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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죄수는 고독에 산다 (181)화 (182/186)

181화 공좌 (3)

아겔은 이제는 소행성이 되어 버린 잔해를 바라보았다.

산산조각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행성의 잔재들을 마물의 육신이 먹어 치우고 있었다.

거기에 눈을 돌려보니, 침식이 이루어지고 있는 행성은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전부 먹히고 있군.”

어느새 나타난 마물의 혼합된 육체가 행성들을 잡아먹고 있었다.

모든 것을 먹어 치워 에너지로 변환하려는 의도. 다행인 것은 고독까지 그 손길이 뻗치진 않았다는 거다.

행성을 뒤덮은 마물의 육신에서 아까처럼 여인의 형상이 갖춰졌다.

말 그대로 행성만 한 크기를 한 음행의 공좌는 그 거대한 눈으로 아겔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거대한 크기로 변했음에도 여전히 검은 쇠사슬에 묶여 있는 처지. 영혼을 옥죄는 쇠사슬은 그녀의 영혼이 암계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구속하고 있었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악---!!!

울부짖음에 우주가 진동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겔이 검을 거두었다.

“반항하지 말아라. 조용히 있으면 금방 끝내 주마.”

공좌의 붉은 눈이 격렬한 증오로 물들었다.

[내가 그냥 당할 것 같아? 아직 안 끝났어!]

주변 행성을 잠식하던 마물의 육신이 한데 모이기 시작했다. 꿈틀거리는 찢어진 근육들과 발굽, 역겨운 액체가 흐르는 입과 제멋대로 꺾인 무릎 등이 모여 더욱 크기를 부풀렸다.

그녀는 ‘주먹’을 내질렀다.

평범한 주먹이라면 피하면 그만일 테지만, 문제는 그 주먹이 행성만큼 크다는 데 있었다.

아겔이 피해 내기도 전에 마물의 육신으로 이루어진 주먹이 그를 덮쳤다.

주우우욱 늘어난 팔은 멀리 있는 행성까지 뻗어 나가 격돌했다. 행성의 지각 표면이 터져 나가면서, 뜨거운 용암이 확 분출되었다.

아겔은 ‘주먹’에 깔린 채, 어둠으로 몸을 보호했다. 둥그런 암흑의 방패를 들고 있는 아겔은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환영은 사용하지 않는구먼.'

이렇게 물리력으로 나오는 게 놈의 최선이다.

환영은 정신력 싸움에서 질 게 뻔하니,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정신 조작도 아겔에겐 통하지 않으니.

상성 자체가 아겔에게 유리했기에 그녀는 영악하게 처음부터 물리적인 힘으로 싸울 생각을 했다.

지금 육신이 죽어서는 안 되는 아겔의 약점을 캐치한 것이다.

아겔이 암흑 방패를 거두며 손을 풀었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한순간, 아겔의 몸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인간의 모습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

주먹을 휘둘러 아겔을 먼 행성에 처박아 버린 음행의 공좌는 잠잠해진 싸움에 긴장을 느꼈다.

[이대로 놈이 죽을 리가 없어……!]

그녀는 아겔이 누군지 안다. 겨우 이 정도 물리력으로는 현재 인간인 그의 육신조차 죽이지 못했을 것이다.

일단 인간 상태인 그를 죽여 현세에서 추방한다면, 다음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이다.

놈이 현세로 돌아오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테니. 그때, 사로잡아 놓은 그년을 활용하면 충분히 아겔을 죽이는 것도 가능하다.

[지금은 널 완전히 죽일 순 없지만, 인간의 몸쯤은 아예 가루로 만들어 주마!]

지각을 뚫고 들어간 주먹은 이내 행성 전체를 손아귀로 잡은 것처럼 형태가 바뀌었다. 거대한 마물의 손이 행성을 부술 듯 쥐어짰고, 맨틀이 쩍쩍 갈라지면서 뜨거운 액체들을 마구 토해 냈다.

쿠구궁……!

행성이 악력에 완파되며 조각났다.

그녀는 손에 쥔 사과를 부수듯이 행성을 부숴 놓고도 성이 차지 않는지 남은 잔해들을 마주 주먹으로 후려쳤다.

아겔이 살아 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참을 행성과 씨름하던 그녀는 눈길을 돌렸다.

[아겔의 조력자들…….]

그곳은 행성 고독이 있는 곳이었다. 카라이스만의 함대가 머물고 있는 곳이기도 했고.

음행의 공좌는 그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허공뿐인 우주를 걷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음행의 공좌는 허공을 걸어서 고독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 것인지, 함대의 움직임이 황급해졌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밖엔.

[이미 늦었다, 이 원숭이 같은 놈들아. 짐승이나 다를 바 없는 너희는 죽어 마땅한데, 아겔라스토스를 돕기까지 했으니, 그 죄가 막중하다.]

고독을 향해 손을 뻗던 그녀는 이내 무언가 자신의 팔을 붙잡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자신과 똑같은 크기의 거인이었다.

오로지 어둠으로만 이루어진.

[……!]

거인은 다짜고짜 손날을 내리쳐 공좌의 팔을 끊어 냈다. 그리고 고독으로 다가가지 못하게 마물의 육신을 붙잡고 한껏 밀어 버렸다.

음행의 공좌는 어둠의 거인으로 변한 아겔을 보고 경악했다.

[어떻게 여기서 그 모습을……! 설마 힘을 다 되찾은 건가?!]

아겔은 답하지 않고 거대한 주먹을 휘둘러 공좌의 머리 부분을 부숴 버렸다. 머리가 부서졌는데도 거대한 마물 육신은 거인에게 대항했다.

날카로운 창처럼 변한 마물의 팔이 거인의 복부를 꿰뚫었다. 그러나 푹 찔러 들어가는 건 오히려 자신의 복부.

어둠의 거인 복부를 통과한 창날은 찌른 부분 바로 옆에서 다시 튀어나와 공좌의 복부를 꿰뚫었다.

아겔은 멀쩡한 모습으로 두 팔을 뻗었다.

[애쓰는구나.]

검은 손이 음행의 공좌가 가진 마물의 육신을 붙잡고 뜯어냈다. 본체도 아니건만, 공좌는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비명을 질러 댔다.

[끼아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아악---!!!]  

거인은 억지로 결합된 마물 육신을 헤집고, 뜯어내고, 해체하고, 짓이겼다. 살덩이가 떨어져 나가며 알 수 없는 체액이 흩어지는 끔찍한 모습.

아겔은 가축을 잡는 도살자처럼 무정하게 그녀의 살점을 헤집었다. 그의 손에 잡혀 떨어진 살점들은 더 이상 공좌의 통제에 반응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그녀의 몸을 완전히 뜯어 버린 아겔은 손바닥에 남은 여인의 형상을 바라보았다.

쇠사슬에 구속된 그녀는 분한 눈을 하고 아겔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크흑…… 본체였더라면…….]

[그랬어도 난리를 피우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밖에 되지 않았을 게다.]

아겔은 거인이 된 채로 고독을 향해 걸어갔다. 허공에 길 따윈 없지만, 아겔은 당연하다는 듯이 십수 걸음을 걸어 고독 앞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기업가의 함대가 라이트를 비추고 있었지만, 거인의 몸은 한 군데도 빛에 비치는 곳이 없었다.

아겔이 거대한 검은 손을 들어 카라이스만의 모함을 스치고 지나갔다.

공좌의 육신을 잡아 뜯었던 아까와 달리 지금은 마치 유령이나 된 것처럼 그의 손은 모함을 통과해 버렸다.

그리고 그의 손 위에는 한 여자가 올려져 있었다.

음행의 공좌가 자격을 박탈시켜 버린 전 어둠의 사도, 루비아.

아겔이 뭘 하려는지 깨달은 음행의 공좌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야. 이럴 순 없어…… 어떻게 나를 저런 원숭이의 몸에……!]

[잠자코 들어가거라.] 

펼쳐진 아겔의 손바닥에서 작은 손들이 기어 나와 마물 육신에 가둬진 공좌의 영혼을 잡아챘다.

쇠사슬과 함께 잡힌 악마의 영혼이 쓰러져 있는 루비아의 몸을 향해 끌려갔다.

[아, 안 돼……! 제발 이것만은……!]

“끼아아아아아악---!!”

한껏 비명을 지르던 그녀는 루비아의 몸에 갇혀 버렸다. 영혼이 떠나자 그녀가 쓰고 있던 마물의 육신이 허물어졌다.

아겔은 루비아를 붙잡고 고독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카라이스만이 수송선을 타고 정글에 착륙했다.

여전히 깔끔하게 정장을 갖춰 입은 그는 라반과 함께 수송선에서 내려 걸음을 옮겼다.

정글은 여전히 풀과 나무가 푸르게 자라고 있는 모습이었다. 햇빛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작금의 상황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라반이 질문했다.

“이곳은…… 언제 내려와도 신기하군요.”

카라이스만은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 아겔이 관리하고 있어서겠죠. 그가 없었더라면, 이 행성은 진작 얼어붙었을 겁니다.”

왠지 모를 따뜻함까지 느껴지는 정글이었다.

두 사람은 얼마간, 정글의 풀을 피해 조심스럽게 걷다가 아겔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쪽 바위에 아겔이 앉아 있었고, 그 옆에 전에 선물로 받았던 전 음행의 사도, 루비아도 전신이 속박된 채로 쓰러져 있었다.

이젠 단순한 인간은 아닌 것 같아 보였지만.

“왔나?”

탐욕스러운 눈을 한 카라이스만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아, 예. 고생했습니다, 아겔. 소원대로 악마를 가지게 되다니, 이거 정말 설레는군요.”

카라이스만은 담담한 겉모습과 달리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아겔은 담담하게 말했다.

“인간의 몸에 가둬 놨네. 힘을 쓸 수 없겠지만, 완벽하진 않으니 조심해야 할 걸세. 하나 경고하자면, 악마의 말에 절대로 현혹되지 말게.”

“큭큭큭, 그 정도야 뭐. 상정했던 일입니다.”

눈을 감고 있던 루비아가 눈을 떴다. 그녀의 눈은 붉은색이었다. 홍안을 가진 자는 많았지만, 지금 루비아의 눈은 확실하게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눈빛부터가 달랐으니까.

격렬한 분노를 지닌 눈이 카라이스만을 올려다보았다.

“내게 손대지 마라, 카라이스만, 이 원숭이 같은 놈아. 네가 날 이렇게 만들고도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

카라이스만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악마 씨. 당신을 인간의 몸에 가둔 건 아겔인데요.”

“네가 날 소유하려고 아겔과 거래한 걸 모를 줄 아느냐, 원숭아.”

두 팔과 다리가 묶였는데도 아득바득 땅에서 일어선 루비아는 카라이스만에게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감히 인간 주제에 날 소유하려고 해? 네가 잠드는 시간만 기다릴 거다. 환각 속에서 고통을 부르짖으며 죽어 가게 해 주마. 더러운 패륜아, 일족을 팔아넘기고 멸망시킨 머저리, 아겔의 발닦개 같은 자식.”

카라이스만이 자신의 과거를 아는듯한 악마의 말투에 씩 입꼬리를 올렸다.

“칭찬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건 정정해야겠군요. 우선 저는 아시다시피 겨우 인간 따위가 아닙니다. 훨씬 오래 사는 거북이 수인이죠. 그래도 이제 가축이 된 처지의 악마가 하는 협박치고는 무섭군요.”

루비아의 붉은 눈이 빛났다.

“꿈속에서 네 형제와 아비, 어미의 비명을 듣게 될 거야.”

“잠이 들지 않을 때도 듣고 있습니다. 자장가 같은 교향곡이죠. 술과 함께 즐기면 더할 나위 없습니다.”

카라이스만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루비아는 포기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네 어미가 네 형제들과 잠자리를 함께했다는 사실은 알아?”

“…….”

“자식과 어미가 나누는 잠자리라니,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어.”

카라이스만이 일순간 입을 다물자, 악마는 교활하게 웃었다.

거짓말이 아니다.

사람은 진실임에도 감추고자 하는 사실을 마주했을 때 그 충격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곤 한다. 진실은 추악한 면도 있으니.

그러나 카라이스만은 그다지 충격받은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쾌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제가 다 죽였습니다.”

“…….”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게 해서 절 휘둘러 보려 하는 것입니까? 애석하지만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는군요.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아주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업적 중 하나입니다. 그 타락한 과정에 당신 같은 악마가 끼어 있었기 때문이죠. 더럽게 물든 일족은 제가 봤을 땐, 존립할 이유가 없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죠.”

악마와의 대화임에도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카라이스만을 보며 아겔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에서 주도권을 잡는 것 자체는 성공했다. 카라이스만도 사람인지라 악마의 말에 흔들릴 때가 있긴 하겠지만,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테니 악마를 맡겨도 괜찮을 것 같다.

“이제 놈은 자네가 관리하게.”

아겔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갑자기 칠흑의 검을 만들어 수평으로 휘둘렀다.

서걱.

잘려 나간 루비아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지만, 피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머리가 잘렸음에도 악마가 깃든 루비아의 몸과 머리는 죽지 않았다.

“빌어먹을 아겔라스토스. 내게 이런 치욕을…….”

아겔은 다 듣지도 않고 마치 돌멩이를 줍듯이 떨어진 머리채를 잡고 카라이스만에게 건넸다.

“받게.”

“이런…… 들고 다니기 좋게 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몸도 잘 관리하도록 하죠.”

라반이 목이 잘린 몸을 어깨에 들쳐멨다.

카라이스만이 질문했다.

“바로 출발하십니까?”

어디로 가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목적지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아겔이 고개를 저었다.

“하루만 쉬고 출발하지. 몸 상태를 좀 봐야겠네.”

“그러시죠. 그럼 전 모함에서 대기하겠습니다. 호출하면 수송선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러게.”

아겔은 악마의 머리를 들고 수송선으로 돌아가는 카라이스만의 뒷모습을 잠깐 지켜보았다.

일전엔 성좌라 불렸지만, 이제는 타락하여 악마가 된 자들. 거기에 더해 100년 전의 죄악까지 저지른 딸.

인간의 수집품이 된 것도 다 그녀가 자초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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