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폐지 줍기
* * *
“자, 예지님. 들어봐요. 지금 정란이 누나랑 제가 지각비를 걷어야 한다고 서로 이야기가 되었거든요?”
“네…? 지..지각비요..?”
“예. 분당 만 원으로 비령이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지야~ 3만원.”
[분당 만 원 ㄷㄷ]
[여윽시 참황…]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분당 만원이라니 스트리머들의 세계는 이렇게 냉혹하단 말인가…!
물론 지각한 게 잘못이긴 하지만…아니, 근데 다 같이 짜고 일부러 지각하게 만든 거 아냐?
어어?
“비령이, 그렇게 꼽을 주네…”
“정란아, 나도 실망이다. 예지한테 어떻게 그럴 생각을 해?”
“그거 나도 들었어 언니”
쥬벳트라는 사람을 시작으로 냥지가 갑자기 타겟을 정란이한테 돌리고 임뿌라는 사람은 냥지를 언니라 부르며 그것을 부추겼다.
냉혹한 스트리머의 세계에서는 배신과 통수가 10초 안에 이루어진다.
“아니, 네가 한번 따져야겠다며?”
“정란아. 정말 실망이다.”
“어? 어? 어어어? 으으응?”
[ㅋㅋㅋㅋㅋㅋㅋㅋ]
[고장 난 비령이 ㅋㅋㅋㅋㅋ]
[ㅋㅋㅋ]
실망이라는 사람들의 말에 정란이는 과부하가 온 듯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당하기만 하였고 결국 비령이의 잘못으로 끝이 났다.
이게 영상으로만 봤던 야리돌림….?
영상으로 볼 때는 몰랐는데, 당해보니까 뭐라고 반박하기 힘들 정도로 정신이 없어졌다.
그래도 정란이 덕분에 타깃이 옮겨갔으니 참 다행이다…!
그런데 오늘은 어떤 합방을 한다고 했더라?
분명 어제 냥지가 어떤 식이라고 말은 해줬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이거 물어봐도 괜찮을까?
“저기…? 질문이 있는데요…”
“예, 말씀해보세요.”
냥지랑 사이가 괜찮아 보이던 임뿌님이 내 질문을 받아주셨다.
야리돌림 끝났나 봐… 헤헤…
“오늘은 무엇을 하나요..?”
“와 이런 세상에… 다들 들으셨어요?”
“네, 확실히 들었습니다~”
임뿌님의 말을 정란이가 맞장구치며 다시 야리돌림이 시작되었다.
“냥지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제가 분명 전달했는데 죄송합니다. 여러분.”
“분명 냥지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같이 사니까 내가 확실히 알려주겠다고 근데 이게 뭡니까! 게다가 지각까지!”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아니…”
“예지님도 냥지님한테 한마디 하셔야죠.”
갑자기 나를 왜 걸고넘어지는 거야…!
그냥 냥지한테 조용히 물어볼걸…
그래… 이제 이런 토크도 할 줄 알아야지!
언제까지 친구들이랑 다른 스트리머들이 오디오를 채워줘야겠는가, 나도 입담을 늘릴 때가 되었고 이번 합방은 그 좋은 기회가 될 것인데, 왜 농담을 하기가 무서워지지…?
정신 차려 서예지!
인터넷에서 친구끼리는 농담하면서 논다고 했어..!
나도 성장이란 걸 해야 하지 않겠어?
갑자기 여태 없었던 용기가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냥지야…!”
“어.”
냥지의 무성의한 대답에 내 가슴 속을 가득 채우던 용기가 어느새 아이스크림이 한여름 땡볕에 녹아내리듯이 사르르 사라지고 머릿속이 스트리머들의 불화 논란 같은 망상으로 가득해졌다.
서예지가 냥지와 합방 중 막말로 불화… 예지의 변명은 농담…
“사…사랑해…”
“어, 나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순간 기대했다 ㅋㅋㅋ]
[ㄹㅇㅋㅋㅋ 그래도 여태 예지 목소리 중 제일 컸닼ㅋ]
[기여어]
[아직 예지는 아가야… 지켜줘야 해…]
[사랑한다잖아~]
냥테코인님의 30,000원 후원!
왔다.
그 성장이 오늘이란 법은 없지.
무서워져서가 아니라 시기가 아니었을 뿐.
“친구끼리라도 할 말은 해야지! 근데 친구 아니에요? 냥지님 말 안 들으면 뭐 때리기라도 하세요?”
“무슨 소리야! 우리 사이가 얼마나 좋은데!”
“아니면 아닌 거지, 왜 그렇게 화를 내세요.”
쥬벳트님이 잘 돌리시는구나.
메모.
“우리 근데 스캐빈저는 언제 접속해?”
“지금!”
아, 지난번에 말했던 스캐빈저 콜 합방이 이거였구나..!
허겁지겁 VR 기기를 머리에 쓰고 침대에 누워 접속했다.
[ㅋㅋㅋㅋㅋㅋ]
[방송 재접 된다 ㅋㅋㅋ]
접속하고 펼쳐진 세상은 놀라울 정도로 멋진 카페의 안이었다.
판타지 세계관의 카페가 이렇게 생겼을까?
조곤조곤 대화하는 목소리들과 고풍스러운 원목 상자에서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노랫소리, 그리고 커피를 서빙하는 것으로 보이는 웨이트리스 복을 입고 서빙하는 귀여운 고양이 귀의 소녀. 주변 가득 커피 냄새가 풍겨왔다.
천장은 뻥 뚫려 맑은 하늘을 보여주고 있었고 건물이 전체적으로 유리 창문이 가득해서 하늘 위에 떠다니는 구름들을 구경하기 좋았다.
와! 누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꾸몄구나.
[맵 진짜 예쁘다]
[누가 꾸몄음? ㄷㄷ]
[난 돈 없어서 기본 가구만 가져다 놨는데. 크크크]
다들 도란도란 모여있는 테이블이 보이길래 빈자리에 앉았다.
임뿌님은 주황색의 곱슬머리를 가진 남자였다.
“나 초대받은 적도 없는데 왜 항상 자동으로 넘어가 있는 거야..?”
“지난번에 한 번 초대 받았잖아. 아닌가?”
“그거 클랜 초대받아서 그래. 우리 피셀 클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난 피셀 아닌데?”
“어허, 조용히 해.”
[쥬벳트는 피셀 아니긴 하지 ㅋㅋㅋ]
[쥬벳트 나가!]
[예지도 피셀 아니자너]
[예지는 예외입니다]
쥬벳트님이랑 정란이는 항상 투닥거리네.
사이가 진짜 안 좋은 것 같지는 않고 그냥 친구끼리 친해서 저렇게 노는 건가.
“정란이가 여기 잘 꾸미긴 했지. 얼마 썼었지?”
“내가 쟤 뽑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150 썼었나…?”
냥지의 질문에 자랑스럽게 고양이 소녀를 손으로 가리키는 정란.
정란이의 지목을 받은 고양이 소녀가 미소를 지으며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상호 작용이 어디까지 되는지 궁금하네.
와, 근데 150이나 썼다고..?
역시 대기업들은 다르구나…!
그러고 보니 내 통장에 과연 얼마나 있으려나.
“이제 다 모였으니 빨리 시작하자.”
“근데 우리 한 명이 부족한 느낌이 들지 않아?”
누가 안 온 거지..?
애초에 나는 냥지가 말해줬던 합방 설명도 다 까먹어서…
[이차향이?]
[합방 멤버에 차향이 적혀 있는데, 없음 ㅋㅋ]
“아, 맞다. 차향 누나 안 왔는데?”
“엥? 잠깐만 전화해볼게.”
정란이가 허공에 손가락을 몇 번 쿡쿡 누르더니 통화음이 들려온다.
“여보세요.”
“응…?”
“언니 우리 오늘 합방이야!”
“으응…?”
[ㅋㅋㅋㅋㅋㅋㅋ]
[졸리는가 본데]
[자고 있었던 듯 ㅋㅋㅋ]
누군가의 졸린 듯한 대꾸가 들려왔다.
“듣고 있어? 언니!”
“흐흐흣..왜…”
“자고 있었어?”
“잠깐만 기다려보셈…”
통화가 끊기고 주변이 다시 시끌벅적해진다.
“아니, 우리 이거 한 소리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임뿌야. 너 어떻게 누나한테 그렇게 말하니?”
“아.. 죄송해요. 언니. 제가 정신이 좀 나가서.. 에잇 못된 계집애 에잇”
자학개그로 승화하는 임뿌님을 애써 무시하고 주변을 둘러보자 허공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났다.
토끼 귀를 머리에 달고 있는 분홍색 웨이브 머리의 여자인데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모습이 매우 인상 깊었다. 한복 오랜만에 보네.
차향이라는 사람일까?
아직도 졸린 지 눈을 손등으로 비비고 있었다.
“차향 언니. 오늘 완전 지각이야!”
“아, 미안미안! 진짜 깜빡했어!”
“지금 예정 시간이 좀 지났기 때문에 바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임뿌님이 바로 게임을 시작하자 스캐빈저 콜 특유의 하얀 설원 속으로 툭 떨어졌다.
현실은 여름인데 여긴 겨울인 게 참 특이하단 말이지.
“자, 오늘 스캐빈저 콜에서 새로 나온 모드! 바로 노페인 모드입니다! 전투가 없는 스캐빈저 콜이죠. 여기서 오늘 우리만의 룰을 만들어서 게임을 시작할 건데, 1시간 안에 물품을 주워 가방 안에 가득 채운 뒤 기지로 돌아와 가치를 계산합니다. 그리고 가치가 제일 비싼 팀이 승리하는 구조!”
“와, 재미있겠당~”
정란이가 손뼉을 짝짝 치자 나도 눈치를 보다가 손뼉을 쳤다.
근데 팀은 누구누구지?
“팀은 어떻게 정하는가요…?”
“좋은 질문입니다. 바로 이 제비뽑기! 말 나온 김에 예지님이 한번 뽑아보세요.”
주먹을 꽉 쥔 임뿌님의 손에 하나를 뽑아 확인하니 A라고 적혀있었다.
“A…”
“내가 A 갈래! 나 A!”
“어허, 이런 건 절친끼리 하는 거야!”
“같이 사는 사람끼리 해야 마음이 맞는 법이지. 맞지?”
“응흐흐흐흐…”
어디선가 레오루에 하얀 오소리 띠몽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버그인가?
다들 제비를 뽑아 결과를 확인했다.
A팀은 나와 이차향님 그리고 임뿌님.
B팀은 냥지와 정란이 쥬벳트님이었다.
“허어어어어어, 나 얘랑 팀 하기 싫어요…”
“야! 누군 좋은 줄 아냐고!”
“허어어어어 그냥 안 할래… 얘랑 하면 무조건 지잖아요…”
“으으으으으”
[쥬징징ㅋㅋ]
[정란이가 좀 못하긴 해ㅋㅋㅋ]
[근데 이거 예지 팀은 거의 이기지 않음? 지난번에 플레이 보니까 예지 프로보다 잘할 것 같던데]
[그렇긴 하네]
[ㅇㅇ 맞네]
시청자들 사이에서 팀 밸런스에 대해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동체 시력 때문에 그런 건데…
내가 보기에는 이번 게임은 스캐빈저 콜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유리할 듯 보였다.
“근데 예지는 게임 너무 잘해서 우리가 거의 지지 않을까?”
“나 근데… 여기 아이템 가치 그런 거 하나도 몰라…”
“그래? 그럼 시작~”
내 대답에 만족했는지 냥지는 말싸움을 하는 정란이와 쥬벳트에게 가방을 던져주고 뒷덜미를 질질 끌고 어디로 가버렸다.
임뿌님이 나눠주는 큰 가방을 하나 받고 우리도 빨리 아이템을 찾기로 했다.
“우리 모여서 찾을까요? 흩어져서 찾을까요?”
“일단 흩어지자~ 모여서 파밍 하면 너무 느려.”
차향님의 주장에 다 같이 동의하고 흩어지기로 했다.
무전기를 나눠 받았으니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면 되겠지.
눈이 펑펑 내려서 쉽게 아이템을 찾을 수 있을까?
기본적인 파밍도 모르는 나한테는 꽤 버거운 일이지 않을까.
아까 받은 나침반과 지도를 확인해보니 내가 가고 있는 곳은 지도에 기숙사라고 표시되어있는 건물인데, 눈에 보이는 비주얼에서 그 흉흉한 기운이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평화로운 모드라고 했는데 왜 공포 게임 같은 비주얼이지?
일단 가보면 알겠지.
뽀드득뽀드득
항상 이 눈을 발로 밟는 소리는 듣기 좋은 느낌이야.
한참을 걸어 기숙사에 도착했지만, 눈밭에 찍힌 여러 사람의 발자국을 보니 기대감이 팍 사라졌다.
이미 누가 파밍 한 거 아냐…?
낡고 녹슨 철문의 문고리를 슬며시 열고 들어가니 경첩에서 듣기 싫은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으으으…
안을 열고 들어가니 꽤 어두워서 건물의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는데 바로 옆의 스위치를 톡톡 눌러봤지만, 반응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혹시 손전등도 줬던가?
가방을 뒤적거리니 손전등이 하나 있었다.
톡
손전등을 바닥에 비추며 살펴보니 걸어서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책상과 의자들이 너저분하게 어지럽혀져 있었고 우유갑이나 과자 봉지 그리고 책 따위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바닥에 이런 것들은 비싸지 않겠지?
옆방을 열고 들어가니 기이한 문양이 바닥에 그려져 있는 내부가 보였는데 안타깝지만 역시 누가 털었던 흔적이 보였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카드를 발로 뻥 차며 옆방으로 향했다.
[아앗…]
[쉬잇 ㅋㅋ]
[알려주면 재미없지 ㅋㅋㅋ]
[가방도 없이 이게 왜...? 문은 열어 놓고]
시청자들의 반응이 뭔가 이상하지만 대충 넘어갔다.
사실 시청자들의 드립이나 밈을 아예 못 알아들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런 거겠지.
“너무 어둡다…”
[어둡긴 하다;;]
[혹시 또 트라우마 옴??]
“그건 아닌데 바닥에 뭐가 많아서 움직이기 불편하네…”
이건 등산하는 수준인데?
책상을 넘어가며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니 냉장고가 보였다.
고장 난 거 아닌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보니 음식이나 조미료들이 보였다.
비스킷, 과자 봉지, 보드카, 콜라, 빨간 곽… 설탕인가?
[이 게임은 그거 먹어가면서 해야 함]
[ㅇㅇ 아니면 탈수로 쓰러지거나 아사함 ㅋㅋ]
[설탕 은근 가격 괜찮음]
[가껨;;]
[지난번에는 안 그러지 않았음?]
[그땐 예지가 얼마 안 했잖아]
시청자들의 말에 가방에 쓸어 담고 과자 봉지를 꺼내서 입에 털어 넣고 콜라를 마셨다.
이 정도면 되겠지?
3층 계단에 올라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