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나 배우?
* * *
의수가 3일이나 버티면서 불안해지긴 했지만 결국 해결하고 우린 공항으로 모이기로 했다.
오늘 갈 사람은 나와 정란, 예화, 냥지, 쥬벳트, 수양이, 유초야 이렇게 모이기로 했다.
듣기론 임뿌랑 정우?
그 사람들도 오기로 했는데 갑자기 사정상 오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 미국은 쌀쌀하다고 들어서 나와 친구들은 긴 소매 옷을 입고 왔는데 다른 사람들은 괜찮으려나?
초야 언…니라고 해야겠지..?
언니라는 말을 하기 조금 꺼려지지만 익숙해지려면 계속 언니라고 생각해야겠다.
“언니~”
“다들 먼저 왔네?”
“일찍 출발해서… 언니 근데 춥겠다!”
“응? 안 추운데?”
“미국은 지금 춥다고 하더라고요!”
“진짜? 일단 가보지 뭐.”
친구들과 초야님이 대화를 하는 동안 난 크나큰 고민에 빠졌다.
그래도 언니인데 먼저 가서 아는 척을 해야…?
대화 중에 껴도 되는 걸까?
“초야님…”
“갑자기 왜…! 왜 초기화가 된 거야!”
“네…?”
“허어..! 왜 언니에서 님이 된 거야! 왜 갑자기 우리 사이가 멀어진 거냐고!”
매우 충격을 받은 얼굴로 날 보길래 어쩔 수 없이 원하는 호칭을 불러주었다.
“어..언니..”
“헤…”
아직 언니..라고 부를 마음의 준비가 덜 됐는데… 거리감 없는 태도로 훅 들어온단 말이지.
초야 언니는 내 왼팔을 붙잡고 팔짱을 껴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부끄러운데요..?
슬쩍 팔을 빼보려 했지만 모른 척 꽉 붙잡고 놓아 주질 않았다.
친구들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지만 내 남은 오른팔을 보며 서로의 눈치를 살펴… 도대체 왜?
슬며시 냥지가 내게 팔짱을 끼자 예화이랑 정란이는 투덜거리며 서로의 팔짱을 꼈다.
“난 진짜 오랜만에 봤는데 이건 에바지~”
“난 좋아서 끼는 줄 알아! 멍청아!”
“예화은 항상 이런 식이야!”
의자에 앉아 우린 쥬벳트와 수양이라는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수다를 떨었다.
“예지야. 우리 진짜 오랜만이다.”
“아…네.. 그렇죠..?”
“오늘 초대해줘서 고마워. 네 덕분에 갈 수 있는 거라면서?”
“언니 나도 불렀는데?”
“너도 고마워. 근데 예지라면 아마 나도 초대해주지 않았을까?”
음, 죄송하지만 초야 언니를 아예 잊고 있었습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이야기하는 동안 수양이라는 사람이 도착했다.
정란이처럼 키가 매우 작았는데 들어보니 말투가 좀 특이하고 귀여운 것 같네.
“나 왔어! 언니 저 왔어요.”
“오! 왔어? 키 큰 거 아냐?”
“호오! 진짜..? 음음, 맞지!”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초대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 직접 보니까 연예인 같으세요…!”
“감사합니다… 수양님도 예쁘시네요…”
“정말요? 아이참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애.”
이제 슬슬 쥬벳트라는 사람도 도착해야 할 시간인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어, 왔다. 여기야!”
“아니… 참참아! 어제 자는데 왜 자꾸 전화를 걸어. 뒤질래?”
“까먹지 말라고 말해주려고 그랬지~”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쥬벳트라고 합니다.”
“너 웬일이야? 왜 그렇게 공손해?”
“뭘 웬일이야! 처음 보는 사람한테 야! 이러냐?”
조용한 사람끼리 모여도 7명이면 시끄러울 텐데 스트리머들이 7명 모이니까 엄청 시끌벅적하네.
어쨌든 다 모이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가 출발하고 알게 된 사실인데 우린 퍼스트 클래스였다.
우리가 예약한 게 아니라 밸보쪽에서 티켓을 끊어주어서 몰랐는데 다들 퍼스트 클래스는 처음이라고 다들 신이 났다.
퍼스트 클래스는 자리도 10석 정도에 불과했고 심지어 퍼스트 클래스에 앉은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어쩐지 수하물을 엄청 공손하게 받더라.
다들 내 덕을 본다며 나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아니… 난 몰랐지…
두 자리 씩 붙어있길래 정란이의 강력한 주장으로 나와 정란이가 같이 앉았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같이 앉아서 가고 싶다니 다들 납득한 모양.
물론 예화는 납득하지 못했지만 냥지가 데려가니 조용히 따라갔다.
“와! 이것 봐. TV도 있어!”
“그..그렇네…”
정란이가 살짝 흥분한 얼굴로 내 귀에 속삭였고
사실 나도 이런 건 처음이라 살짝 흥분하긴 했다.
자리도 엄청 편안했고 식사도 진짜 훌륭했다.
나중에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도착하고 행사장으로 향하는 리무진같이 생긴 차를 타고 갔다.
밸보에서 보냈다길래 신중하게 확인을 해보고 탔다.
아니 근데 왜 이렇게 잘해주지?
밸보에서 초청한 사람들 전부에 이렇게 해주는 건 아닐 거 아냐.
아닌가? 돈이 엄청 많아서 그냥 푼 돈인 걸까…
수양님이 나와 친해지려는 듯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을 받아주다 보니 어느새 서로 말을 트고 말았다.
자신은 게임을 너무 못해서 고민이 있다느니 방송 감이 없어서 재미가 없는데 사람들이 많이 와서 봐준다느니 고민거리를 털어놓았다.
처음 본 사람한테 말할 고민이 아닌 거 같은데 편하게 여겨졌나 보다.
근데 지난번에 시청자를 봤을 때는 사람이 꽤 많았는데 그러면 재미있어서 많이 오는 거 아닌가? 시청자들은 정말 냉정해서 재미없으면 그렇게 많이 모이지 않는다.
애초에 내 방송도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고… 게임을 잘해서 그런가?
하여튼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많이 몰리는 거겠지.
하여튼 그런 식으로 말하니 눈빛을 초롱초롱 하게 빛내며 나를 보길래 부담스러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예상대로 초야 언니가 추워하길래 팔짱을 풀어 재킷을 벗어 언니의 어깨에 걸쳐주니 또다시 유난을 떨며 나에게 착 달라붙었다.
“허어어어어! 예지 너무 멋져! 반하겠어!”
“언니..!”
냥지가 말리며 눈치를 줬다.
도착했다길래 운전사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일행과 같이 내렸다.
문 앞에 가서 경비원? 가드? 그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하기 전에 그냥 들여보내 주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이제 막 진행을 시작했는지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 거대하고 통통한 몸을 이끌고 나에게 다가오는데… 이 아저씨 수염이 장난이 아니다.
“혹시… 서..예지씨..?”
“네. 부르기 어렵다면… 테일리라고 불러도 돼요…”
방송 닉네임을 불러주었다.
아마 한국 이름보다는 부르기 편하지 않을까?
“오, 테일리 서! 반갑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항상 만나고 싶었습니다!”
“어…왜죠?”
“사실 테일리가 쓰러지고 예전의 안전성 문제가 다시 불거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측 문제는 아니지만, 우리 제품으로 쓰러지셨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지요. 그래서 사과하고 문제를 고치겠다고 말했습니다.”
“밸보의 잘못은… 아닌 것 같은데…”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피해를 봤다는 거죠. 정말 죄송합니다. 테일리. 사과를 받아주시겠습니까?”
내 일행들은 나와 케이브의 대화에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내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다들 번역기 같은 거 안 들고 왔나?
어? 근데 나랑 케이브는 어떻게 대화가 이렇게 잘되지?
[사용자가 수면 상태일 때 언어를 반복 학습.]
대단해!
“잘못하신 게 없어서 뭐… 일단 알겠습니다…”
케이브는 그의 몸 만큼이나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알겠다고 끄덕인다.
근데 이 정도 비만이면 몸에 큰 무리가 오지 않을까…?
아, 맞다!
감사 인사!
“아… 오늘 케이브 덕분에… 너무 편안하게 올 수 있었어요…”
“귀중한 손님한테 그 정도는 당연하죠. 게다가 저희 측의 실수가 있었지 않습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자주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케이브가 넉살 좋게 웃으며 받아쳤다.
“제 볼일은 끝났고 이제 회사의 입장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그건 여기 크라이 게임 디자이너 닉 케이슨과 이야기해보시죠. 아, 친구 분들은 제가 귀빈 석에 안내하겠습니다.”
내가 먼저 가라고 손짓하니 다들 우르르 케이든을 뒤따라갔다.
무뚝뚝한 얼굴의 대머리 남자가 나에게 악수를 청한다.
얼떨결에 의수로 악수하니 흥분한 기색으로 내 의수를 쳐다본다.
음… 독특한 사람이 많네.
“닉 케이슨입니다.”
“테일리 서라고 합니다..”
“바로 본론부터 넘어가도 되겠습니까? 제가 말을 돌려 하는 버릇을 두지 않아서.”
“아…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크라이 신 캐릭터로 테일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 비현실적인 체술과 기술들을 감명 깊게 봤습니다. 성우 그리고 모션 캡처 배우로서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제가… 한국에 살아서… 시간이 될까 싶은데요… 체류 기간이…”
“사실 한국 지부도 있어서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가 좀 불편해지겠지만 감수해야죠. 어떻습니까?”
“어… 하게 해주신다면 감사히…”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내 손을 꽉 잡으며 힘차게 악수를 하고는 가버렸다.
어… 길은…?
다행히 직원을 붙여줬는지 안내에 따라가 일행과 합류할 수 있었다.
케이브의 옆에 통역사로 보이는 사람이 일행과 케이브 사이에서 대화를 열심히 주고받고 있었다.
제일 구석에 앉아있는 수양이의 옆에 끼여 들어가 앉았다.
“왔어요?”
“네… 무슨 대화를…?”
“오늘 깜짝 놀랄만한 발표도 같이한다고 하던데요? 그거 질문 같이하는 중!”
“우리 말 놓을까요…?”
다 말 놓고 대화 중인데 우리만 존댓말을 하려니 어색했다.
아, 쥬벳트님도 그렇지? 나중에 한 번 말 걸어봐야겠다.
내 제안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웃으며 받아주고 우린 말을 텄다.
2층의 VIP석에 앉아 밑을 내려보니 1층의 관객 석에는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보였다.
이렇게 많이 모이니 뭔가 무서운데… 심장이 약간 빠르게 쿵쿵 뛰었다.
훅… 훅….
조금 답답한데…
“저기… 괜찮아..?”
“어…? 응…”
말을 거는 수양이의 얼굴을 보니 아까의 답답함이 좀 나아졌다.
왜 답답했을까…?
숨을 몰아쉬며 한숨을 쉬었다.
수양이가 내 등을 톡톡 두드리니 옆에 있던 초야 언니가 걱정됐는지 나의 안색을 살피며 내 양 볼을 붙잡고 눈을 마주친다.
“괜찮아? 지난번처럼 또 그래? 안색이 창백한데?”
“좀… 좀… 괜찮아졌어요…”
잠깐 둘과 대화하니 울렁거리고 답답했던 속이 편안해지면서 주변의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여유를 되찾았다.
아직 내 친구들은 주변이 시끄럽고 자리가 좀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내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눈치였다.
그나마 다행이네.
“괜찮아요.. 언니… 수양아.. 고마워..”
사람이 많아서 그렇다고 말하고 둘을 안심 시켜주었다.
안심이 되지 않은 듯한 눈치였지만 발표자만 보면 괜찮다고 말하니 넘어가 주었다.
다행히 곧 사회자가 나와서 진행하면서 해결되었다.
사회자 얼굴이랑 화면만 보면 되는 거잖아.
아직은 중요하지 않은 말들을 하기에 수양이와 초야 언니와 무슨 발표를 할지 추측하면서 잡담을 해봤다.
“자, 모두가 기다리시던 밸보의 신작 쇼크워를 소개합니다! 여태까지 밸보의 게임과는 다른 장르인 5:5 AOS 게임이죠. 그동안 AOS 마니아들은 VR 게임 대신 PC로 해야 했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질 겁니다..!”
트레일러를 공개하니 구경하던 우리 일행은 입을 떡 벌리며 감탄밖에 할 수 없었다.
불을 뿜으며 지나가는 드래곤 그리고 거대한 기계 거인이 증기를 뿜으며 팔을 휘두르며 싸우는 모습, 검은 복장의 마법사가 손을 휘두르자 기괴한 괴물이 쏟아지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나타나며 영상은 끝이 났다.
너무 잡탕이라 어딘가의 시공의 폭풍이 생각나 걱정이 많이 되긴 했지만 엄청난 이펙트와 압도적인 기계 거인의 존재감이 나의 게이머의 영혼에 불을 질러버렸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지 엄청난 환호 소리와 박수 소리가 행사장에 크게 울려 퍼졌다.
“여태 이런 판타지를 만들지 않았던 이유는 다른 게임과는 달리 개발이 엄청나게 힘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도중에 프로젝트가 엎어질 뻔했지만 간신히 이어서 만들었죠. 케이브?”
케이브는 여기 있지 않나?
옆을 돌아보니 어느새 케이브는 사회자의 옆에 서 있었다.
“여태 신작을 기다려주신 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사실 5년 전에 유출되었을 때 살짝 긴장하긴 했었지만 결국 무사히 출시하게 되었군요.”
“어떤 게임입니까?”
“그건 비밀로 하고 싶습니다.”
갑작스러운 케이브의 말에 관객들이 웅성웅성 떠들기 시작했다.
“굳이 제가 말할 필요 없이 지금 즐겨보시면 되니까요. 모두가 즐길 수 있을 만큼 준비해두었으니 저기 캡슐 안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 전에 몇 가지 질문을 받아볼까요?”
내 옆에 검은 정장을 멋들어지게 입은 사람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몸의 근육과 걸어오면서도 흐트러짐 하나 없는 걸음걸이를 봤을 때 경호원이 아닐까 싶은데 우릴 경호하는 사람일까?
잘 살펴보니 10명쯤 우리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VIP께선 따로 방이 준비되어 있으니 일행 분들과 저희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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