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74)화 (175/186)

174화 허상을 꿰뚫는 빛

아겔은 카라이스만의 모함에서 고독에서 돌아온 후, 코르브스를 찾았다.

동력실에서 크록투스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코르브스는 한눈에 보기에도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주인님.”

“몸은 좀 괜찮으냐.”

로드먼에게 심장을 관통당했던 코르브스. 그때 그가 벌어 준 시간이 아니었다면, 고독은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힘을 회복하던 아겔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고.

“물론이죠. 이제 다시 싸울 수 있습니다.”

코르브스는 멀쩡해졌다는 걸 어필하려는지 날개를 들어 파닥거렸다. 지금은 작은 까마귀의 모습이라 왠지 귀여워 보였다.

아겔은 다 회복하지 않았음에도 걱정을 덜어 주려는 코르브스의 행동에 싱긋 미소를 지었다.

“사실 네게 부탁할 것이 있다.”

“부탁이요? 뭐든 말씀만 하시죠.”

녀석이 그리 좋아하지 않을 만한 일인데도 아겔은 말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줄리안에게 가 줘야겠다. 그들을 보호해 줘야 한다.”

“줄리안…… 멀리 떠나 있는 그 녀석들 말입니까?”

탐탁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코르브스였다. 아겔의 곁을 떠나기 싫었기 때문일 것이다.

“음행의 공좌가 아리스를 노린다. 네가 지켜 주거라.”

“악마가…… 흠. 확실히 위험하군요.”

명분이 있음에도 그리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 그러나 코르브스는 아겔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후…… 제가 곁에 없으면, 우리 늙은 주인님을 누가 챙겨 줄는지.”

“너 없어도 난 알아서 잘 살아왔다.”

“깍깍.”

까마귀 상태로 웃던 코르브스가 돌연 크록투스를 바라보았다.

“사제야.”

“예, 사형.”

언제부터 사형제가 되었는지, 둘은 오글거리는 말투로 잘도 대화했다.

“네가 주인님을 잘 보살펴 드려야 한다. 특히 식사 좀 잘 챙겨 드려라.”

“알겠습니다. 끼니마다 직접 챙기겠습니다.”

“이 사람은 아무거나 줘도 잘 먹으니까 걱정하진 말고. 내가 볼 때는 미각이란 게 없는 것 같다.”

“그렇군요. 신경 쓰겠습니다.”

“옳지.” 

“이놈들. 혼나고 싶으냐.”

세 사람은 한동안 옅은 웃음소리를 냈다.

코르브스가 이내 진지한 얼굴을 했다. 까마귀 얼굴이라 알아볼 수 있는 건 아겔뿐이었다.

“그럼, 동생들을 지켜 주러 가겠습니다.”

“들어줘서 고맙다. 나중에 또 부르마.”

“부디 무사 평안하십시오, 주인님.”

스으으윽.

작은 까마귀였던 코르브스가 이내 거대해졌다. 2미터가 넘는 크기의 까마귀 수인으로 변한 코르브스.

발밑으로 보라색 주술진이 생겨나고 거대한 날개가 한 번 펄럭였다.

주술진이 빛나는 것과 동시에 코르브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하늘하늘 떨어지는 깃털만이 그가 떠났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코르브스가 떠난 여운을 잠깐 누리던 아겔이 동력실을 나섰다.

“따라오게.”

“아, 예.”

크록투스는 헐레벌떡 아겔을 따라 동력실을 나왔다. 왠지 코르브스가 해야 할 일을 이제는 자신이 맡게 될 것 같다고 예감하면서.

.

.

.

.

.

세크레툼 행성과 같이 음행의 신전으로 이어지는 곳을, 일명 ‘신전 행성’이라 불렀다.

신전 행성 주변에는 전부 마물이 사는 행성들뿐이었다. 누군가 함부로 신전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외계에는 마물이 항상 들끓었기에 어떤 행성이 신전 행성인지 가늠하기 어렵긴 했지만, 자세히 보면 신전 행성 주변엔 마물이 좀 더 많은 편이었다.

아겔은 그중 근처에 있는 행성으로 크록투스를 데려왔다.

“아비 면회라도 가려면, 이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 줘야겠지. 안 그런가.”

“헉헉…….”

크록투스의 갑옷은 온통 피 칠갑이었다. 마물을 베고, 부수고, 찍고, 으스러뜨리면서 튄 핏물. 이제는 썩어 버릴 듯 고약한 냄새에 정신마저 혼미해지는 듯했다.

아겔이 크록투스를 이곳으로 데려와 시킨 일이라곤 마물들을 때려잡는 일뿐이었다.

기사단장인 크록투스의 본업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문제는 마물들이 너무 많이 몰려왔다는 것이었다.

옆에는 마물의 시체가 쌓여 거의 산을 이룰 지경이었다.

웃기는 건, 크록투스가 처리한 마물은 쌓여 있는 시체 산의 일부밖에 되지 않았고, 대부분 아겔이 처리했다는 점이었다.

초라하고 낡아빠진 죄수복을 입고 있는 노인은 손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마물들을 압사시키곤 했다.

근처의 땅이 전부 핏물에 절여졌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

크록투스가 지칠 때마다 잠시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손을 쓴 것뿐인데도 아겔이 해치우는 마물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

“헉헉…… 도, 도대체 언제까지 잡아야 합니까?”

“지금 불평하는 겐가?”

“아, 아닙니다. 혹시 배고프시진 않으신가 싶어서…….”

크록투스의 내면을 들여다 보니 힘든 건 맞지만, 진짜로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모든 마물의 토벌을 목표로 하는 기사단의 정신을 아직도 갖고 있으니 마물 잡는 일에 불평이 있을 수가 없다.

실상은 자기가 배고파서 하는 말이었다.

아겔은 미소를 감추고 말했다.

“사실 마물이나 잡으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라네. 한 군데만 더 들리고 식사를 하러 돌아가지.”

“예……? 어디 갈 곳이 있습니까?”

아겔은 대답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가 손을 휘두르자, 달려오고 있던 근처의 모든 마물이 마치 실 끊어진 인형처럼 픽 쓰러졌다.

시력이 좋은 크록투스였지만, 방금은 아겔이 도대체 무슨 술수를 부린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떨리는 발걸음으로 그의 뒤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아겔은 걷고 또 한참을 걸었다.

쉼이란 걸 모르는 사람 같았다. 기사이자 군인인 크록투스도 걷는 게 본업이긴 했지만, 아겔이 산책하듯 걷는 걸 쫓아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날아가는 것도 아니고, 뛰어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걸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크록투스의 전신이 말라 소금이 드러날 때쯤, 아겔이 걸음을 멈추었다.

앞쪽에 마을 하나가 있었다.

마을에선 가까이 접근하는 아겔과 크록투스를 발견했는지 이미 갖가지 무기를 든 전사들이 나와 있었다.

크록투스는 그들의 눈에서 두려움을 엿볼 수 있었다.

마을 전사들은 마물처럼 변해 가는 듯한 모습이었고, 그중엔 이미 마물이라 불러도 될 만한 자들도 있었다. 공통적으로 전부 사람이었다가 마물이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크록투스가 대검을 꺼냈다.

“저자들도 죽입니까?”

앞으로 뛰쳐나가려던 크록투스는 아겔의 대답을 듣고 급하게 제동해야 했다.

“고민이로군. 죽일까 말까?”

“어억… 예……?”

당연히 죽이라고 할 줄 알았던 크록투스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지금껏 아겔은 그를 데리고 다니면서 마물을 마주치면 무조건 죽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죽이지 말라니.

아겔이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저들은 전부 사람이었다가 마물이 된 자들일세. 인간에게 위협을 주는 존재이니 죽여야 할까.”

“다, 당연합니다. 그게 옳지 않습니까?”

“자의로 저렇게 된 게 아닌데도?”

아겔의 말에 크록투스의 목이 턱 막혔다.

마물이 된 것이 자의인지 타의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리고 만약 타의에 의해 마물이 되었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아겔이 질문을 이었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마물이 되었다면, 고통받는 저들을 죽여서 편하게 해 주어야 할까. 아니면 그대로 놔 둬야 할까.”

“…….”

크록투스가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아겔이 질책하는 듯 말했다.

“성좌를 모시는 기사단장이란 자가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배운 적이 없었다. 그저 마물이 된 인간은 모조리 사살하라는 명령밖에 없었기에.

교리로도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번 마물이 되어 타락한 자에 대한 글은 단 한 줄도 쓰여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아겔은 답을 제시해 주었다.

“빛은 어둠을 꿰뚫는 법이지.” 

주름진 손이 크록투스의 흉갑을 툭 밀었다. 그러자 어느새 크록투스의 가슴에서 뽑혀 나온 빛이 그의 손바닥에 있었다.

찬란한 빛은 천천히 검의 형상을 띄었다.

아겔은 포위하여 다가오던 전사의 가슴에 빛의 검을 찔러 넣었다.

“커헉……!”

마물 전사는 마치 마비당한 것처럼 몸을 멈추었다. 그다음, 크록투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정화되고 있었다.

마물이었던 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원래 모습대로.

전사는 다시 사람의 몸으로 돌아온 자신의 모습을 보고 몸을 덜덜 떨었다.

“어…… 어어… 이게 어떻게…….”

아겔은 빛의 검을 하늘로 던졌다. 곧 무수히 많은 아름다운 꽃잎이 하늘하늘 눈처럼 내려왔다.

-으아아악……!

-커헉……!

정화된 처음 전사와 달리 꽃잎이 몸에 닿은 마물 전사 중 몸이 타들어 가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악마의 유혹을 받아들인 자들. 악마를 섬기기를 거부한 자들과 다르게 그들은 심판을 받아 이 자리에서 죽었다.

크록투스는 꽃잎을 받아 손바닥에 쥐어 보았다.

분명 자신의 빛이다. 신성력 같은 게 아니었다. 오랜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아겔을 바라보았다.

“타락한 자들이 있다면, 다시 되돌리는 자도 필요하지. 이제는 자네가 그 임무를 맡아 주게.”

“제가……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돌아오려면, 닷새 정도는 걸릴 걸세. 그때까지 이 행성에 있는 모든 것을 정화하게.”

“…….”

아겔은 가부 여부를 말하지 않고 오직 시간만 고지했다.

크록투스는 검은 날개를 펴고 하늘로 솟구치는 아겔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무언가 결심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 * *

카라이스만의 모함.

기업가가 데리고 온 재단사는 벌벌 떨며 아겔의 몸 치수를 쟀다.

죄수복을 벗고 속옷만 입은 아겔의 몸은 깡마른 모습이었다. 거기에 재단사가 두려워할 만큼 엄청난 흉터들이 가득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의 몸에 흉터가 없이 말끔한 부분은 손바닥 크기도 되지 않았다.

“다, 다행히 치수가 예상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조금 수선만 하면 바로 편하게 입으실 수 있을 겁니다.”

재단사가 이마를 훔치곤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카라이스만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아겔은 팬티 바람으로 의자에 앉았다.

“마음에 드실 겁니다. 저리 겁이 많지만, 제가 아는 장인 중에 최고니까요. 옷의 품질, 사용하는 재료의 상태 등, 우주에서 저 친구와 비견할 만한 실력을 갖춘 이는 다섯이 안 될 겁니다.”

그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지만, 아겔은 별 관심이 없었다.

“옷을 가져오면 출발하지.”

“물론이지요. 그런데 그 기사단장 꼬맹이는 왜 버리고 오셨습니까? 슬슬 비싸지는 것 같던데, 필요 없으십니까?”

“버리고 온 게 아닐세. 빛을 연단시켜 주려고 한군데 던져 주고 왔네.”

“아쉽군요. 버리는 거라면 제가 가지려고 했는데.”

“주긴 아깝지. 혹여나 훔칠 생각 말게.”

“큭큭, 당신 물건을 훔칠 만큼 간이 크진 않습니다.”

이윽고 재단사가 옷을 가져왔다.

아겔은 재단사의 도움을 받아 정장을 입었고, 그 모습을 보는 카라이스만의 눈이 반짝였다.

최고의 옷이 걸맞은 자에게 돌아갔다.

아겔은 키가 큰 편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작은 편도 아니었다. 깡마른 몸이라 위압감을 주진 않았지만, 오히려 노인이 정장을 차려입으니 형용키 어려운 고고함이 물씬 흘러나왔다.

짝짝짝.

카라이스만이 손뼉을 쳤다.

“훌륭합니다. 이제야 사람을 보는 것 같군요. 마치 암중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는 뒷세계의 왕, 조직 보스, 코드네임 [노괴] 같은 느낌입니다.”

“개소리하지 말고 출발이나 하게.”

“예, 보스.”

카라이스만은 키득키득 웃으며 함장실로 물러갔다.

아겔은 밖을 내다보는 창을 통해 까만 우주를 바라보았다.

유리창에는 오랜만에 제대로 된 옷을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도 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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