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18화 (18/78)

〈 18화 〉 대전

* * *

[프라. 언제부터 싸움에 흥미를 들인 거야?]

[이봐. 그냥 싸움이 아니라 격투기라고.]

내가 이 길로 가게 된 계기라..

날 깜둥이라 부르던 놈들의 얼굴을 찌그러뜨렸을 때 날 괴롭혔던 놈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는 희열 그리고 승리에 대한 쾌감이 날 격투에 대한 길로 이끌었지.

약한 사람을 괴롭히고 싶다는 것이 아니다.

강한 상대를 꺾었다는 그 승리욕이 좋은 것이지.

북처럼 쿵쿵 울려 퍼지는 심장의 고동 소리 그리고 얼굴을 후려치기 위해 꽉 쥐어진 주먹.

마치 짐승처럼 약점을 물어뜯기 위해 거리를 재며 서로의 눈을 노려보며 상대를 끝장내고 싶어 죽겠다는 그 눈빛이 나에게 고양감을 가져왔었다.

서로를 끝장내라고 악을 쓰는 관중들의 고함 유효타를 허용해 흐릿한 정신 속에서도 호적수에게 한 방 먹여 혈관을 타고 흐르는 아드레날린.

난 그렇게 격투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나의 세계가 영원할 줄 알았다.

챔피언 전에서 상대와 뒤엉켜 넘어지면서 팔이 꺾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정점의 자리까지 올라갔지만 결국 정점이 되지 못하고 무너졌다.

격투기 선수로서 치명적인 부상으로 좌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진 않았다.

크라이 선수로 다시 시작했으니까.

VR에선 팔의 부상은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예전의 위상을 찾는 것이 그리 힘들진 않았다.

“그냥 싸움 자체가 좋았지.”

[완전 파이터군!]

[이번 대회 응원하고 있어.]

[이번에 테일리? 맞나? 밸보걸이 더 익숙한데 어쨌든 크라이를 시작했다고 하더라.]

[맞아! 그녀의 움직임은 정말 환상적이야. 옛날 스피의 츈리가 현실에 나온 것 같아.]

[밸보걸에게 관심이 있다고 했잖아.]

“아! 밸보걸! 레딧즈에서 봤는데 정말 멋진 움직임이었지.”

외팔로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에 흥미가 갔었다.

사실 그 흥미에 외모도 많은 지분을 차지하긴 했지.

어떤 점에선 존경스럽기도 했다.

팔에 상처를 입었을 때 격투는커녕 일상생활도 불편하고 힘들었으니까.

부상 때문에 좌절하고 불평하기도 했었다.

내가 외팔이가 됐다고 생각해보면 상상만으로 끔찍했다.

그런 그녀가 크라이를?

한번 만나보고 싶어졌다.

****

와 키 진짜 크다.

프라시스라는 사람은 덩치가 몹시 컸다.

어찌나 컸는지 나도 여자 중에서 키가 큰 편임에도 불구하고 나랑 머리 하나 차이는 거뜬하게 넘길 지경이다.

이 정도 체급 차이면 힘들지 않을까?

[키 진짜 크다]

[때렸는데 흠집도 안 나는 거 아니냐 ㅋㅋㅋㅋ]

[ㄴㄴ 어차피 캐릭터 체력이랑 힘에 따라가는 거라 근데 본인 설정이면 좀 다를 순 있긴 함]

험상궂은 얼굴에 살짝 걱정했지만 프라시스는 매우 신사적인 태도로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그의 입에 나온 인사말은 분명 한국어였다.

“안녕하세요. 당신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아…그..그렇군요.. 한국말 잘하시네요…”

“요즘 번역 프로그램 좋습니다! 외국인이어도 서로 대화 어렵지 않아요.”

“아하…”

“프라 그렇게 불러주면 좋다.”

“전... 어… 예지 라고 불러주세요…”

요즘 외국인들이 번역 모드 좀 켜라고 성화라 나도 사긴 사야 하지만… 감이 잡히지 않는 걸… 나중에 냥지한테 물어볼까.

“한판 가능하겠습니까?”

“아..네.”

엄청 진지해진 표정으로 내 앞에 서는 프라시스.

프로라고 하니 긴장이 좀 많이 됐지만, 기대치가 한껏 높아진 시청자들을 실망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3

갑자기 위에 숫자와 동시에 체력 바가 떴다.

2

1

잔뜩 웅크린 프라의 몸의 근육이 폭발적으로 부풀어 오르면서 나에게 원투 펀치로 팔을 뻗어왔다.

가볍게 견제를 지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한방이라도 허용하면 치명적으로 보이는 펀치였다.

다행히 나의 동체 시력이 빛을 발하는 듯 느리게 다가오는 주먹을 몸을 숙여 피하면서 프라의 얼굴을 힘껏 강타했다.

다만 프라의 체력이 높은 건지 아니면 사람들이 말하던 보정인지 프라의 체력 바가 조금 깎이면서 그의 몸이 뒤로 주춤했다.

재미있다.

물러서는 프라에게 백열각 그러니까 수십 번의 발차기를 빠르게 찼다.

과연 프로 선수라서 그런지 급소를 가리며 성공적으로 가드를 해내는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프라가 눈을 번뜩이며 발을 잡아채려고 손을 뻗지만 걷어차던 다리를 회수해 자세를 잡았다.

서로 말없이 거리만을 재며 노려본다.

내 체력은 조금도 깎이지 않았지만 프라의 체력은 4분에 1이 깎여 있었다.

주먹도 써보고 싶은데 프라의 리치가 훨씬 길어서 그런가 쉽지 않네.

한참 눈치를 보는 동안 먼저 움직인 것은 프라였다.

어깨를 보니 스트레이트 펀치를 때리려는 듯 어깨를 뒤로 젖히려고 하고 있었다.

내 얼굴로 뻗어지려는 주먹을 보고 피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몸을 숙이며 꽉 쥐어진 손을 풀어내 무릎 쪽으로 손을 뻗어왔다.

그라운드 스킬?

깡충 뛰어올라 그의 머리를 양 허벅지에 끼운 뒤 내 몸을 비틀어 회전하며 바닥에 그의 머리를 찍어버렸다.

일명 행복 잡기다.

사실 격투기나 그런 기술들을 잘 몰라서 그냥 격겜 기술이나 써보고 있는데 생각보다 잘 먹혔다.

워낙 빨라서 그런가?

몸에 느껴지는 진동을 무시하며 벌떡 일어나려고 했지만 프라의 주먹이 내 복부에 꽂히며 몸이 붕 떠올랐다.

큰 공격을 성공시켰다는 희열 때문에 그가 주먹을 뻗은 줄도 몰랐다.

뛰어오는 프라와 난타전을 시작하고 내가 프라의 턱에 어퍼컷을 날리며 끝이 났다.

내 체력이 조금 깎이긴 했지만, 압도적인 승리였다.

이마에 송골송골 나 있는 땀을 손으로 훔쳐냈다.

이런 것도 구현했어?

[컷!]

[헤으응… 눈나…]

[스토커한테 시달리는 예지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맞아 죽을 스토커를 걱정해야…]

[와 진짜 개잘한다;;]

[예지야 프로하자!]

[ㄹㅇ]

[예지 펀치! 예지 펀치! 예지 펀치! 예지 펀치!]

­돈이좋아님의 200000원 후원!

대단해! 대단해! 대단해! 대단해!

이 정도면 나도 자랑 좀 해도 되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며 살짝 우쭐해진 표정으로 살짝 멋진 자세를 잡아보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귀여움 MAX]

[기껏 폼 잡아서 멋진 이미지 만들어놨더니 바로 우르르 무너뜨림 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신감이 생겼어…]

“얘들아… 나 멋있지 않아…?”

[응 아니야]

[귀여움 ㅋㅋ]

시무룩해져서 아직도 누워있는 프라나 일으켜주기로 했다.

쓰러진 프라는 숨을 가다듬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넋이 나간 얼굴로 하늘을 바라봤다.

일으켜 세워줘야겠지..?

그에게 손을 뻗으니 손을 맞잡고 벌떡 일어나 그는 잔뜩 흥분하며 말을 두다다 쏟아냈다.

아까의 한국말과는 다른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가 나에게 쏟아진다.

“어… 노 잉글리쉬…! 쏘리..!”

“오.. 실례. 너무 흥분해서 번역 프로그램 내 말 따라잡지 못했다.”

“아…. 그렇군요..”

“예지 실력 너무 대단하다. 스타가 될 수 있다. 당신 나의 프로 팀에 초대해요!”

“어… 아직은 생각이 없네요.”

“그런데 아까의 기술은 무슨 캐릭터? 난 그런 기술 본 적이 없다.”

“그냥 격투 게임에서 보던 기술 해본 거라.…”

“믿을 수 없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지만 대화를 따라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나중에 대회 연습 좀 도와 달라고 말하길래 알았다고 대답하고 보내버렸다.

[예지! 예지! 예지! 예지! 예지!]

[엄마 난 커서 예지가 될래요! 엄마 난 커서 예지가 될래요! 엄마 난 커서 예지가 될래요! 엄마 난 커서 예지가 될래요! 엄마 난 커서 예지가 될래요! 엄마 난 커서 예지가 될래요!]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예지는 멋있다. 그녀 타고난 파이터]

시청자들의 주접이 부끄러워져 내 얼굴이 화르르 타오르듯 붉어졌다.

볼에 손을 올려보니 볼이 상당히 따뜻했다.

“주접…멈춰…!”

[안 멈춰! 안 멈춰! 안 멈춰!]

[내 꿈은 서예지!]

[ㅋㅋㅋㅋㅋㅋㅋㅋ]

[얼굴에 감정이 진짜 잘 드러난다 ㅋㅋ]

[계란도 굽겠다]

안 되겠다 싶어서 내일 크라이 랭크 모드 돌리겠다고 약속하고 저스트 채팅으로 돌려버렸다.

VR 기기를 끄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거 어디서 배움?]

“그냥 츈리랑 셀미한테 배웠어...”

[ㅋㅋㅋㅋㅋ]

[2D 스승 ㄷㄷ]

[평소에도 운동 많이 하시는가 봄?]

“운동…? 아.. 예전에 많이 하긴 했지.”

안 했다고 말하기에는 말도 안 되는 몸이라서 대충 둘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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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손은 잘 안 쓰시네요.

“프라 덩치가 크고… 팔이 길어서 리치 싸움이… 좀 힘들 것 같아서…”

[알았…어요…]

[말…그만…떠세요….]

[말만 들어도 찐 그 자체인데 싸움은 그렇게 잘하네 ㅋㅋㅋ]

“놀리지 마…”

[ㅇ…ㅋ…]

[ㅇㅇ….]

­노래정발좀요님의 1,000원 후원!

노래 폰에 넣고 듣고 싶은데 음원 출시 제발…

“어… 생각 좀 해볼게요…”

[이러고 또 까먹는다]

[ㄹㅇㅋㅋ]

[안 하려는 이유는 또 뭐야]

[찐따 티 그만 내 서예지!]

[자신 없어서 그럴 확률 100%]

[기만 ㄷㄷ]

“생각 좀 해본다니까…”

방송을 끝내고 의수를 불러봤다.

잠깐 시간을 보니 냥지가 방종할 시간이 다 되어가긴 하지만 마음 놓고 말하기 괜찮을 것 같았다.

“의수야.”

[부르는 이름 기분이 좋지 않음. 의수? 멋이 없음]

“뭘 멋까지 따지고 그래… 나 운동도 안 하고 밥 먹고 방송만 하는데 왜 살이 안 쪄?”

살도 안 찌고 근육도 그대로 피부 관리를 안 하고 있음에도 윤기가 났다.

말도 안 되는 현상이지.

[몸에 혈관보다 작은 나노 봇들이 항상 근육과 지방 그리고 혈액을 관리. 몸에 이상이 생길 리가 없음.]

아 그거 참 편하네.

의수가 대화를 받아주는 경우가 별로 없는 만큼 궁금했던 점을 전부 물어봤다.

“예전의 나는 죽고 싶었을까?”

[묻는 본인이 잘 알 텐데 질문의 의도 파악하지 못함.]

“예전 일들이 기억이 잘 안 나서… 그런데 내 생각을 읽을 수 있지 않았어?”

[뇌파로 대화할 때만 읽었음. 사용자의 생각 계속 알아야 할 필요 없음.]

“그렇구나.”

[예전의 사용자 항상 우울했음. 심문 이후 제정신을 유지 못 하거나 죽고 싶어 했었음. 높은 확률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즉 PTSD가 의심됨.]

“그랬구나.”

[거듭 추천하지만, 지금의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좋음]

“그럴 생각이야. 친구들도 너무 좋고…”

[ai의 판단하에 과거에 대한 대화가 좋지 않음을 파악. 중지.]

스스로 꺼져버렸다.

참 까탈스러운 녀석이야.

대화가 끝나자마자 갑자기 냥지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 말을 두다다다 쏟아냈다.

생각보다 방송이 일찍 끝났나..?

야뭉이도 한쪽 구석에 자리 잡아 드러누웠다.

이런 평안한 일상이 너무 만족스러웠다.

서로 이불을 덮어 오늘의 방송에 대해 말하면서 밤을 보냈다.

<예지 펀치!="" 예지=""/>

프라시스를 꺾어버린 예지의 매콤달콤 주먹맛 좀 봐라.

ㅇㅇ : 말도 안 되게 잘하더라 ㅇㅇ

새싹 : 예지 옛날에 격투 게임 좀 많이 해본 듯 ㅋㅋ 근데 그게 현실에서 가능할 줄 몰랐다.

­코코단 : 현실이 아닌데?

­새싹 : 현실에서도 100% 가능함 ㅋㅋㅋ

­스피 : 셀미랑 츈리가 스승인데 잘해야지 ㅋㅋ

<나도 행복="" 잡기="" 해줘!!!!!!!!=""/>

제발....

예지펀치 : 전 웨딩 룩으로 부탁드립니다.

핫산 : 나도 제발...

크라운쿠키 : 저격 간다.

우와굿 : ㄹㅇ 탱탱한 허벅지 봤냐

<왜 한판만="" 하고="" 끄냐="" ㅡㅡ=""/>

프라시스 압도적으로 이겨서 뽕 차오르는 찰나에 바로 꺼버리네 ㅋㅋㅋㅋ

예지펀치 : ㄹㅇㅋㅋ 뽕 차올라서 기대하고 있는데 끄고 저스트 채팅해 버림 ㅋㅋㅋ

­예징 : 내일 한다잖아~

<오늘 엄청="" 귀엽더라="" ㅋㅋㅋ=""/>

자신감 좀 생겼는지 입꼬리 올라감 ㅋㅋㅋㅋ

이 우쭐한 표정을 봐라

루왁 : ㄹㅇㅋㅋㅋㅋ 오늘 처음 봤음 ㅋㅋㅋ

이이잉 : 그래서 칭찬해줬더니 얼굴 터지는 줄 ㅋㅋㅋ

­아뇨뚱인데요 : 볼에 손대 보는 거 심쿵사 할 뻔

­흑우단 : 바로 시무룩해졌잖아 ㅋㅋ

­냥냥펀치 : 아니 칭찬해주면 부끄러워하고 그렇다고 안 해주면 시무룩해지고 어쩌라는 거 ㅋㅋㅋㅋㅋㅋ

<음원 낼="" 때까지="" 숨="" 참음!=""/>

흡!

루왁 : 유언입니다.

예지단 : 라고 적혀있는데요?

슈.슉.슉 : 이렇게 갈 사람이 아니었는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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