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공좌 (1)
아겔은 앉은 자리에서 턱을 괴고 집중했다. 외교부 모함을 타고 돌아가는 동안 크록투스의 대화를 엿들었다.
-앤…서니 님……?
-허엇... 사, 사도님……?
크록투스의 기분, 감정이 전해져 온다.
영혼을 바친 자의 말이나 감정을 멀리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겔의 권능 중 하나. 집중하기만 하면,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아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역시 찾아왔군.’
줄리안 일행에게는 접근하기 어려우니 아겔에게 영혼을 바친 다른 이에게 다가간 것이리라.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놈이니, 무엇이라도 건져 보자는 속셈으로 허겁지겁 움직인 거다. 그게 제 발을 붙잡게 되리란 것도 모르고.
조금 더 집중하려던 아겔에게 카라이스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겔, 고독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옷입니다. 추울 것 같아서 바람막이로 준비했습니다.”
“이리 주게.”
카라이스만은 아겔이 입을 만한 옷을 가져왔다.
그가 선물한 최고급 정장은 마물의 검은 핏물에 더럽혀져 세탁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카라이스만은 아깝다는 기색이 전혀 없는 표정이었고, 아겔은 무슨 거적때기를 버리는 듯 옷을 함장실 바닥에 툭툭 벗어 던졌다.
옷을 갈아입은 아겔은 산책을 나온 여느 할아버지와 다름이 없는 모습이었다. 지퍼를 끝까지 올린 아겔이 문밖으로 향했다.
“가 보겠네. 외교부 모함이 상하지 않게 지키게. 쓸 데가 있으니.”
“쓸모가 있으니까 이 함선을 가져온 거란 건 알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카라이스만이 두 손을 비볐다.
“부디 무사 귀환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문득 걸음을 멈춘 아겔이 카라이스만을 돌아보았다.
“기원? 자네가 기도하는 대상이 있었던가?”
“아, 이런.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어렸을 적부터 종족성이 깃든 습관입니다. 어디 밖으로 나가는 자에겐 기원한다는 말을 하죠.”
카라이스만은 가슴 안에 숨겨 두었던 목걸이를 꺼내 보여 주었다. 황금색 완만한 거북이가 달린 목걸이었다.
“거북이 수인은 폐쇄적인 종족이라 성좌를 믿지 않습니다. 민간 신앙처럼 금거북이를 믿죠. 제 아버지만 해도 죽기 전까지 종족의 한계에 갇혀 거북 신만을 부르짖다가 숨졌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지 않습니까?”
카라이스만의 의미심장한 눈이 아겔을 직시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진짜 신의 존재조차 알지도 못하고 말이죠.”
“…….”
아겔은 자신이 신 같은 게 아니라는 말을 하려다가 관뒀다.
어차피 이오베나 카라이스만 같은 자들은 자신들의 철학으로 신이란 존재를 규명하기에.
한마디로 뭐라 해도 듣지 않을 똥고집 철학을 가진 자들이란 뜻이었다.
아겔은 혀를 한 번 차고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크록투스는 앤서니의 제안에 잠시 머뭇거렸다.
아직 아겔이 떠난 지 나흘밖에 되지 않은 시간. 그는 분명 닷새 동안 이 행성을 정화하라고 했다.
물론 그게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닷새라는 시간까지 크록투스는 여기에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가 괜히 닷새라고 말한 게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건 착각일까.
그간 보아 왔던 아겔의 말과 행동은 하나하나 의미가 담겨 있었고, 허투루 된 것이 없었다.
게다가 겨우 나흘 만에 크록투스는 자신이 달라진 것을 느꼈다.
‘내 안에 있는 이 빛이라는 게. 이전보다 훨씬 커졌다.’
이전에는 반딧불보다 못한 크기였다면, 지금은 작은 전구보다 커진 빛. 이 빛이 커져만 갈수록 크록투스는 더욱 강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무려 빛의 사도 중 하나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소망의 사도, 앤서니 바일로. 그녀는 크록투스의 우상이자, 롤모델 같은 사람.
수많은 선행으로 우주민의 생명을 구하는 데 온 힘을 쏟아붓는 영웅이자 위험한 외계를 순찰하며 적의 위협으로부터 은하를 지키는 데 앞장선 자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과 함께 돌아가자고 말하고 있었다.
크록투스의 망설임을 읽은 것인지, 앤서니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물어 왔다.
“뭔가 걸리는 게 있나요, 크록투스?”
“아, 그게…….”
그녀가 얼굴을 가까이하자, 크록투스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의 아버지 로드먼도 빛의 사도였기에 다른 빛의 사도들과도 몇 번 마주했던 일이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앤서니의 눈부신 미모는 크록투스의 기억에 각인되었고, 그때와 지금의 모습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빛의 사도는 늙어 죽는 법이 없었다.
앤서니는 로드먼의 아들인 크록투스를 특히 어여삐 여겨 주었고, 다른 형제들보다 뛰어난 구석이 없었던 크록투스는 그녀의 관심이 기꺼웠다.
그가 앤서니 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일면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그녀가 크록투스의 손을 잡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와 함께 돌아가면 다 해결될 거예요. 내가 도와줄게요, 크록투스. 돌아가서 회복할 만한 시간을 보내요.”
“앤서니님…….”
크록투스의 눈이 잠시 멍해졌다.
이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다.
강제로 데리고 돌아갈 수 있음에도 상대방의 의사를 묻는 상냥함. 그런 모습이 크록투스에겐 귀감이 되고 있었다.
‘그래. 사실 돌아가는 게 맞겠지.’
주어진 상황만 보아도 크록투스는 돌아가는 게 정답인 것처럼 보였다.
누가 뭐래도 그는 성좌기사단장이었으니. 교단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게 옳았다.
그런데 문득 크록투스는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뭐지……?’
크록투스 내면에 있는 전구 같은 빛이 점점 사그라드는 듯한 느낌.
이젠 내면으로 깊게 집중하지 않아도 안에 있는 빛의 상태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크록투스였다.
아까 잠깐 포옹했을 때와 달리, 빛이 급격하게 옅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크록투스에게 큰 경고 신호가 되었다.
불안한 느낌에 크록투스는 그녀의 손을 놓았다.
“죄, 죄송합니다, 바일로 경. 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죠?”
갑자기 이름이 아닌 성으로 그녀를 칭하자, 앤서니가 의아한 얼굴로 물어왔다.
크록투스는 그 질문에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당신에게서 껄끄러움이 느껴지기에 같이 갈 수 없다고 말하는 건 왠지 불경한 것 같아서.
그러나 솔직한 마음을 숨기는 것도 거짓의 죄가 될 것이다.
“바일로 경에게서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이상한 느낌이요?”
“예…… 마치 제 안에 있는 무언가가 지워지는 듯한 느낌입니다.”
앤서니는 빙긋 웃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내면의 신성력을 말하는 거로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큰 빛이 있으면 작은 빛은 가려지곤 하잖아요. 그런 것과 비슷한 겁니다.”
크록투스는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그 반대였기에. 우습게도 거대한 빛을 만나서 자신의 빛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어둠을 꿰뚫어야 할 빛이 어둠에 의해 지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크록투스가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한 가지 시험을 해 봐도 되겠습니까?”
“예? 시험이요?”
앤서니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빛의 사도를 시험하겠다니, 이는 큰 불경죄가 될 수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감각이 보내 오는 경고를 지나치고 싶진 않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크록투스는 뭘 시험하겠다는 건지 말하지 않았다.
그가 한 것은 나흘 동안 해 왔던 것과 똑같은 일.
억지로 마물이 된 자 중 사람의 마음이 남은 자들을 정화하는 일이었다.
신성력이 아닌, ‘빛’이 어린 손이 앤서니의 어깨에 닿았다.
그리고…….
치이이이익…….
손이 닿은 앤서니의 어깨에서 타는 듯한 소리가 나고 이내 그 부분의 허상이 벗겨졌다.
“헛……!”
마물의 육체. 끈적하고 역겨운 고름이 피어오르는 마물의 껍데기가 크록투스의 손에 닿아 탔다.
크록투스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고, 이내 굳어진 앤서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애, 앤서니 님? 이게 도대체…….”
앤서니는 시린 눈빛을 하고 크록투스를 바라보았다.
[그건…… 너 같은 미물이 가질 수 있는 힘이 아닌데,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냐.]
목소리가 웅웅 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크록투스는 귀를 부여잡고 뒷걸음질 쳤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크윽… 애, 앤서니 님…….”
[그런 역겨운 미물의 이름으로 날 부르지 마라, 미물아. 어떻게 내 허상을 벗겨 낼 수 있는 힘을 가졌는지 몰라도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다.]
그녀의 눈은 이미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붉은색의 살의가 가득한 눈.
그 눈을 보는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아, 악마……?!’
어둠의 사도도 직접 본 적이 없건만, 크록투스는 눈앞에 있는 여인의 모습을 한 자가 악마란 사실을 깨달았다.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악마가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크윽……!”
크록투스는 어느새 귀신처럼 다가온 앤서니의 얇은 손에 목을 잡혀 허공으로 들렸다.
발버둥 치며 빠져나오려 했지만, 앤서니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라. 내 너를 좋은 패로 사용할 테니.]
“컥, 커헉……!”
환상을 보는지 크록투스의 눈이 위로 향했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곧 크록투스의 목이 축 늘어졌고, 앤서니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크록투스를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잠시 눈을 감은 그녀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아겔에게 영혼을 바친 미물을 확보했다. 곧 가지고 갈 테니, 사도들을 대기시켜라.]
대화를 마친 앤서니, 아니 음행의 공좌는 눈을 떴다. 이것으로 한숨 돌렸다.
비록 100년 전과 같은 타격을 주긴 힘들겠지만, 이 미물도 확실히 아겔과 내면이 연결된 것.
이 미물로부터 내면이 연결되어 있는 아겔을 침식한다면, 아직 승산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앤서니는 자신이 붙잡은 미물의 입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어딜 가려고 그러느냐. 포르니카쇼.”
[……!]
앤서니는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환영 마법으로 정신 세계에 가둬 놓은 크록투스가 멀쩡하게 일어서고 있었다.
눈이 완전히 검게 물든 채로. 아겔이 크록투스의 내면에 강림했다.
그녀는 이내 사나운 얼굴을 했다.
[아겔라스토스.]
“이번에도 100년 전과 똑같은 수를 쓰려고 하는구나.”
[너를 죽일 가장 치명적인 방법이니까.]
“100년 전에도 실패했는데, 이번엔 성공하리라 보느냐?”
[물론. 어린 형제들이 돕는다면, 널 죽이는 것도 꿈만 같은 일이 아니다.]
태연하게 말하던 음행의 공좌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려 했다.
그 순간, 허공에서 검은 사슬들이 나타났고, 도망치려는 자신의 몸을 구속해 버렸다.
촤륵!
[……!]
육체에 얽매이지 않는 공좌였지만, 사슬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암계로 돌아갈 수가 없다……?!’
이 찌꺼기 같은 육신을 버리고 혼만 다시 암계로 돌아가려 했지만, 사슬에 묶인 건 껍데기뿐만이 아니었다.
공좌의 혼도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실패를 반복하는구나. 여전히 어리석어. 네가 날 이길 수 있다고 보느냐.”
붙잡혀 발버둥 치는 그녀의 앞으로 아겔이 걸어왔다.
“딸아.”
[…….]
일순간 그녀의 발버둥이 멈췄다. 음행의 공좌, 포르니카쇼의 눈이 더더욱 핏물처럼 진해졌다.
[나를…… 딸이라고 부르지 마라…… 어찌 아비란 자가 자식들을 그리 대할 수 있는 거지?]
분노로 떨려오는 그녀의 껍데기 육신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들거렸다.
[내가 이전과 같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널 죽여 주마.]
우득……! 우드드드득!
껍데기 육신이 미친 듯이 팽창하기 시작했고, 그녀의 몸을 구속하고 있던 검은 쇠사슬은 육신에 파묻혀 아예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아겔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 계속 커져만 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디 오랜만에 재롱 좀 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