다고 봐도 무방했기에 상관없는 표현이었다.

어쨌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영혼을 뺏고 빼앗는 일은 어둠의 사도들로서 자주 겪는 일이다. 서로에게 원한을 갖지도 않고. 그저 머리 잘 쓰는 놈이나 타이밍을 좋게 잡는 놈이 영혼을 채 갔기에.

그런데 지금은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영혼을 빼앗아 간 자가 바로 다름 아닌, 아겔라스토스였으니.

헤페만이 우아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이야기 좀 해 보실까. 아겔이 뭐라고 했느냐면…….”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한 기색을 보이자, 방탕과 분열의 사도는 몸을 가까이했다. 그의 말을 듣기 위해.

헤페만은 그 시선을 즐기는 듯 조금 느긋한 얼굴을 했다. 애가 타는 듯한 두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도 재밌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말해 주지 않을 순 없었다. 적어도 이들은 [지배자들의 원탁] 새끼들에 대항하는 유일한 동료들이었기에.

헤페만의 생기 넘치는 입술이 열렸다.

“아겔라스토스가 말했어. 다시 전쟁이라고.”

“전쟁?”

“그래. 사실 직접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말하진 않았지만, 느껴지는 뉘앙스가 그랬어. 마치 금방이라도 싹 다 죽여 버리려는 눈빛이었달까?”

세 사람의 눈이 반짝였다.

지금껏 자신들이 벌여 왔던 전쟁은 서로 간을 보기 위한 국지전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겔 정도 되는 자가 일으키는 전쟁은 지난 사도 전쟁보다 스케일이 클 것이 분명했다.

헤페만의 조각 같은 얼굴이 광기로 일그러졌다.

“혼돈께서 가라사대, 서두르지 않아도 심판의 날은 다가온다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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