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22화 (22/78)

〈 22화 〉 어?

* * *

프라는 지팡이를 들어 급소에 날아오는 단검은 튕겨내었지만 결국 나머지 4개의 단검을 몸에 허용하고 말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내 몸이 멋대로 움직였지?

의수인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안녕…프라… 왠 마법사야..?”

“근접 캐릭터면 너무 시시할 것 같아서 골랐지. 그런데 예지랑 매칭 될 줄 예상 못 했다.”

저격이라고는 했지만, 같이 매칭이 잡힐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가 보다.

하기야 오늘 테스트에 참여한 스트리머들을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하지.

포탑을 끼고 멀리서 화살을 푝푝 쏘는 궁수는 무시하고 프라에게 달려가 단검을 휘둘렀다.

마법사라 그런지 프라는 저항도 못 하고 쓰러졌고 게임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수염 난 궁수가 그동안 몇 번이고 나한테 죽어주긴 했지만… 아, 궁극기를 배우는 조건은 킬 이었다. 이러면 밸런스 문제 좀 심하지 않나 싶지만 밸보에서 알아서 할 문제지.

아니면 캐릭터마다 궁극기를 배우는 조건이 다르다던가?

튜토리얼이 있는데 내가 건너뛴 거겠지..?

궁극기

마구스 콘템프투스

마법을 흡수하는 재질로 만들어진 단검은 마법을 흡수합니다.

시야 내의 적은 스킬을 사용할 때마다 20% 데미지를 돌려받습니다.

쿨타임 3초

패시브 형태의 궁극기였다.

이 캐릭터의 컨셉은 정말 기괴하구나.

큰 소리와 동시에 화살표가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일단 따라가야겠지?

화살표가 가리키는 길을 따라 살랑살랑 걸어가니 초야 언니와 수양이가 모습을 드러내길래 손을 살짝 흔들어 인사했다.

“안녕…”

“앗! 예지다! 나 킬 엄청 많이 먹었다!”

“이 캐릭 너무 어렵따…”

다 같이 모여 목적지에 도착하니 트레일러에서 봤던 기계 거인이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며 일어나고 있었는데, 어깨에 달린 거대한 파이프에서 증기를 치익 내뿜으며 덜컹거리며 움직였다.

몸 곳곳에서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와… 겜성…]

[기계 진영이 감성이 지리는 듯 ㅋㅋㅋ]

[와! 스팀 펑크 아시는구나!]

[난 아까 자연 진영 쪽 방송 보니까 맵 이쁘던데]

우리 팀이 다 합류하니 건너편의 상대측은 한 명이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네 명이 모여 자리를 잡고 있었다.

꼭 한 명쯤은 그런 애들이 있지.

남들 다 모여서 한타 준비하는데 혼자서 RPG를 한다든지 그런 사람 말이다.

먼저 달려든 건 우리 편이었다.

아까 봤던 멸치처럼 말랐던 몸이 아닌 근육질 가득한 몸으로 달려가 바닥을 쿵 찍으니 상대 쪽의 탱커로 보이는 두 명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동안 내가 주문을 외우고 있는 듯한 포즈의 프라의 어깨에 단검을 던지며 달려들었지만 프라의 그림자에서 누군가 튀어나와 나를 저지했다.

4명이었던 것이 아니라 한 명은 숨어있었네.

휘둘러오는 검은 칼날을 고개를 숙여 피한 뒤 덮쳐오는 그림자 인간을 세 번 베어 넘기고 나에게 날아오는 화염구를 망토로 덮어 흘려보냈다.

뒤에서 주먹을 날리는 남자의 배를 걷어차 거리를 벌리고 주변을 살펴보니 나는 어느새 적진의 중앙에 홀로 고립되어 있었다.

아까 우리 팀 방패 남자는…?

초야은 자신에게 손톱을 휘두르는 괴물을 보며 흐악 꽃구라는 이상한 비명을 지르며 정령들을 다급하게 보내면서 도망가고 있었고 수양이는… 어디 갔지?

하여튼 방패 남자와 대검을 든 뚱뚱한 남자는 초야을 도와 괴물을 떼어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적팀에서 제일 잘하는 사람인 걸까?

프라가 근접 계열을 골랐다면 여기서 제일 골치 아픈 상대가 되었겠지만 프라는 몸을 쓰는 것 말고는 재능이 그다지 없는지 나에게 투척 당한 단검들이 몸에 수북이 박혀 쓰러져 있었다.

내 이름을 연신 부르며 멈추라고 했었지만, 친구 사이라도 게임에 봐주기가 어디 있는가?

쓰러져있는 프라를 보니 옛날에 해적 룰렛… 통 아저씨 장난감이 생각나네.

내 체력은 아직 60% 정도로 여유 있어 보였고 나를 포위하고 있는 셋은 나를 합공하고 있지만, 유효타가 있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 게임이 절대 피할 수 없는 타겟팅이라는 개념이 있는 모양인지 주술사처럼 보이는 누군가가 내 피를 지속해서 깎아 먹고 있는 게 문제였다.

내가 고른 캐릭터가 스탯도 최악인지 마법사인 프라를 죽이는 데도 오래 걸렸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번엔 좀 힘들지도…?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에 거대한 손이 주술사와 그림자 격투가를 쿵 하고 찍어 눌러버렸다.

뭐야…?

“나 이 게임에 재능이 있을지도..? 음음.”

수양이의 목소리가 기계 거인에게서 울려 퍼졌다.

어떻게 조종하는 거야…?

점령하고 타는 게 아니라 그냥 먼저 탄 놈이 장땡인 건가?

수양이가 게임을 잘하는 건가…?

“야, 날 죽이면 어떻게 해! 아하하하하하”

“처음이라서 그래… 그래도 지금은 잘 쓰는데!”

뒤쪽을 보니 우리 팀과 아까의 괴물이 사이좋게 나란히 쓰러져 있었던 게 눈에 보였다.

설마 도와준다고 같이 찍어 눌러버렸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팀킬도 되나 봄? ㅋㅋㅋ]

[와! 수양이 한 번에 쿼드라 킬! ㅋㅋㅋㅋㅋ]

날 도와주겠다고 나와 그림자 검사에게 주먹을 쿵 하고 찍어오는 손을 피했다.

결국, 게임은 끝이 났다.

한판마다 플레이 타임을 짧게 설정했는지 그 기계 거인으로 한타를 이기고 스노우 볼을 굴려 간단히 이겨버렸다.

상대도 한타를 지고 할 생각이 없어졌는지 대충 놀다가 끝나기도 했지.

사회자가 테스트 단계라서 밸런스는 양해해달라고 말하고, 농사하는 힐링 게임도 같이 낼 예정이라고 홍보를 하며 끝이 났다.

다들 재미있게 즐겼는지 환호성이 시끌벅적하게 울려 퍼졌다.

친구들 얼굴을 보니 다들 대만족인지 살짝 흥분한 얼굴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예지야! 고마워!”

“이번에 재미있었다! 인정!”

“비령이 웬일로 도움이 되네?”

우리는 다시 퍼스트 석에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들 피곤한지 곤히 잠들어 있었고 수양이도 오늘 자기가 이끌었던 게임에 대해 나랑 이야기하다가 곤히 잠들었다.

방금까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꾸벅꾸벅 졸고 있었기에 상관없지만…

나도 한숨 자볼까?

방금 밥을 먹어서 그런지 노곤해진다.

아…..

****

오늘은 꽤 재미있는 하루였다.

새로 사귄 친구랑 꽤 마음이 잘 맞는지 금세 말이 텄다는 점도 좋았고 오늘의 게임도 평소의 자신과는 다르게 캐리…라고 부를 만한 게임이 아닐까 속으로 생각해보고 있었다.

시청자들이 팀킬이라고 놀리긴 했지만 사실 다들 알고 있지 않을까!

에헴!

예지가 오늘 갑자기 안색이 창백해지며 숨을 헐떡이길래 걱정되긴 했지만,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자세를 보니 괜찮아진 모양이다.

사람이 많이 몰리니 그러던 것 같은데 대인기피증이나 공황 장애일까?

옆에서 졸고 있는 사람을 보니 괜히 나도 모르게 졸려진다.

“..ㄲ…”

무언가 희미하게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와서 살짝 깨버렸다.

무슨 소리지…?

하품을 하며 눈을 비비고 옆을 보니 예지가 고개를 숙이고 어떤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통화하고 있는 걸까?

귀나 손을 살펴봤지만, 이어폰도 스마트폰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예지가 중얼거리고 있을 뿐.

“나..?”

“왜 그래? 잠이 안 와?”

내 말에 중얼거림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 채 멈춰있었다.

뭐지?

정상적인 반응은 아닌데?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가만히 멈춰있던 예지가 갑자기 고개를 나에게 홱 돌리며 눈을 마주쳐온다.

와... 진짜 예쁘긴 하구나.

멍하니 나를 보고 있는 모습도 한 폭의 그림 같네.

그런데 초점 없는 멍한 눈과 다물지 못하고 헤 벌리고 있는 입이 눈에 띄었는데, 아무리 봐도 제정신으로 보이지는…. 괜찮은 걸까?

“ㄴ…ㅜ..?”

“응?”

“누구?”

아직 잠이 덜 깬 거였어?

잘 못 일어나는 사람들이 간혹 이런 모습을 보이고는 했는데 그런 부류였구나.

안도의 한숨을 푹 쉬며 예지를 다독이며 다시 재웠다.

“오늘 많이 피곤했구나. 다시 자자.”

“응…? 응…”

잠꼬대나 잠을 덜 깼다고 보기에는 조금 꺼림칙한 느낌인데…

다행히도 예지는 내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고 누웠다.

뭐…괜찮겠지…?

나보다 나이가 많을 텐데 동생을 사귄 기분이란 말이야.

약간 지켜주고 싶고 실수할까 봐 항상 불안한 느낌?

실제로는 반대겠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잠들어 있었다.

나도 다시 눈 좀 붙일까.

날이 어두워질 때에 우리는 도착했다.

다들 흩어지고 냥지와 예지만 멍하니 좌석에 앉아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자매처럼 똑 닮은 자세로 앉아있었다.

예지는 뭔가 좀 이상하긴 했는데… 괜찮겠지?

초야 언니와 내가 걱정하니 냥지는 괜찮다며 우리를 보내고 예지 손을 붙잡으며 차를 타버렸다.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것을 보니 아직 정신을 차리고 있는 듯 보였다.

초야 언니도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서로 작별 인사를 하고 정란이를 데리고 떠났다.

정란이도 잠이 덜 깼는지 정신없이 초야 언니에게 끌려갔다.

내일 예지한테 물어볼까…?

****

“출발한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멍하니 나만 보고 있는 예지한테 안전벨트를 메라고 말하고 출발했다.

얘도 저혈압이었나?

집에 있을 때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이번 일이 좀 많이 피곤했었나.

삐­ 삐­ 삐­

뭐야?

안전벨트 안 했을 때 나는 소리인데?

“예지야?”

내 얼굴을 멍하니 보는 예지를 불러보지만,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나를 멍하니 보기만 하고 있었다.

왠지 모를 불안함이 느껴졌다.

급하게 골목길로 들어가 세우고 예지를 살펴보니 평소와는 완전히 달랐다.

어깨를 붙잡아 흔드니 예지의 몸이 내 손길에 따라 이리저리 힘없이 흔들리며 맥을 못 추리고 있었다.

“서예지!”

“누구..?”

“정신 차려!”

내가 누구냐는 질문에 덜컥 겁을 먹었다.

갑자기 왜 이런 일이..?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야 냥지!”

“냐…ㅇ…지?”

“그래! 기억이 안 나는 거야? 또 잊은 거야?”

“냥…지…”

초점이 없던 눈동자가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오면서 예지의 발음이 점점 또렷해졌다.

안심해서 몸에 힘이 쭉 빠지니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냥지야… 우리 도착했어…?”

“기억 안 나?”

“뭘…?”

“아니야.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

애써 웃어주며 다시 출발했다.

“이번 여행 재미있었다. 그치?”

“응… 다음에도.. 다들 놀러 가면… 좋겠다.”

“오늘 우리 팀은…”

예지가 아까의 상태처럼 다시 돌아갈까 두려워 계속 말을 걸었다.

다행히 평소의 예지라서 어느 정도 안심하긴 했지만, 신호를 기다릴 때마다 예지의 상태를 살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냥지가 내 몸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살짝 흐릿한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고 냥지의 얼굴을 보니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걱정스레 살펴보고 있었다.

잠꼬대라도 한 걸까?

핫… 아니면 비행기에서 다들 내렸는데 나만 못 깨고 남아있었던 걸까?

냥지의 눈치를 보면서 살짝 주변을 둘러보니 냥지의 차 안이었다.

어… 누가 날 업어 오기라도 했나..

이건 좀 그렇지 않나요…?

냥지에게 도착했냐고 물으니 웃으면서 기억 안 나냐고 물었다.

혹시 잠꼬대가 그렇게 심했었나…?

나 근데 잠버릇이 거의 없는 편… 아닌가?

집에서 이야기 하자며 대충 얼버무린 냥지가 오늘 일을 풀자 나도 신이 나서 오늘 수양이의 팀킬 초야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며 대화했었다.

서로의 일에 관해 이야기 하느라 바빠서 그런지 집에 금방 도착했다.

아까 집에서 하자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냥지에게 물으니 살짝 흐릿하게 웃던 냥지가 다음에 이야기 하자며 짐을 정리했다.

같이 짐을 정리하고 난 침실에 들어와 침대에 털푸덕 드러누워 오늘 일에 대해 생각했다.

나중에 같이 나올 힐링 게임은 뭘까?

아, 근데 오늘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던 건 뭐였을까?

“야. 오늘 갑자기 내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어. 혹시 너야?”

[질문의 의도 파악하지 못함. 다중 사고 시스템 가동. 3번 회로… 2번 회로…. 그냥 사용자가 잠이 덜 깬 것으로 추정. 종료.]

“아니.. 야…”

의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버그라도 있었던 걸까?

자다 깨서 그런지 침대에 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눈이 감겼다.

****

뚜벅­ 뚜벅­

희미해진 정신을 두들겨 깨우듯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왔다.

예지인가…?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