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76)화 (177/186)

176화 무도회 (2)

정부 외교부 장관, 군터 마우라간.

노년에 다가서는 나이인데도, 몸통 자체가 두껍고 튼튼한 그는 입고 있는 정장이 터질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외교부 차관을 비롯해 꽤 많은 보좌진을 준비했다. 원래 이리 많은 보좌진이 함께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에 귀족들은 의아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들이 꼭 필요했다.

차관이 군터에게 다가왔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장관님.”

“그래. 유력 귀족들은 다 모였나?”

겉으로 드러나는 무도회에 가려진 진짜들의 모임.

일명 ‘귀족 회의’라 불리는 이 모임 때는 대략 50명의 귀족이 자리하게 된다.

이 넓은 우주에서 겨우 50명만 모이는 자리. 그런 만큼 이 자리에 모이는 귀족들은 우주에서도 내로라할 영향력을 갖춘 자들이었다.

귀족 중 몇몇은 정부의 승인을 얻고 독자적인 영역에서 군사 활동을 벌이고 있을 정도. 정부가 이 넓은 우주를 모두 통제할 수 없었기에 양보해 준 권리였다.

차관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가 말했다.

“그…… 기업가는 무도회장에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여느 때처럼 늦장을 부릴 생각인 것 같습니다.”

기업가. 그는 우주에 존재하는 귀족 중에서도 단연 최고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사내였다. 그가 가진 영역이 제일 넓었고, 그의 교역, 재산 규모는 정부조차 전부 파악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예사 그래왔던 것처럼 매번 귀족 회의에 늦게 참여했다. 문제는 이번 귀족 회의는 평소와는 달리 특별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카라이스만. 주인공을 자처하는 성정이지. 그래도 회의에 불참할 자는 아니니. 거사만 확실하게 치르면 된다. 그를 예의주시해라.”

“예, 알겠습니다. 그럼 기업가가 회의장에 들어서기 전에 언질을 드리겠습니다.”

“그래.”

차관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자, 대기실에는 군터 혼자만 남았다.

그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목을 조르는 넥타이를 더욱 꽉 조였다.

이번 무도회 일정은 장관인 그가 독단적으로 개최한 일이었다. 정부의 명이 아닌 개인적인 명령.

그만큼 지금은 상황이 급박했고, 군터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군터는 회의장에 들어가기 전, 전신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돌연 그의 몸이 찌르르 울렸다. 얕은 쾌감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오직 악마만이 줄 수 있는 쾌감.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한 그 욕망의 자취가 그의 육체를 울리고 있었다. 왠지 자신의 옆에 선 검은 무언가의 손길이 가슴에 닿는 듯했다.

문득 군터는 카라이스만의 얼굴을 떠올렸다.

시건방진 노괴.

나이 먹고 지식 좀 쌓았다고, 세상 모든 일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착각을 하는 놈.

“네놈에게도 진정한 쾌락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싶구나.”

준비를 마친 군터는 보좌관 몇 명과 함께 회의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카라이스만은 회의가 시작되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음에도 아겔을 데리고 무도회장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무도회장 곳곳에 아겔을 데리고 다니며 떨거지 귀족들에게 말 한마디 걸 수 있는 하해와 같은 은혜를 풀고 있었다.

평소라면 대귀족 카라이스만 근처로 감히 다가올 수도 없던 자들이 수도 없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카라이스만이 허락해 주었기 때문.

아겔은 시끄럽게 둘러싼 귀족들 사이에서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카라이스만은 아겔이 자신을 보좌하는 경호원 신분으로 있는 터라,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래서 회의장으로 향하지 않고 무도회장에 머무는 것 같았다.

물론 과시욕보다도 실리를 중시하는 자이니, 회의에 늦게 참여하는 이유가 있긴 할 것이다.

카라이스만이 술잔을 들고 아겔의 어깨동무를 했다.

“하하, 이 무도회장에서 떠나고 싶지가 않군요. 이처럼 좋은 경호원과 있으니 말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합니다.”

“…….”

주변에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아겔에게 꽂혔다.

늙었지만, 쫙 빼입은 최고급 정장과 멋들어진 선글라스를 착용한 경호원에 대한 질문이 쇄도했다.

꽤 늙어 보이는 데도 대귀족 카라이스만의 경호를 맡을 정도이니, 그 실력이 하수가 아니란 것을 귀족들은 눈치채고 있었다.

아겔의 늙은 겉모습이 베테랑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도 없진 않았다.

카라이스만이 귀족들에게 손을 들었다.

“워워, 진정하세요, 제 경호원이 낯을 좀 가려서 말입니다. 경호원 신상은 비밀이니 많은 것을 대답해드릴 순 없지만…….”

카라이스만은 턱을 쓰다듬으며 씩 웃었다.

“아마 제가 최근 얻은 것 중에 가장 값어치가 비싼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말에 귀족 중 대다수는 축하의 말을 건넸고, 몇몇은 놀란 얼굴을 했다.

좋은 경호원을 두는 일, 특히 강한 자를 고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기업가란 대귀족이 최근 얻은 것 중 가장 비싼 것이라고 말했으니, 귀족들의 시선에 아겔의 가치는 더더욱 높아져만 갔다.

참다못한 아겔이 속삭였다.

“회의에는 언제 가는 겐가.”

슬며시 미소를 지은 카라이스만이 속삭였다.

“지금은 가 봤자, 쓸데없는 이야기밖에 하지 않을 겁니다.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모인 귀족들이 돌아가면서 각자 정보를 발표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이른바 ‘정보 경매’죠. 그때 가면 됩니다.”

“정보 경매라.”

50인의 귀족이 모인 자리.

모인 귀족들은 한 명씩 자신이 가져온 100% 확실한 ‘정보’를 발표한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귀족 자신의 명성을 걸고 발표하는 것이니, 이름에 누가 되지 않으려면 괜찮은 내용을 가져와야 했다.

그리고 응찰자는 단 한 명. 바로 외교부 장관이었다.

나머지 귀족들은 공짜로 정보를 듣게 되고, 장관은 발표된 정보의 값어치를 판단해서 그 자리에서 알맞은 값을 지불하는 것.

그야말로 귀족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리였다. 물론 돈을 많이 쓰긴 해도 외교부 또한 손해 보는 일이 아니었고.

이젠 막대한 돈을 시간 가치로 굴리는 것보다 정보를 통해 가치를 확보하는 것이 더 효익이 큰 시대가 되었다.

외교부에서 무도회를 주최하는 이유였다.

카라이스만이 다시 속삭였다.

“그때가 하이라이트입니다. 저도 기대되는 시간이죠. 그전까지 현실성 없는 지질한 사업 이야기만 하니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겔은 카라이스만의 말을 이해했다.

“알겠네. 그러니까 사람들 좀 치우지. 북적거리면 귀찮다네.”

“후후, 그러죠. 아쉽긴 하지만 당신 말이라면 들어야죠.”

카라이스만이 손을 휘휘 젓자, 귀족들이 정중하게 예를 표하고 물러섰다.

대귀족의 축객령에 반발할 사람은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그럴 수 있을 만한 자들은 전부 회의실로 몰려갔으니.

아겔을 곁에 두고 한참 술잔을 비우던 카라이스만은 빈 잔 수십 개를 만들고 나서야 가자고 말했다.

“이쯤이면 될 겁니다. 가시죠.”

아겔은 카라이스만 곁에 바짝 붙어서 회의실이란 곳으로 향했다.

무도회장에서 나와 함선 구역을 지나던 카라이스만은 한쪽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선원들이 카라이스만과 아겔의 얼굴을 확인하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기업가님, 그리고 경호원.”

아겔은 그들이 비키자 눈앞에 보이는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끝에는 고급스러운 문양의 문이 있었고, 카라이스만이 문을 열자 내부가 드러났다.

오페라 극장같이 넓고 살짝 어두운 내부. 수백 명이 앉아도 될 법한 좌석에 귀족들이 띄엄띄엄 앉아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우주에서 대귀족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자들.

그들은 본인이 데려온 경호원을 한 명씩 곁에 두고 있었다. 2명 이상은 데려오지 못하는 것 같았기에, 곁에 선 경호원들의 기도는 평범한 느낌이 아니었다.

아겔과 카라이스만의 등장에 귀족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되었고, 단상에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던 귀족도 입을 다물었다.

카라이스만이 새침하게 말했다.

“뭘 그리 쳐다봅니까. 입 냄새 풍기기. 마저 하세요.”

늦었음에도 뻔뻔하게 고개를 까닥인 카라이스만이 아겔과 함께 앉을 만한 좌석을 찾았다.

카라이스만이 늦는 건 예삿일인지, 귀족 중 태클을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자들이 몇 명 있을 뿐.

애초에 카라이스만에게 지각에 대해 논할 수 있을 만한 귀족은 거의 없는 듯했다. 대귀족 중에서도 그는 특출난 편이었으니.

어두운 내부에서 유일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리인 단상. 카라이스만 옆자리에 앉은 아겔은 단상에 서 있는 귀족을 바라보았다.

이미 정보 경매는 시작된 모양이었다.

단상에 올라서는 귀족마다 짧게 정보를 이야기하고 내려갔다.

-에너트류스 행성의 한 광산에서 고대 악마의 경전이 발견되었습니다.

-빛의 사도 중 2명이 행방불명 상태가 되었습니다.

정보를 이야기할 때마다, 사회자처럼 옆에 서 있던 외교부 장관 군터가 값어치를 말했다.

“백금화 73개, 백금화 15개“

정보를 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귀족들이 손을 들어 질문하기도 했다.

-빛의 사도 2명이 행방불명이 된 것. 정보의 출처가 어떻게 됩니까?

-교단 추기경과 라인 하나가 있습니다.

-그렇군. 이해했소.

그렇게 출처를 납득시킬 수 있으면, 자신의 차례는 끝난 것이었다.

또 하나의 귀족 한 명이 단상으로 올라갔다. 가히 화려한 복장을 한 귀족. 그는 단상에 오르기도 전에 계속 카라이스만을 힐끗거리는 남자였다.

화려한 옷 귀족은 단상에 올라서고 나서도 카라이스만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카라이스만령의 항성 라비스가 소멸했습니다.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항성 라비스의 소멸.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귀족들의 시선이 날아왔으나, 카라이스만은 씩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고독이 정부와 교단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건 모든 귀족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최악의 감옥이 있는 소재지 주인이 카라이스만이니, 지금 귀족의 발언은 그 책임을 어떻게 물을 것이냐는 질문에 가까웠다.

군터는 짤막하게 값어치를 매겼다.

“금화 30개.”

앞서 받았던 값보다 훨씬 적은 가치였다.

그러나 귀족은 미련 없다는 듯 단상에서 내려갔고, 다른 귀족이 올라가지 않자 카라이스만은 주변을 살펴보다가 말했다.

“끝입니까? 또 단상에 오르실 분 없어요?”

군터가 말했다.

“그대가 마지막이오, 카라이스만. 어서 시작하시오. 이 회의도 마무리 지어야 하니.”

벌떡 일어난 카라이스만이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좌석에서 내려와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귀족들이 앉아 있는 좌석을 올려다보아야 하는 단상.

회의가 있을 때마다 꽤 파격적인 정보를 내놓아서 그런지, 귀족들의 시선이 카라이스만에게 강렬히 내리꽂히고 있었다.

“크흠.”

한 번 목을 가다듬자, 귀족들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옅게 미소를 지었던 카라이스만이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크흠…… 크흠흠. 크흠흠흠!”

“…….”

카라이스만은 몇 번이고 목을 가다듬었다. 마치 장난치는 것처럼.

그 장난을 말릴 만한 자는 군터밖에 없었기에 귀족들의 시선이 장관에게 쏠렸다.

군터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장난치지 말고 어서 하시오, 카라이스만. 기다리고 있잖소.”

“아, 미안합니다. 굉장한 정보라서 이걸 말해야 할지 말지 고민이 돼서 말입니다.”

카라이스만이 귀족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잘 들으세요. 내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정보를 여러분에게 드리도록 하죠. 장난 아닙니다.”

얼굴이 썩었던 귀족들의 눈이 다시 궁금증으로 물들었다. 그가 공언하는 것이니 거짓말은 아닐 테니까.

미소를 지은 카라이스만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오페라 극장에 울렸다.

“내 경호원은 신이다. 그러니까 난 무적이다.”

침묵.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말에 귀족들은 대부분 얼이 나간 얼굴이었고, 누군가는 입을 벌리고 있었다.

설마 기업가 카라이스만이 저런 말을 할 줄이야-라는 표정이었다. 귀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얼굴을 붉히는 자도 있었다.

한숨을 내쉰 아겔이 좌석에서 일어나 단상을 향했다.

그러자 보좌진들이 아겔의 접근을 막았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그들도 음행의 공좌 신도였기에 아겔은 티 나지 않게 어둠의 힘으로 뇌에 구멍을 뚫어 준 후, 다시 단상으로 걸어갔다.

보좌진들이 픽픽 쓰러지는 모습에 군터가 움찔했지만, 당장 움직이지는 않았다.

카라이스만은 아겔이 단상에 올라오자, 그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 띠었다.

아겔이 책망하듯이 말했다.

“쓸데없는 말을 하는구먼.”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죠.”

“난 신이 아닐세.”

“뭐, 그렇다고 칩시다. 신보다 대단한 악마시여.”

조용히 아겔과 다투다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 주는 카라이스만의 모습에 귀족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마이크에서 늙은 목소리가 극장을 울렸다.

“한마디만 하겠네. 정보 경매라니, 참 우스운 짓거리를 하는구먼. 그래도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법. 나도 정보 하나를 이야기해 주지.”

아겔의 눈이 사회자 자리에 있는 군터에게 향했다.

“여기에 악마의 하수인이 있다.”

장관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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