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무도회 (4)
군터는 자신의 생명이 다해 가는 것을 느꼈다.
음행의 공좌에게 영혼을 바치고 나서 죽음이란 것과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마물이 된 그의 몸으로도 심장이 뚫린 상처가 회복되지 않았다.
‘어, 어째서……!’
머리만 터지지 않는다면, 그 어떤 부위라도 회복시킬 수 있을 텐데.
가슴에선 피만 주룩주룩 흘러나왔다.
아겔이 군터의 검을 바닥에 팽개치며 말했다.
“마음대로 회복되지 않을 걸세.”
그를 마무리하기 위해 아겔이 다시 손을 뻗었다.
군터는 힘겹게 뒷걸음질 치며 팔을 휘둘렀다.
“내, 가 누군지…… 아, 느냐… 외, 교부 장관…… 군터 마우라간…! 이다……!”
그의 늙은 얼굴이 변형되기 시작하더니, 이내 사람의 형태를 벗어났다. 점점 몸이 불어나 무대의 반을 채울 정도로 커지는 군터의 육체.
죽기 전, 마물의 모습으로 돌아가 발악하려는 모양이었다.
아겔은 마물이 된 군터에게 쇄도하는 공격을 느끼고 뒤로 물러났다.
-제압해!
-외교부 장관이 마물이었다!
환상에서 벗어난 귀족들의 경호원들이 드디어 움직였다. 그들은 귀족들의 명령에 따라 군터를 제압하기 위해 극장 곳곳으로 뛰쳐나갔다.
남아 있던 보좌진이 극장 내부로 진입하고, 군터가 변한 모습을 본 외교부 차관도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제기랄…… 귀족들을 모조리 체포해-!”
-누가 누굴 체포한다는 거야! 이 마물들아!
오페라 극장은 마물이 된 외교부 인원들과 귀족들의 경호원들이 부딪치며 난장판이 되어 갔다.
거대해진 군터가 휘두르는 팔 아래에 카라이스만이 있었다.
아겔은 쏜살같이 움직여 카라이스만의 허리를 잡아채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콰앙-!
무대가 박살 나며, 고급스러운 나무 바닥이 박살 났다.
아겔은 극장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에 카라이스만을 내려 주었다.
기업가는 싸움에 특화된 인물이 아니었기에 보호가 필요했다. 아직 정산을 못 했는데,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카라이스만도 아겔이 자신을 보호해 준다는 걸 아는지, 방금 죽을 뻔한 위기였는데도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감사합니다, 아겔. 역시 당신은 믿을 만하군요.”
“…….”
아겔은 난장판이 되어 가는 오페라 극장을 둘러보았다.
카라이스만이 슬쩍 다가와 말했다.
“아겔, 잊지 않았겠죠?”
아겔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더 개판이 되기 전에 움직여야겠구먼. 전부 가져다주면 되는 겐가?”
손을 싹싹 비비는 카라이스만의 입꼬리가 죽 올라갔다.
“경호원들은 필요 없습니다. 귀족들만 남겨 주시죠.”
“알겠네.”
카라이스만을 두고 아겔이 극장 무대를 향해 뛰었다.
귀족들의 경호원들은 생각보다 고전하고 있었다.
자신의 주인이 휘말리지 않게 최대한 힘을 조절하면서 마물을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대로 날뛰면 이 거대한 함선조차 파괴할 수 있는 무력의 소유자들이었지만, 상대 마물들도 만만치 않았다.
마물들이 환영과 정신 조작의 마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큭…! 정신이…….
-디스펠 마법을 사용해!
-난 못 해!
보좌진 마물들이 마지막 저항을 하는 군터에게 합류하자, 오히려 경호원들이 밀리는 형국이 되어 가고 있었다.
특히 마물이 된 군터는 심장이 없는데도 펄펄 살아 움직이며 경호원들을 낚아채 제 몸에 쑤셔 넣었다.
방심해서 환영 마법에 당한 경호원들은 몸이 굳은 채로 군터의 몸에 부딪혀 갈가리 찢겨 새로운 육신이 되었다.
물론 저런다고 해서 심장이 사라진 부위는 재생할 수 없을 것이다. 어둠의 권능으로 재생을 불가능하게 해 놓았으니.
가만히 놔두면 죽긴 하겠지만, 빨리 정리하기 위해 아겔이 직접 움직였다.
아겔은 경호원들을 제치고 마물 군터에게 달려들었다.
군터의 몸에서 솟아오른 촉수들이 아겔에게 향했지만, 하나도 제대로 맞추는 건 없었다.
아겔이 손을 휘두르자, 검은 기둥 두 개가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쿵…! 쿵……!
“키에에에에엑!”
수직으로 마물 군터의 몸을 꿰뚫은 검은 기둥은 놈이 미친 듯이 발작해도 무대 바닥에 박혀 꼼짝하지 않았다.
아겔이 손짓하자, 기둥 사이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내려왔다.
쩡--!! 투두둑…….
칼날은 마물 군터의 목을 깔끔하게 잘랐다. 목이 잘리자 마물의 육체가 점점 느릿해졌고, 종국에는 완전히 멈춰 버렸다.
군터가 잡히자, 마물 보좌진들은 몸을 저릿저릿 떨더니 그 자리에 축 늘어졌다.
핏물을 뒤집어쓴 경호원들의 시선이 단번에 상황을 뒤집어 버린 아겔에게 집중되었다.
-…….
최고급 수트에 마물의 검은 핏물이 잔뜩 튄 아겔의 모습은 마치 사신처럼 느껴졌다.
경호원들은 깨달았다. 자신들이 전력을 다해도 저 노인은 이길 수 없다는 걸.
아겔이 입을 열었다.
“목숨을 살려 준 대가를 좀 받아 가야겠네.”
-…….
귀족들은 그게 자신들에게 한 말인 줄 깨닫고 몸을 떨었다. 그들도 아겔의 강함을 방금 지켜보았기에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 귀족이 말했다.
-뭐, 뭘 원하오.
“그건 카라이스만에게 듣게.”
뚜벅뚜벅.
카라이스만이 의기양양하게 극장 무대를 향해 내려왔다.
“별거 없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제게서 도장 하나씩만 받아 가면 됩니다.”
도장이란 말에 귀족들의 눈이 커졌다. 카라이스만이 말하는 도장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우, 우릴 노예로 삼으려는 건가!
-감히! 귀족이 귀족을 상대로 불공정 계약을……!
귀족들은 두려운 상황에도 목에 핏대를 세우며 자존심을 챙기려 했다.
그에 눈치 빠른 경호원들이 움직여 아겔을 포위하려 했다.
푹……!
“끅…….”
아겔의 뒤에서 접근하던 경호원의 머리가 검은 창에 꿰뚫렸다.
카라이스만이 미간을 찌푸리고 혀를 찼다.
“저런, 쯧쯧쯧. 저 친구는 마물을 상대하다가 명예롭게 전사했군요. 그 용기는 제가 기억하겠습니다. 혹시 더 전사하고 싶으신 분 있습니까?”
주위가 조용해졌다.
분명 저 노인이 죽였을 텐데, 마물에게 죽었다고 능청스럽게 말하는 모습에 귀족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카라이스만의 입이 비열하게 올라갔다.
“아니면, 비굴하게 노예가 되어 목숨을 연명해 보겠습니까?”
창백해진 귀족 중 누군가가 앞서 카라이스만에게 나왔다. 여기서 반항하면 아무리 대귀족이라도 죽음밖에 남지 않을 것이기에.
그는 경호원이 마물에게 사망한 귀족이었다.
기업가가 두 팔을 벌려 그를 환대했다.
“어서 오세요, 루프캄 경. 제가 당신을 아주 귀하게 쓸 겁니다. 귀족명이 '중개인'이었죠? 전 당신 같이 인맥이 넓은 사람의 가치를 잘 알고 있습니다.”
“추, 충성하겠습니다.”
카라이스만의 손이 귀족의 손에 얹히자, 그의 손바닥에 낙인이 새겨졌다.
계약. 카라이스만의 고유 권능이었다.
내용은 자유롭지만, 그 누구도 어길 수 없는 계약이 이루어졌다.
카라이스만이 계약한 귀족을 안아 주자, 귀족들이 하나씩 그에게 다가왔다. 언제 카라이스만의 말이 바뀔지 모르니까.
“어서 오세요, 건축가 카닐리 경. 참 오랜만이네요, 조선공 귀르도 경.”
귀족들은 차례대로 카라이스만에게 계약의 낙인을 받았다.
그중 아겔을 흘긋거리던 귀족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저자는 누굽니까……?”
카라이스만이 씩 웃었다.
“아까 말했잖아요. 신이라니까?”
기업가의 웃음소리가 오페라 극장을 울렸다.
.
.
.
아겔은 외교부 모함을 손쉽게 장악할 수 있었다.
내부에 타고 있는 귀족들을 돌려보내고, 카라이스만은 함대를 끌고 와 내부 선원들을 싹 물갈이했다.
카라이스만의 대장선과 거의 비슷한 규모의 함선이라 운용할 수 있을 때까지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어도 거대 함선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었기에 큰 소득이었다.
물론 아겔은 비행선 따위를 소득이라 여기진 않았다.
아겔이 있는 함장실의 문이 열리고 카라이스만이 들어왔다.
“달모어 132년. 군터의 술 취향이 참 나랑 비슷했군요. 아주 맛있는 겁니다. 한잔하시겠습니까?”
“난 됐네.”
그럴 줄 알고 물병을 가져온 카라이스만이 아겔에게 건네주었다.
“이것 참…… 너무 비싼 선물을 받았군요, 아겔. 귀족 회의에 참여했던 귀족들은 이제 전부 '내 것'이 되었고, 이 함선도 아주 마음에 듭니다.”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구먼.”
아겔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번 일로 카라이스만은 많은 이득을 봤지만, 아겔은 아직 그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지 못했다.
카라이스만도 그 사실을 알고 있고.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신 카라이스만이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저번에 갖다 주신 전 음행의 사도라는 년…… 생각보다 까탈스럽더군요. 가지고 놀고 싶어도 뭐만 하면 혀를 깨물어 버리니, 다루기가 영 좋지 않습니다.”
“쓸모없으면 버리게.”
“그럴 수야 없죠. 전 음행의 사도라는 타이틀에 환장할 변태 귀족들이 너무 많아서요. 값을 잘 받아 팔면 될 것 같습니다. 그보다 식사 좀 하시겠습니까? 아무것도 안 드셨을 것 같은데.”
아겔은 고개를 저었다.
힘을 되찾고 나서는 인간의 영역을 이미 벗어났다. 사실 물도 필요 없다. 관성, 혹은 그냥 마시고 싶어서 마실 뿐.
“식사는 자네나 하게.”
“알겠습니다.”
똑똑똑. 달칵.
마침 선원들이 카라이스만의 성대한 식사를 가져왔다.
그는 천천히 우아하고 품위 있게 식사했지만, 왠지 게걸스러움이 느껴지도록 한 끼를 해치웠다.
아겔은 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식사를 마칠 때까지 물을 마시며 기다려 주었다.
식사를 마친, 카라이스만이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이윽고 어떻게 알았는지, 선원들이 들어와 자리를 치워 주었다.
위스키로 입가심을 하던 카라이스만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제 시작이군요. 그렇죠? 악마를 잡는 일.”
악마의 하수인 중에서도 꽤 거물을 잘라 냈다. 전 음행의 사도라는 여자도 잡아 버렸다.
그렇다면 이젠 마지막 남은 악마를 잡을 차례였다.
“이미 미끼는 던져 두었네.”
카라이스만의 눈이 커졌다.
“미끼요? 언제… 아……?”
그는 아겔이 외교부 함선으로 출발하기 전 했던 일을 떠올렸다.
“버리고 온 게 아니었군요?”
“버리기엔 너무 밝게 빛나는 별이지. 마침 입질이 왔구먼.”
아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크록투스에게 가게.”
* * *
“헉헉헉…….”
크록투스는 검은 핏물을 잔뜩 뒤집어쓰고 자신을 노리는 마물들을 바라보았다.
아겔에게 버림(?)당하고 이 행성에서 지낸 지도 약 나흘. 셀 수 없이 많은 마물을 베었다.
끈적거리고 악취가 나는 마물의 피에 전신이 절고, 몸의 근육은 삐걱거렸다.
찌릿한 살기가 피부를 찌르는 듯했으나, 크록투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든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은 온통 어두웠고, 자신의 내면에서 마물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촤악……!
아겔은 이 행성의 모든 마물을 정화하라 했지만, 크록투스는 애초에 그게 부족한 자신에겐 불가능한 일이란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가 한 일은 내면을 한 걸음씩 걸어간 것뿐이었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마물들을 베면서.
가끔 마물들이 몰려오지 않을 때, 근처 마을을 들리기도 했지만, 정화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마치 아겔이 자신을 처음 이 행성으로 데리고 왔을 때, 정화한 사람이 전부였다는 듯이.
그러나 크록투스는 그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자신이 이 일을 하는 것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둠 속에 떨어진 영혼 단 하나라도 내버려 둘 수 없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신념을 지킬 힘이 없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아겔에게 영혼을 바친 후, 그는 신념을 지켜 나갈 힘을 얻게 되었다.
고리타분한 정론을 동료에게 비판받던 과거는 이제 없다.
“후읍……!”
촤악……!
대검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마물들을 두 동강 내버렸다. 근방에 있는 모든 마물을 해치운 크록투스는 그제야 대검을 땅바닥에 꽂고 자리에 주저앉을 수 있었다.
“헉헉…….”
입이 바싹 말라 가지만, 나흘 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검만 휘둘렀다.
초인적인 정신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한계에 달했다.
아겔이 닷새 내에 돌아온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미친 듯이 마물을 학살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돌아온다고 했기에. 크록투스는 미련 없이 전력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
이것이 마치 아겔이 준 시험처럼 느껴지기도 했기에 허투루 하고 싶지도 않았다.
적어도 아겔이란 자는 초월적인 존재 중 하나가 분명했고, 자신에게 시련을 준다면 이유가 반드시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 증거로 난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동료들의 비판이 무서워 상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에만 집중했던 예전과 달리 크록투스는 한참을 성장했다.
단 한 사람을 만나고서.
상념을 지우고 크록투스는 대자로 누워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깨어난다면, 먹은 영양분이 없어서 더욱 상태가 처참하겠지만, 숙면을 취하지 않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눈꺼풀이 무겁게 그의 눈을 짓눌렀다.
꾸륵. 꾸르르륵.
크록투스가 잠이 들자마자, 그가 벤 마물들의 육신이 꿈틀거렸다.
핏물이 한데 모여 무언가의 형상을 이루었다.
끔찍한 형상이 된 그것은 잠들어 있는 크록투스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크록투스는 자신의 얼굴을 간질이는 감각에 손을 쳐 ,내고 한 바퀴 굴러 대검을 뽑았다.
마물인 줄 알고 대검을 휘두르던 크록투스는 우뚝 몸을 멈추었다.
눈앞에 있는 여인의 얼굴을 보고.
“앤…서니 님……?”
“오, 신이시여…… 크록투스. 이런 곳에서… 살아 있었군요…….”
소망의 사도 앤서니 바일로.
그녀는 크록투스에게 다가가 그를 안아 주었다. 그의 전신이 검은 핏물로 젖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허엇… 사, 사도님……?”
창백했던 크록투스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었다. 부끄러웠던 그는 앤서니를 조금 밀어냈다.
“근데 여긴 어떻게…….”
“마물 군대를 쫓다가 보게 되었어요. 설마 했는데, 정말 살아 있었을 줄이야…….”
앤서니는 마치 아들을 보듯이 크록투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예전보다…… 많이 늠름해졌군요, 크록투스.”
“아, 아닙니다.”
크록투스는 마치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선망하던 빛의 사도가 자신의 생사를 확인해 주고 있는 이 상황은 마치 환상 같았다.
“그럼 이제 돌아갈까요, 크록투스?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주세요.”
앤서니가 크록투스에게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 미소의 한 겹 안쪽에는 끔찍한 마물의 얼굴과 붉은 눈이 꿈틀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