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34화 (34/78)

〈 34화 〉 정신 세계

* * *

그일 이후로 나흘 동안 테일 리가 나오는 상황은 많이 줄었고 당연하게도 방송을 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가끔 냥지와 놀거나 간식을 먹을 때는 나오는 것 같았다.

그조차도 냥지와의 대화는 단답형으로 이루어졌고 평소의 애교 가득한 행동은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방송에서 흑역사는 더 나오지 않았지만, 흑역사가 나오던 때가 더 좋았다고 가끔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꽤 자주.

이런 식으로 바뀌길 바라지는 않았는데…

시청자들도 걱정하며 응원했지만 무언가 변화가 생길 여지는 없어 보였다.

냥지는 이 상황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따금 답답한 듯 얼굴을 찌푸리면서 생각에 잠기곤 한다.

친구들도 친구를 잃은 듯 약간 침체한 분위기였다.

“…지! 예지야!”

“응..? 어..”

“혹시 부를 수 있어?”

무언가 많이 생략된 말이지만 무슨 말인지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일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도 않았다.

테일리는 도대체 어떻게 자유자재로 주도권을 잡고 바꿀 수 있었을까?

바뀌어라… 바뀌어라…

“어…?”

성공적으로 바뀌었는지 잠시의 부유감과 함께 내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 쉬운 걸 못하고 있었다고…?

시도조차 안 해봤던 나는 어쩌면 바보가 아닐까.

움직여보려고 했지만 내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거 답답한데 어떻게 안 되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갑자기 내 주변은 냥지의 집으로 변하였고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여기가 내 정신세계 같은 개념인가?

아쉽게도 의수는 없네.

냥지의 방문에 덕지덕지 붙은 하트 스티커들을 애써 무시하고 소파에 앉아보았다.

집 구조는 완벽히 냥지의 집 모습 그대로였고 부엌의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재료들과 음식이 빼곡하게 들어있었다.

전부 한 번쯤은 먹어본 음식들인데 아무래도 내가 먹고 기억하는 음식들이 여기에 생기는 게 아닐까 싶다.

먹어봤는데 내가 알고 있던 그 맛이었다.

이건 뇌가 기억하고 있는 음식의 맛일까?

맛은 있지만 뭔가를 먹는다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 테일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테일리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알았을까?

지난번 내 몸이 트라우마로 쓰러졌을 때 TV로 테일리의 기억을 봤던 것이 기억이 내 리모컨을 조작해 전원을 켜보았다.

화면 가득 냥지의 얼굴이 보인다.

아, 이렇게 봤구나.

어쩐지 지금 테일리의 행동이나 표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나도 대충 무엇을 하는지 느껴졌으니까.

“왜… 왜 부른 거야..?”

“친구끼리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부르는 거야?”

“아..아니…”

“따라와 볼래?”

냥지가 테일리의 손을 살며시 잡고 내 방으로 끌기 시작했다.

테일리는 자신이 상처 받았던 그 방으로 자신을 데리고 가려고 하자 제자리에 멈춰 소극적인 반항을 했지만 냥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끌고 갔다.

나나 테일리의 성격상 친구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저런 반항은 그저 시간 끌기에 불과했다.

본인도 그것을 아는지 울상을 지으면서 고개만 도리도리 휘젓고 있었다.

내 방문 앞에 도착하니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털썩 주저앉은 폼이 불쌍했다.

“싫어… 왜 그래… 잘못했어…미, 미안해…”

“조금만 참아보자. 응? 너한테 보여줄 게 있어.”

“아…. 안보면 안돼?”

주저앉은 테일리의 등을 쓸어주며 다독이자 엉거주춤 일어나 냥지의 손길에 이끌려 따라갔다.

어린애 같은 행동이나 말투를 보면 지금 테일리 상태가 정상은 아닌데 거기에 그런 일을 당했으니… 차라리 내가 있을 때 그 악질들이 왔다면 괜찮았을 텐데 타이밍이 너무 좋지 않았지.

과거의 기억이 아예 없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보기로 본 고스트 부대인가 그 문제를 맞춘 거면 아예 없지는 않은 모양인데 이쪽이랑 테일리 세계랑 비슷한 점이 좀 있나?

의자에 앉혀진 테일리는 눈을 질끈 감고 버티고 있었다.

화면이 시커멓게 변했지만 테일 리가 눈을 질끈 감고 버티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나 좀 믿고 눈 좀 떠주면 안 될까?”

“시..싫어.”

“나 좀 믿어줘. 내가 너에게 상처 준 적이 있니? 응?”

“무서워…”

“그럼 우리 셋을 세고 잠깐만 떠볼까?”

한참 고민하던 테일리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

테일리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셋”

눈을 살며시 뜬 테일리의 시야에 방송을 켰는지 방송 화면과 채팅창이 보였다.

스피커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예지 파이팅~”

“게임이나 들어와!”

“야! 서예지! 네가 안 와서 심심했잖아! 어떻게 할 거야!”

[방송 켠 지 30분 만에 왔다 ㅋㅋㅋ]

[여기 주인은 어디 갔다가 이제 왔음?]

[지각했으면 빨리 와서 애교나 하십쇼]

[항상 잘 보고 있어요!]

무슨 상황인지 파악 못 하고 눈알만 도르르 굴리던 테일 리가 상황을 파악하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예지와 눈을 마주친 냥지가 얼굴에 미소를 꽃처럼 활짝 피우며 웃었다.

“누가 널 싫어할 순 있겠지.”

“살다 보면 그런 일이 수도 없이 벌어질 수도 있을 거야.”

“그런데 널 좋아하는 사람들이 널 항상 응원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줘.”

“행복하게 살기도 바쁜데 널 싫어하는 사람들 말만 신경 쓸 필요 있을까?”

냥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테일 리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오열 했다.

그녀가 눈물로 흘려보내고 있는 슬픔은 어쩌면 테일리 세계에서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슬픔도 같이 쏟아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운다!”

“예화야! 그렇게 말해서 되겠니?”

“아니, 정란이 넌 왜 시비야!”

“엥? 전 맞는 말만 했는데요? 이상하다?”

“아하하하하하!”

테일리의 청량한 웃음소리에 냥지가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어?”

[??]

[이렇게 크게 웃은 적은 처음 아님?]

[앞으로도 이렇게 웃고 살자]

내 얼굴이 저렇게 웃을 수도 있구나.

생각해보니 나도 저렇게 크게 웃어본 기억은 없었네.

다들 신이 나서 무려 4시간을 떠들썩하게 놀았고 테일리는 합방이 끝나고도 4시간이나 더하고 내면의 세계로 돌아가 버렸다.

오늘의 테일리는 평소보다 말을 조금 덜 더듬는 것 같다고 느껴졌다.

잠든 테일리를 밀어내고 다시 주도권을 가져왔다.

그리고 다시 컴퓨터를 켜서 공지를 작성했다.

흑역사라고 말하긴 했지만, 마냥 싫지는 않았어.

지난번에 테일 리가 메모장으로 했던 제안을 받아들여 내가 1부 테일 리가 2부를 진행한다고 작성했다.

내 침대에 누워 자고 있던 냥지의 어깨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주고 거실의 소파에 가서 누웠다. 눈을 감고 자고 있던 야뭉이가 항의하듯 먀 소리를 내고 다시 눈을 감았다.

내가 자고 있을 때 냥지가 와서 자고 있었으면 모를까 내가 냥지 옆에 누워 자기는 쉽지 않더라. 아직은 뻔뻔하게 같이 잘 자신이 없어.

최근 냥지가 내 옆에서 자면 컨디션이 너무 좋다고 자꾸 침대 안으로 들어오는데 조금 곤란해…

그런데 고스트가 어떤 의미일까?

[고스트 부대 예전 테일 리 소속. 테일리를 제외한 전 부대원이 전멸하고 테일리는 단독 작전만을 수행]

그래?

[최근 테일리의 상태 좋지 않음. 다른 인격이 형성되는 이상 증상을 보이고 있음.]

오해야. 그냥 그렇게 알아둬.

[뇌내 물질을 조작.]

급속도로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입이 헤벌쭉 벌어져 이상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 이상한 짓 좀 하지 마.

[새벽 늦게까지 깨어있는 것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음. 수면 요청]

갑자기 눈을 떠 있기도 힘들 정도로 졸렸다.

야이… 요청이…뭔지…ㅁ…

[사실 명령이었음.]

<예지 저렇게="" 크게="" 웃는="" 건="" 처음이네="" ㄹㅇ=""/>

맨날 표정이 우울증 말기 환자 같길래 좀 그랬는데 저렇게 웃으니까 보기 좋다 ㅋㅋ

지이잉 : ㅋㅋㅋㅋㅋ 애들 오늘을 위해서 대본까지 만들어서 외우더니 대성공이네 ㅋㅋㅋㅋ

­새싹 : ㄹㅇㅋㅋㅋㅋ

­예지곤듀님 : 오늘 좀 덜 떨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한데

­차향이좋네요 : 시청자도 같이 연습한 게 ㄹㅈㄷㅋㅋㅋ

­카레비령 : 오늘 비령이랑 예화 별생각 없이 말했다가 예지가 웃으니까 오늘 작정하고 투탁투닥하더라 ㅋㅋㅋㅋ

­ㅇㅇ : ㅋㅋㅋㅋㅋ

<그 폐기물들은="" 어떻게="" 됨?=""/>

그거 듣기 전까지 잠 못 잘 듯;;

포도리야 : 경찰이 10명 모두 처치했으니 안심하라고!

금태양 : 편ㅡ안

Zzxcasd : 요즘 세상에 그런 놈들이 아직 남아있었네

<공지 보니까="" 이제="" 1부는="" 예지가="" 2부는="" 테일="" 리가="" 한다고="" 올라옴=""/>

예지가 자기한테는 뭐라 해도 되는데 테일리 시간에는 그러지 말아 달라고 하더라.

이이잉 : 왜 자기는 괜찮다는거ㅡㅡ 어차피 똑같은 사람이면서 ㅋㅋ

초초야 : 그러면서 똑같이 멘탈 터질 듯

12연차F : 근데 해리성 뭐시기 그거 진짜 맞는 거야? 컨셉 아님?

­ㅇㅇ : ? 미치셨나?

­12연차F : ㄴㄴㄴㄴ 아니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임 ㅅㅂ

­ㅇㅇ : 진단서 인증했음 ㅋㅋ

<근데 진짜="" 아는="" 게="" 없더라="" ㅋㅋ=""/>

초등학교에서도 배우는 문제도 모름ㅋㅋㅋㅋ

앰버링사랑 : 과거가 기억 안 난다던데

­이익 : ㄹㅇ?

­앰버링사랑 : ㅇㅇ 냥지가 본인 허락 맡고 썰 풀었음 평소에도 엄청나게 물어본다고 하더라

­치치 : 너 좀 그렇다…

­이익 : 몰랐음 ㄹㅇ아니;;

<기억 없다는="" 부분="" 트루임?="" 비령이랑은="" 친구였다는="" 건="" 어떻게="" 알았는데?=""/>

비령이 채팅 보자마자 알던데

2동강5리알 : 그것밖에 기억 안 났대 근데 말할 용기는 안 났다고 함

­이익 : ㅈㅅ

내 몸을 흔드는 누군가의 손길에 깨니 냥지였다.

“왜 소파에서 자고 있어.”

“네가 내 침대에서 자길래…”

“그럴 때는 다음부터 같이 자. 알겠어?”

“…?”

무슨 논리지…?

자기랑 같이 자는 것을 피해서 오늘 컨디션이 최상이 아니라고 장난스럽게 나를 탓하는 냥지의 말에 뭐라 대답할지 모르겠다.

뭐..뭐지…!

내가 잘못한 건가…!

좀 부끄럽다니까 넌 친구인 내가 부끄럽냐는 이상한 소리를 하며 우기기 시작해서 항복을 외쳤다.

이럴 때의 냥지는 절대 말로 이길 수 없다.

냥지가 의외로 고집이 되게 세.

우린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 이틀 뒤에 성우인가 배우 하러 가야 하는데…”

“성우면 성우고 배우면 배우지. 무슨 소리야?”

“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둘 다 해야 하는데… 이틀 뒤에 뭘 해야 할지 기억이 안 나서…”

“듣고 까먹은 거야? 그쪽에서 말을 안 해준 거야?”

“어쩌면… 전자…?”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는데 밸보 지부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부담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내 행동과 연기를 보면서… 평소의 방송인가..?

생각을 바꿔보니 괜찮은 것 같기도 하네.

“그래? 그럼 같이 가도 돼?”

“으..응? 안될 이유는 없겠지만… 굳이…?”

냥지가 보는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아니, 친구가 보는데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니 좀 부끄러워지네.

“난 너 연기하는 거 보고 싶은데?”

“난 부끄러운데…?”

“아니 잘하면서 왜 그렇게 부끄러워하시는데요. 누가 네 가슴 보여 달래?”

“왜 말이 그렇게 돼…!”

진짜 의식의 흐름이다.

결국 따라오기로 결정이 났다.

“정란이 내일 저녁에 우리 집에 온다던데?”

“응…?”

“이사하는데 며칠만 좀 지내면 안 되냐고 하길래 내 방에서 자라고 했어!”

“그럼 넌…?”

“네 침대에서 같이 자면 되지.”

“?”

“설마 나랑 자기 싫다든지… 내가 싫구나?”

“아..아니 왜 말이 또 그렇게…”

“알았어…”

“와..와아! 냥지랑 같이 잔다…!”

나노봇의 효과가 그렇게 컸나?

최근 나노봇의 효과가 내 근처에서 자면 크게 증폭한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아챈 모양인지 걸핏하면 같이 자겠다고 우기더라.

비령이를 설득해서 둘이 같이 재워봐야겠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