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무도회 (3)
카라이스만이 아겔을 신이라고 발표한 것보다 이 극장에 악마의 하수인이 있다는 말이 더욱 큰 파급력을 불러왔다.
귀족들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전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자신의 주인을 지키기 위해 힘을 끌어 올렸다.
아겔이 대놓고 군터를 보고 있었기에 귀족들과 경호원들의 시선도 군터를 향했다.
일순간 군터의 얼굴에 보였던 당혹감은 순식간에 무표정 아래로 사라졌고, 정적이 흘렀다.
귀족 중 하나가 그 정적을 조심스레 지워 냈다.
-이곳에 악마의 하수인이 있다는 건 확실한 정보인가?
그 말엔 카라이스만이 답했다.
“100% 장담합니다. 이 자리엔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들이 있고, 지금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넓은 오페라 극장에 그의 목소리가 울릴 정도로 고요했다.
귀족 중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 난 나가 보겠소. 알아서 해결하시오.
-악마라니…… 난 그런 것들과 엮이고 싶지 않아.
소란스러운 상황에 군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모두 진정하시고 착석해 주시죠. 아직 귀족 회의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악마의 하수인이 있다는 데, 여기서 더 끌 것 있소?
-그 하수인들을 색출해 내지 않으면, 귀족 회의는 존속할 수 없을 것 같군.
-서로 의심만 하느니 이대로 갈라지는 게 현명한 판단일 거요.
귀족들이 반발해 오자, 턱에 힘이 들어간 군터의 입이 열렸다.
“다시 말하지 않겠습니다. 앉으십시오.”
-…….
위압감이 담긴 목소리에 귀족들이 덜컥 겁을 먹었다.
몇몇은 불쾌하다는 시선으로 군터를 바라보았고, 경호원들은 언제라도 일어날 돌발 상황에 대처하려 했다.
군터의 시선이 단상에 서 있는 아겔에게 향했다.
“정보의 출처를 묻고 싶군. 이 귀족 회의에 악마의 하수인이 있다는 정보는 어디서 어떻게 얻은 것이지.”
아겔은 즉답했다.
“내 눈으로 봤다.”
“…….”
주름진 손이 군터를 포함한 오페라 극장 곳곳을 가리켰다.
“너. 그리고 저기에 있는 것들.”
귀족들의 눈이 아겔의 손가락 방향을 따라갔다.
군터를 지목한 것까진 이해했으나, 그가 가리키는 극장 곳곳에는 아무것도 없었기에 의아하기만 했다.
-저기에 뭐가 있다는 말이지?
귀족의 물음에 아겔은 확인시켜 주었다.
팔을 든 아겔은 그대로 무언가를 잡듯이 주먹을 쥐었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극장의 어둠 속에 숨어 있었던 외교부 보좌진들이 전부 끌려 나왔다.
“커헉……!”
-……!
목을 붙잡은 보좌진들은 숨어 있던 자신들을 강제로 끌어낸 아겔을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귀족의 경호원들조차 그들의 기척을 느끼지 못해 당황한 기색을 했다.
귀족 한 명이 물었다.
-군터! 보좌진들을 왜 숨겨 놓은 것이오!
원칙대로라면 귀족 회의에는 참여할 수 있는 인원이 정해져 있다. 군터의 보좌진은 그에 포함되지 않았다.
군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대기시켜 놓은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게 내가 악마의 하수인이라는 증거가 됩니까?”
“증거를 원한다 이 말인가. 그럼 보여 주지.”
아겔이 손에서 빛을 뿜어냈다. 크록투스에게 잠깐 빌렸던 빛. 그 남은 것을 여기서 사용해야 할 듯했다.
주름진 손 위에서 일렁이던 빛 덩어리는 이내 보좌진들이 서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치이이이익! 끄아아아악……!
끌려 나왔던 보좌진들의 몸이 불에 타오르며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모습에서 바로 마물의 모습으로.
외형이 뒤틀리고 몸 구석구석에서 고름이 쏟아져 나오며, 입이었던 부분에선 타액이 질질 흐르는 괴물들. 빛의 불꽃이 사라지자, 완연한 마물들의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하나라도 같은 모습이 없는 마물들이 된 그들은 아직도 빛의 여파에 고통스러워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카라이스만이 마물들을 향해 손을 들었다.
“자, 보시죠! 이것만큼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죠?!”
귀족들은 경악하여 군터를 힐난했다.
-마물들……! 군터! 당신 제정신이오!
-이런 식이었군…… 언제나 우리 목숨을 노리고 있었어!
-다,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해!
귀족들이 혼란에 빠지고 군터의 눈이 충혈되었다. 그는 아겔을 노려보았다.
귀족 회의를 마치는 대로 귀족들을 습격해 그들을 세뇌할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카라이스만의 경호원이라는 저 늙은이가 모든 것을 망쳐 놓았다.
까득 이가 갈려 나간다.
수십 년을 준비했다.
귀족 회의란 것을 만들었을 때부터.
우주의 내로라하는 영향력을 갖춘 귀족들을 정부의 손아귀에 두기 위하여. 의심 많은 대귀족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그간 얼마나 노력해 왔던가.
그간 쌓아 온 노력이 한순간에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그렇다면 이판사판이었다.
아겔을 노려보던 군터가 입가에 비열한 웃음을 머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이미 늦었다. 이곳에 온 이상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텅.
오페라 극장의 단상을 비추던 불이 꺼졌다.
암흑 속으로 빠져든 극장. 이윽고 극장 사방에서 배우들이 나타나는 듯했다.
몸의 중요 부위가 비칠 듯 말 듯한 노출이 극심한 옷을 입고 나타나는 남녀 배우들. 모두 가면을 쓰고 있었다.
마치 오페라 공연이 시작된 것처럼 노랫소리가 들려와 귀족들이 소리 지르는 소리는 묻혀 버렸다.
아겔은 이윽고 자신이 다시 무도회장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까와 전혀 다름이 없는 외교부 함선의 무도회장. 가면을 쓴 귀족들은 이전과 똑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아무런 위화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함선 전체를 환영 마법으로 덮었다고 보는 게 맞겠군.’
타오르는 연기를 들이쉬는 것처럼 마기가 지독했다.
아겔은 곧장 주변을 살폈다.
귀족들 사이로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까 본 무대의 배우들. 그들은 기절한 귀족들을 은밀하고 빠르게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었다.
곁에 있던 경호원들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아마 환영 마법이 시작되자마자, 살해당한 듯했다.
‘귀족들을 세뇌하려는군.’
군터는 귀족들을 환상 속에 가둬 제멋대로 조종하려는 것이었다.
아마 이 일이 성공한다면, 우주에서 파급력 있는 귀족들의 군세가 전부 줄리안 일행을 쫓게 될 것이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탓……!
아겔은 귀족들 사이를 박차고 뛰었다.
그가 뛰어가는 데도 관심을 주는 귀족은 없었다. 이곳은 환영 속이었으니까.
끌려가는 카라이스만을 찾은 아겔은 그를 붙잡은 배우들을 단칼에 베어 죽였다.
촤악!
목이 떨어지자, 연기처럼 사라지는 배우들. 카라이스만의 호흡을 확인한 아겔은 등에 그를 업었다.
우선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뛰어가던 아겔은 뒤에서 느껴지는 섬찟함에 바닥을 굴렀다.
사아아악…….
마치 칼로 종이를 베는 듯한 소리.
그 소리가 아겔 주변에 서 있던 귀족들의 머리와 몸을 일직선으로 잘라 내었다.
깔끔하게 분리된 귀족들의 육체와 피가 바닥에 철퍽철퍽 떨어졌다.
그런데도 귀족들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잔을 부딪쳤다. 머리가 없는 귀족도 건배하듯 잔을 든 손을 높이 올렸다.
아겔은 뒤에서 공격한 자를 바라보았다.
극장에서 보았던 군터가 검을 들고 서 있었다.
[너는 교단 쪽 사람이 아니구나.]
아겔은 카라이스만을 테이블에 눕히고 군터를 바라보았다.
“용케도 알았구먼. 내가 신성력을 사용했는데, 어떻게 알았는가?”
[웃기는 소리. 그건 신성력이 아니었다.]
아겔이 보좌진의 정체를 드러낼 때 쓴 그 빛이 성좌가 주는 힘이 아니란 걸 군터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군터가 검을 들어 아겔을 겨누었다.
[넌 누구냐. 누구기에 카라이스만과 함께 이곳에 침투한 거지.]
“누구긴. 같잖은 악마가 하는 짓을 방해하려는 사람이지. 최근에 악마가 시킨 일 때문에 짜증이 치밀어오른 것 같구먼, 안 그런가?”
[…….]
군터가 한순간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악마가 내린 지시. 소녀 한 명을 찾아 외계를 뒤지라는 내용은 군터로서는 당혹스러운 임무였다.
망망대해 같은 외계를 어떻게 뒤져 여자아이 하나를 찾으란 말인가.
외교부 장관인 자신의 권세를 전부 사용해도 무리였다. 그렇기에 이번에 귀족 회의를 집어삼켜 그들의 힘을 쓰려 했던 것이다.
[그렇군. 네가 바로 아겔라스토스인가.]
외교부 장관인 군터는 아겔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카라이스만이 아겔의 정체를 철저히 숨겼지만, 교단과 정보를 공유하는 정부 인사라 그런지 최근 일어난 일은 아는 모양이었다.
거기에 정부 고위 인사인 그가 사도 전쟁 때의 일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때 살아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반갑네. 자네 이름은?”
[군터 마우라간. 외교부 장관이다.]
여러 종족이 연합되어 있는 ‘은하 정부’의 수뇌부 중 하나.
정부에 외교부라는 부서가 존재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 드넓은 우주의 영역을 다스리는 귀족들을 상대하기 위해.
아겔이 말했다.
“카라이스만이 계약 사항을 어겼는데도 처벌하지 않더군.”
고독은 카라이스만의 소유이긴 했지만, 정부와 교단의 승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두 거대 세력의 승인이 아니었더라면, 흉악범들을 집어넣는 교도소는 애초부터 만드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다.
군터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오늘 잡으려 했지. 그런데 그걸 네가 방해하는구나.]
“딱 알맞은 타이밍에 왔구먼. 나도 자네 같은 자들을 잡으러 왔는데.”
[……노괴. 쉽게 잡혀 주리라 생각하느냐.]
군터가 주먹을 쥐며 말했다.
[사도 전쟁 때, 한번 패퇴했던 네가 다시 전세를 역전할 수는 없을 거다.]
쾅!
군터가 달려들었다. 그가 뛰면서 부딪치는 귀족들은 전부 온몸이 으스러지며 나가떨어졌다.
수많은 귀족이 죽어 가는 데도 다른 귀족들은 마네킹처럼 그 장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환상 속이었으니까.
아겔은 군터를 향해 마주 뛰었다.
검과 벌레 단검이 교차하고 아겔의 팔이 잘려 나갔다.
군터는 승리를 확신하고 뒤를 돌아 대차 검을 휘둘렀다. 아겔의 남은 팔마저 잘려 나갔다.
노인의 목을 두꺼운 손으로 잡아 끌어 올린 군터가 자신의 눈높이에서 아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악마가 준 힘이다. 100년 전에도 패배했던 보잘것없는 네가 결코 넘어설 수 없는 힘.]
한 손으로 든 검으로 아겔의 심장 깊숙이 찔러 넣는 군터. 마치 부드러운 버터를 찌르는 듯이 아겔의 심장을 찌르고 들어갔다.
환상 마법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라지만, 이곳에서 죽으면 현실에서도 죽는다.
그러나 아겔은 고통스러운 기색 한 자락조차 비치지 않았다.
아겔이 쓰고 있던 선글라스가 툭 하고 떨어졌다.
“검은… 눈……?”
노인의 눈은 흰자위가 없는 검은색이었다. 군터는 그의 눈을 보고 잠깐 흔들렸다.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같이 아찔해서. 조금만 더 바라보면 빠져들 것만 같았다.
아겔이 입을 열었다.
“정신이 좀 드는가?”
“……?”
군터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아겔의 심장을 관통하고 있어야 할 검은 자신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있는 군터는 아겔과 눈높이가 딱 맞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귀족들이 경악한 얼굴로 그 장면을 보고 있었고, 환영 마법으로 전부 살해했다고 생각했던 경호원들도 모조리 멀쩡히 살아 있었다.
“쿨럭…! 이게 어떻게…….”
심지어는 마물의 육체를 가지게 된 자신의 몸이 회복되지도 않았다. 핏기가 점점 사라지는 군터의 얼굴.
귓가에 아겔이 얼굴을 가까이해 속삭였다.
“악마에게 받은 힘이 자랑스러운가?”
촤악!
아겔이 군터의 검을 뽑자, 심장에서 용솟음치듯이 검은 피가 튀었다.
“그 악마들에게 힘을 준 게 바로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