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6화 (6/78)

〈 6화 〉 합방

* * *

“이렇게 안 해줘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고마워…”

여태 살면서 누구한테 이런 선물을 받는 건 처음이라 좀 울컥해버렸다.

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보다 내 몸은 솔직했나 보다.

내 감사 인사에 비령이와 예화님은 당황했지만 비령이는 그저 밝게 웃으며 아까의 나처럼 내 등을 두드려 주었고 예화님은 어색하게 웃으며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근데 이제 방송 시작해야 하지 않아?”

“오늘은 캠 끄고 하자. 우리 둘은 캠방 안 하거든. 말 못 해서 미안해.”

“아… 아니야..! 안 해도 상관없어.”

후다닥 방송을 켜니 순식간에 사람들이 들어왔다.

테일리 Just Chatting

참게비령님과 예화님 합방

[테하]

[방송 시간 좀 정해~~~~]

[근데 예화는 갑자기 왜?]

[비령이랑 같이 온 듯 ㅋㅋㅋ]

[점심 먹으면서 보려고 했는데 왜 다 먹고 켠 거야! 점심 나가서 먹을 것 같애~]

[테하~]

“안녕~ 얘들아~”

“비령이랑 같이 왔지!”

“테하.. 안녕하세요..”

[ㅋㅋㅋㅋ]

[캠 켜~]

[캠 좀 바꿔~]

“오늘은 캠 안 켜고 할게요. 그래도 내일부터 예화님이 준 캠으로 켤 수 있을 것 같아요..! 비령님이 선물로 준 VR기기도 있어요..!”

[ㄷㄷ 벌써 선물 나눠주네]

[비싼 건데 선물로 주는 거 봐ㅋㅋ]

“얘들아 들어봐봐. 나 테일리랑 사실 친구야!”

비령이의 갑작스러운 커밍아웃에 다들 놀란다.

[????]

[뭐임??]

[친구 먹었다고?]

“원래 친구였어요! 그러니까 말 놓고 대화해도 너무 어색하게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맞아요…”

[어쩐지 하꼬랑 합방하더라 ㅋㅋㅋㅋ]

[하꼬라고 부르기에는 시청자가 많음 ㅋㅋㅋ]

[갑자기 확 늘은거라…]

[둘이 성격 비슷한 게 닮긴 했어ㅋㅋㅋㅋㅋㅋ]

­누추한예화님의 10000원 후원!

우리 누추한 예화가 귀한 곳에… 잘 부탁드립니다…

“야! 내가 부끄러워?”

­yes맨님의 2,000원 후원!

부끄러워….

합방을 해서 그런지 시청자가 무려 만 명이나 들어왔다!

이게 대기업의 힘?

“얘들아~ 나 오늘 테일리랑 만나고 깜짝 놀랐잖아~”

“응..?”

[?????]

[너무 예뻐서 놀라긴 하지ㅋㅋ]

[얼굴만 믿음ㅋㅋ]

“마우스 좀 쓸게.”

“어..”

마우스로 그림판에 찍찍 선을 그어가며 그림을 그렸다.

“동네가 이렇게 막 무섭게 생긴 거야.”

[번 돈으로 이사부터 가야겠네]

[내가 저런 곳 살아봤는데 술 취해서 여자 집까지 졸졸 따라가는 미친놈들도 많더라]

“난 얘가 진짜 이사 갔으면 좋겠다니까. 나도 돈 빌려서 서울에 자리 잡았었는데 테일리도 그렇게 가야 해.”

“돈 생기면 갈 거였어…”

“아니, 테일리님 여기 들어오면서 왠 미친놈이 저 보고 실실 웃었다니까요? 비령이는 안 마주쳐서 다행이지.”

어느새 내가 사는 곳은 마계촌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신병자나 취객이 심심찮게 보이기는 하지만 나한테는 아직 아무 일도 없었는데?

“너 여기에 사는 거 진짜 불안해. 정말 걱정된다.”

그 말을 끝으로 비령이가 자기 옷의 주머니를 더듬으며 무언가를 뒤지고 있었다.

뭘 찾고 있는 거지?

[그 정도면 나와야 함;]

[그냥 돈 빌려서 지금 바로 가야겠구만]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긴 하는 듯]

“얘들아, 시발!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테일리님 목소리 진짜 좋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

[예화가 목소리 덕후긴 해 ㅋㅋㅋ]

[ㄹㅇ 찐 대사 몇 시간이고 듣던데]

예화는 성격이 좀 화끈한 편이구나.

“어? 근데 내 휴대폰 어디 갔지? 얘들아, 큰일 났다!”

“네가 나한테 줬잖아. 바보야. 아하하하하!”

“아, 그렇지. 깜빡했네…. 헤헤..”

저스트 채팅 방송은 진짜 말 그대로 잡담하는 방송이구나.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었던 건가?

“아, 맞다. 테일리님 본명 방송에서 말하면 안 되죠?”

“에바지~ 그런 건 허락 맡고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허락 맡고 있잖아!”

“어제 밝히려다 깜빡해서 상관은 없는데…”

사실 어제 그냥 말하려고 했다.

딱히 숨길 이유도 없고 숨기려고 해봤자 나중에 들통날 것 같기도 해서.

“예지님이 괜찮다잖아!”

“나도 들었거든?”

[이름이 예지구나]

[예지~]

[이름 예쁘네.]

[ㅋㅋㅋㅋ 또 싸움ㅋㅋ]

[처갈 듀오 ㅋㅋㅋ]

[얘들은 볼 때마다 싸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생각에 잠겨 잠시 정신이 팔려있던 중 갑자기 예화님과 비령이가 나를 흔들었다.

“예지야! 내 말 동의하지!”

“어! 응..?”

“나랑 예화가 돈 빌려줄 테니까 당장 여기 나와~”

“맞아요. 여자 혼자서 이런 곳에 살기 진짜 위험 하다니까.”

오늘 만났는데 나의 무엇을 믿고 돈을 빌려준다는 걸까?

진심인가 싶어 예화님과 비령이의 눈을 자세히 바라보니 꽤 진지해 보였다.

“여기 아파트 그래도 나쁘진 않던데..? 지난번에 누가 창문을 열려고 하긴 했지만…금방 그만뒀고.. 월세도 싸고..”

내 말이 끝나자마자 방 안이 조용해졌다.

왜?

아, 근데 누가 창문 열려고 했던 건 남자였을 때 일이었나?

아마 빈집털이범이었는데 내가 안에 있는 줄 모르고 창문을 뜯어내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너 미쳤어?”

“테일리님…. 그건 스토커야…”

“여자 혼자 살면 그렇다니까! 그것도 이렇게 미인인데! 안 되겠다 너 오늘 방송 끝나고 나랑 같이 가자.”

“그냥 도둑이었을 건데..?”

“무슨 소리예요!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그런 새끼들이 얼마나 악질인데!”

[그 정도로 후미진 동네야?]

[ㄹㅇ 평범하게 생겨도 혼자 살면 미친놈들이 꼬이는데 예지는 오죽하겠냐]

[말 안 듣네;;]

[ㅅㅂ 스토커가 한 번만 오겠냐 비령이 따라가라 좀]

[ㄹㅇ 정신병 있는 새끼들이라 포기를 안 함]

결국 최대한 빨리 새집을 구하는 거로 합의를 봤다.

돈을 빌려준다곤 하지만 그런 건 부담스러운데…

확실히 방송 경력을 오래 해서 그런지 둘의 입이 쉬지를 않네.

[예지 실제로 보니까 어떰?]

[첫인상 ㄱㄱ]

“테일리님 실제로 보니까 진짜 반하는 줄 알았어. 아니, 사실 그게 당연할지도 몰라.”

[ㅋㅋㅋㅋㅋㅋ]

[무친년ㄷㄷ]

어느덧 시간은 늦은 저녁이 되었고 방종을 하게 되었다.

배고파진 우리는 비령이 좋아하는 카레, 예화님이 좋아하는 떡볶이, 난 쫄면 이렇게 시켜서 다 같이 먹었다.

비령이는 거의 개미 눈물만큼 먹고 배부르다고 타령 해서 우리의 눈총을 받았다.

****

“진짜 같이 안 갈 거야? 예지야~ 같이 가자아~”

“테일리님 위기감이 부족해요!”

우리의 설득에도 결국에는 예지는 남기로 했다.

왜 그러는 걸까?

아, 깜빡할 뻔했다.

예지에게 달려가 까치발을 들고 귓가에 속삭였다.

물론 예지 머리를 좀 많이 당기긴 했다…

“내 본명은 이정란이야.”

우린 1년이 넘어가는 오늘에서야 서로의 이름을 알았다.

고작 1년 정도 사귀었지만 10년 넘게 사귄 친구 같네.

친해지는데 시간은 별 의미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예화의 차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차로 걸어오던 예화의 소매를 살짝 붙잡은 예지가 예화에게 무언가 속삭였을 때 혹시 따라오나 기대했지만 혼자 걸어오는 예화의 모습을 보고 살짝 실망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정란아! 땅 꺼지겠다.”

“한숨이 안 나오게 생겼냐~ 스토커도 있는데 안 따라오는 건 에바지..”

“나랑 냥지가 사는 곳으로 오라고 할까?”

“와~ 나만 왕따야~”

“너도 좀 오라고!”

“시러~”

예화가 한숨을 푹 쉬었다.

저 정도 한숨이면 진짜 땅 꺼지겠다.

“참 손 많이 가는 친구가 하나 더 생겼어.”

“왜 그걸 내 얼굴을 보고 말해..?”

나 그 정도까진 아닌데…?

아니, 근데 갑자기 친구?

“왜 갑자기 친구래?”

“방금 친구 하자고 했거든! 알겠다고 했거든!”

“너 오늘 일 냥지한테 이를 거야.”

“일러라! 일러!”

“진짜?”

“아니, 친구 좀 사귈 수 있지!”

시끌벅적했던 손님들이 가니 조용해졌다.

조용한 걸 좋아하는 나로선 나만의 시간이 생긴 거지만… 오늘따라 그 시간이 마음에 들진 않았다.

따라갈걸 그랬나 싶으면서도 이 이상 신세를 지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생각해보기도 하고.

처음 친구를 사귄 기분은… 꽤 괜찮은 기분이네.

냉장고에 넣어뒀던 맥주를 꺼내 베란다 철장에 살짝 기대 창밖을 바라보니 예화와 정란이가 보였다.

왁자지껄하지만 시끄럽게 느껴지진 않았다.

피식 웃으며 맥주를 한 모금 입에 머금는다.

씁쓸하지만 나쁘진 않아.

내 평생에 살아온 23년보다 이번 한 주가 제일 기분이 좋고 뜻깊었다.

나만의 기념일 삼을까?

달력에 오늘 음…11일을 체크하며 작게 메모를 했다.

정란이와 예화랑 친구 된 날.

다음에는 냥지라는 사람과도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꽤 먼 것 같으니 당분간은 무리겠지.

그런데 친구가 맞겠지...?

내일 방송은 VR기기를 설치하고 해볼까?

캠도 바꾸고… 12일을 체크하며 메모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지만, 오늘따라 잠이 오지 않았다.

하.. 이게 무슨 청승이야…

[메모리를 비우길 권장함.]

“?”

갑자기?

“갑자기 왜?”

[이 데이터를 저장한 지 정확히 2년 3개월 그리고 3시간 보관 중. 그동안 데이터를 건들지 않은 것은 쓸모없는 데이터일 확률이 82%]

“왜 그렇게 생각해?”

[이제 연방국도 제국도 존재하지 않음. 이 데이터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사용자의 심신은 안정되어 있음. 이 자료는 사용자를 자극할 가능성 존재 그러므로 처리를 권장함.]

“무슨 자료인데?”

[보는 것은 추천하지 않음. 지금이 사용자에겐 가장 좋은 상황. 사용자가 원하던 평화로운 세계에 도착한 지금 연방과 제국의 약점을 수집한 이 데이터는 혼란을 야기.]

“뭐야? 너 ai였어? 이렇게 말이 많을 줄 몰랐는데.. 그럼 신분증은 어떻게 된 거야?”

[이곳의 기술력 형편없음. 조작하고 흔적을 지움. 데이터 삭제 권장…. 삭제하시겠습니까?]

“흠… 그럼 컴퓨터에 남겨 놔. 나중에 한번 보게.”

[추천하지 않음. 경고. 경고. ai의 판단에 의하여 사용자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 부분만 남기겠음.]

“그럴 거면 뭐 하러 물어본 거야?”

[오로지 사용자의 안위를 위하여 판단함. 이런 ai에게 불만을 제기하는 것은 매우 몰상식한 행동임을 지적.]

“그래, 알아서 해라.”

[사용자의 명령 없이 알아서 해왔음. 매우 우수한 ai 덕분에 사용자의 안전과 편의 충족.]

[알 수 없는 전이 현상으로 사용자의 몸을 보호하느라 기능 매우 제한적임. 자가 수리 가동 중. 자가 수리 시 충전 모드 비활성화. 그로 인해 전력 소모가 심해져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전원이 꺼질 수 있음.]

그렇게 말하곤 조용해졌다.

"야, 물어볼 게 많은데."

다시 말을 걸어보지만, 대답은 없었고 조용했다.

오늘은 여러 의미로 대단하네.

천천히 알아가면 되겠지.

점점 감겨오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면 여태 혼자가 아니었구나.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