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75)화 (176/186)

175화 무도회 (1)

아겔은 모함의 상석에 앉아 물을 홀짝였다.

우주의 숱한 유력가와 귀족이 모이는 무도회장. 친목의 장이자, 정보의 허브인 그곳은 외계 지역에 있어 그리 멀진 않았다.

그래도 고독을 떠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물만 들이켜는 아겔이었다.

그 옆에 앉아 독한 위스키를 맛보던 카라이스만이 아겔을 바라보았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그런 건 아닐세. 고독을 떠나는 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구먼.”

400년 정도를 보낸 곳이니, 아겔도 왠지 모를 애착이 가는 행성이었다. 일을 마치면 바로 돌아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대화가 제격이죠. 우리가 지금 가는 무도회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해 드릴까요?”

“해 보게.”

목을 가다듬은 카라이스만이 말했다.

“가면무도회.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런 콘셉트로 모이는 자리입니다. 사실 체형을 보면 누가 누군지 특정하기 어렵지 않습니다만, 어쨌건 중요한 정보가 오가는 자리라는 거죠. 우주에서 나름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고 다닐 수 있는 자들이 올 겁니다. 귀족들과 정부 관료들. 가끔 성좌 교단의 추기경들도 모습을 비추곤 하죠.”

추기경들이란 말에 아겔이 반응했다.

“추기경이 온다던가?”

“아니요, 이번엔 오지 않습니다.”

“아쉽군.”

아겔은 빈 물잔을 다시 집어 들었다. 뒤에서 대기 중이던 선원이 새로운 물컵을 가져다주었다.

“계속 말하자면, 대체로 이런 자리는 은하 정부의 외교부 장관이 소집합니다. 재력이나 권력을 기준으로 인원을 선정해 날짜와 시간, 장소를 기입한 초대장을 발송하죠. 대체로 하찮은 녀석들은 무도회 겉 부분만 맴돌 겁니다. 우리와 같은 ‘진짜’들은 따로 모이는 곳이 있죠.”

“그곳에서 정보를 교환한다 이 말이군.”

“그렇습니다. 정보는 곧 힘이니까요. 그곳에선 회의도, 토론도, 토의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정보 교환과 사업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대체로 사업은 정부 쪽에서 벌이고, 귀족들은 투자하는 형식이죠.”

아겔은 카라이스만의 설명을 듣고 그곳이 대충 어떤 곳인지 감을 잡았다.

“내가 유의해야 할 인물이 있나?”

은하 정부의 외교부 장관이 주최하는 자리라고 했으니, 장관을 포함한 주요 인사들도 나타날 것이 분명했다.

카라이스만이 한껏 미소를 짓고 말했다.

“그런 게 있을 리가요. 마음대로 하세요.”

“그럼 편하게 행동하도록 하지. 우선은 지켜보겠네.”

“좋은 타이밍이 있으면, 나서 주시면 됩니다. 아, 그리고.”

기업가는 탐욕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번 일로 제게도 뭔가 있었으면 참 좋겠는데 말이죠.”

“부스러기 떨어지는 게 그리 맛없진 않을 걸세.”

“감사합니다.”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카라이스만이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어 위스키를 홀짝였다.

아겔은 모함이 무도회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물을 마셨다.

.

.

.

무도회장이란 곳은 외계(外界) 지역 구석진 곳에 정박해 있는 거대한 함선이었다.

은하 정부의 별이 소용돌이치는 문양이 그려져 있는 함선. 거기에 벌려진 입에서 빠져나오는 칼 문양도 있었는데, 그것은 외교부의 상징이었다.

함선 자체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거의 소행성만 한 크기.

그런데 웃긴 것은 카라이스만의 모함도 그에 뒤지지 않는 크기라는 것이었다. 그의 재력과 힘이 어느 정도인지 여실히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함선의 크기는 곧 재력이니.

외교부 함선에 올라타기 전, 카라이스만이 말했다.

“복장 한번 점검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세심하게 아겔의 헤어스타일이나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었다.

흰 봉두난발 머리는 깔끔하게 상투를 틀어 올렸고, 눈이 보이지 않게 선글라스를 꼈다.

얼굴과 목 주변 흉터들은 전부 그대로 두었다. 그래야 만만한 느낌이 들지 않으니까.

아겔은 마치 카라이스만의 경호 집사 같은 분위기를 풍기게 되었는데, 옷만큼은 값을 따질 수 없는 명품이라 집사라기엔 아이러니한 모습이었다.

물론 지금은 카라이스만의 경호원 신분으로 입장하게 될 것이다.

경호원으로 참석하는 아겔은 상관없었지만, 카라이스만은 꼭 가면을 착용해야 했기에 얼굴에 거북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가 아겔에게 말했다.

“제 곁에 있으셔야 합니다. 따로 다니면, 눈길을 살 겁니다.”

“그러겠네.”

딱히 따로 다니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에 아겔은 카라이스만의 부탁을 승낙했다.

두 사람은 단거리 공간이동으로 외교부 함선에 올라탔다.

카라이스만은 초대장을 시큐리티 가드들에게 건네고 검사를 받았다. 그동안 아겔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별천지에 온 것 같은 함선 내부. 과연 무도회장은 맞는지, 수많은 사람이 잔을 하나씩 들고 돌아다니며 인사를 건네고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척 보아도 값비싼 옷과 장신구를 착용한 사람들. 물론 그중에도 이 자리에 오려고 꽤 무리한 사람이 몇몇 있기도 한 것 같았다.

음식은 한없이 호화로웠고, 한쪽 공연장에서 악단이 클래식 음악을 감미롭게 퍼뜨리고 있었다.

외교부가 주최하는 이 무도회는 확실히 최상위권 유력가들을 위한 자리였다.

아겔도 시큐리티 가드들에게 소지품 검사를 받았다.

가드들은 아겔의 흉터를 보고 흠칫했지만, 이내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통과시켜 주었다.

가드가 무전기를 잡고 말했다.

-기업가 님, 그리고 경호원 입장.

-확인.

이곳에서도 기업가라 불리는 카라이스만은 흥겨운 발걸음을 옮겼고, 아겔은 그 뒤를 따라갔다.

카라이스만이 등장하자, 무도회장은 잠깐 얼음물이 끼얹어진 것처럼 경직되었다.

남성들은 왠지 모를 경쟁심과 분노를 느끼는 듯했고, 여성들은 누가 먼저 다가갈지 서로 눈치를 보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중년 여성 귀족들이 카라이스만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시작했고, 아겔은 그 곁에 서서 가만히 서 있었다.

아겔은 누군가가 자신의 뒤로 은밀히 접근하는 것을 느끼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놈도 와 있을지는 몰랐는데, 말썽꾸러기를 만난 기분이 느껴졌다.

“헤페만. 자네도 와 있었나?”

“…….”

탐식의 사도, 헤페만 바이커스.

아겔을 놀라게 하려고 다가오던 헤페만이 살짝 멋쩍은 얼굴로 사과를 아삭 씹었다.

“역시 안 통하는군.”

그는 아겔처럼 경호원 신분으로 잠입한 것인지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가면이 없어서 조각 같은 얼굴과 윤기 나는 금발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귀족 여인들의 시선이 몰려들어서 아겔은 함께 있기가 거북했다.

시선이 몰리면 일이 틀어질 수도 있으니.

사과를 아삭거리며 헤페만이 질문했다.

“여긴 도대체 무슨 일이지, 아겔라스토스. 원래 이런 곳에 관심이 있었나? 전부 다 죽이러 온 건가?”

“경우에 따라 그래야 할지도 모르지.”

“경우에 따라……?”

사과를 씹고 있는 헤페만의 입이 멈추었다.

“나도 죽일 건가……?”

“사고 치지 않고 조용히 있으면 안 죽이겠네. 그나저나 자넨 어쩐 일인가. 아무리 자네라도 혼자 이런 곳에서 날뛰긴 어려울 텐데.”

“훗, 요즘 누가 적진에서 혼자 날뛰나, 촌스럽게. 나는 그냥 괜찮은 놈 골라서 내 신도로 만들 생각이다. 적은 죽이는 것보다 이용하는 게 더 좋지, 안 그런가?”

아삭.

헤페만은 무슨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사과를 씹었다.

역시 이놈도 어둠의 사도라 그런지 영혼을 취할 생각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명목상 그가 기업가를 모시고 있는 것처럼 위장한 귀족 여인도 탐식의 악마를 믿는 신도일 것이다.

아겔이 정정했다.

“정확히는 강제로 복종시키는 것이겠지.”

“정답인데, 듣기 거북해. 내 안의 양심 한 줌이 아프다는군.”

“헛소리할 거면 꺼지게.”

헤페만이 씩 웃었다. 

“최근에 음행 놈이 있는 신전 행성에 간 것 같던데 그래. 수확은 좀 있었나?”

노골적으로 정보를 요하는 질문이었지만, 아겔은 딱히 들려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음행의 사도는 직위를 박탈당했네.”

“뭐……?”

“음행의 공좌가 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연결선을 끊어 버리고 도망친 게지. 전 음행의 사도는 저 앞에 있는 기업가에게 선물로 주었네.”

“…….”

음행의 사도.

원수지간 비슷한 사이이긴 해도, 같은 어둠의 사도 중 한 명이 공좌에게 버림을 받고 이제는 귀족의 노리개가 되어 살아간다는 소식을 접하자, 헤페만의 얼굴이 썩어 들어가는 듯했다.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는 처지라는 걸 직감한 것이다.

헤페만이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우리 주인님은 안 잡아갔으면 좋겠군.”

“죽기 싫은가?”

그는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아겔은 잘 손질된 턱수염을 쓸었다.

“굴라는 날 도운 악마 2명 중 하나이니 죄를 묻진 않을 걸세.”

헤페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래. 100년 전 지랄에 끼어든 게 천만다행이었군. 그럼 분열과 방탕은?”

“스플릿, 스투프룸. 두 놈은 방관죄로 고독에 처박을 생각일세.”

“…….”

악마의 진명을 말하며 감옥살이를 시키겠다는 아겔의 선언에 헤페만은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은 죽고 없는 분노의 사도의 말을 따라 원탁의 음모를 방해했던 과거의 자신에게 진정으로 감사하는 지금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전에도 살아남았지 않은가. 그 아겔을 만나고도.

헤페만은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사도들에게 애도를 표해야겠군.”

“그건 나중에 해도 될 걸세. 하여튼 이만 가 보게. 시선이 따갑구먼.”

“큭큭, 괴롭혀서 미안하다. 하는 일, 잘되었으면 좋겠군.”

헤페만이 모시는 귀족 여인을 에스코트하여 다른 곳으로 떠났다.

카라이스만은 등장부터 무도회장을 싸늘하게 만들었던 것과 달리 생각보다 인기가 많은지 많은 사람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아겔은 조용히 그를 따라다니며, 이곳에 악마와 거래한 자들이 있는지 확인했다.

‘생각보다 적군.’

귀족이나 정부의 고위 관료 중 악마와 거래한 자들은 거의 드물었다. 거의 1천 명에 가까운 사람이 무도회장에 몰려 있는데도 말이다.

적어도 지금 여기서 음행의 공좌에게 영혼을 바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역시 더 들어가 봐야 알겠구먼.’

카라이스만은 ‘진짜’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그들을 굴복시키고 이득을 취하는 것만 바라고 있겠지만, 아겔이 원하는 건 그것에서 더 나아간 것이었다.

그곳에 음행의 공좌와 거래한 자가 있다면 죽일 생각이다.

유력한 자 중에 악마에게 영혼을 바친 자가 있다면, 악마의 일을 손쉽게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음행의 공좌가 부리는 쓸 만한 도구들은 전부 제거할 생각이었다.

단 하나도 빠짐없이.

차를 2번 마실 시간이 지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려한 카펫 위로 누군가 많은 경호원과 함께 무도회장을 가로질렀다.

튼튼하고 푸짐한 풍채에, 노년에 다가가는 데도 밝은 얼굴을 한 남자. 그가 무도회장 중앙에 서자, 사회자 같은 사람이 외쳤다.

-외교부 장관, 군터 마우라간 님이십니다. 모두 박수 부탁드립니다.

짝짝짝짝-!

이 무도회의 주최자. 귀족들이 그를 보고 박수했다.

장관은 해맑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말하기 전에 쭉 무도회장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는데, 아겔의 눈과도 한순간 마주쳤다.

선글라스 너머 장관을 바라보는 아겔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어진 적막에 군터가 입을 열었고, 마이크를 통해 그의 목소리가 회장을 물렸다.

[모여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바입니다. 이곳에서 마음껏 누리시고 이 우주를 더욱 활성화하는데 한몫해 주신다면, 이 자리는 그 의미를 다한 게 될 겁니다. 모쪼록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짧게 말하고 끝낸 장관은 바로 누군가의 안내와 함께 무도회장을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진짜’들이 모이는 곳으로 먼저 향한 듯했다.

아겔은 군터를 보고 흡족한 얼굴을 했다.

‘놈이었군.’

이곳에 있는 모두를 속였을지라도 아겔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악마와 거래한 자. 그것도 음행의 공좌와 한 거래다.

그저 쾌락에 붙들린 게 아니라 영혼을 갖다 바쳤다.

아마 개인적으로도 소장쯤 되는 무력을 지닌 듯했는데, 악마에게서 얻은 힘일 것이다.

‘놈을 잡아야겠군.’

마침 카라이스만에게 누군가 다가오는 게 보였고, 이야기를 마친 듯한 카라이스만이 아겔에게 다가왔다.

“가시죠. 모여 있답니다.”

“그래.”

아겔이 카라이스만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카라이스만이 슬쩍 물었다.

“좀 보셨습니까?”

아겔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잘 보여서 탈이더군. 이제 잡으러 가기만 하면 된다네.”

카라이스만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참 기대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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