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모두 모이는 날
* * *
방송 진행을 못 할 것 같아서 가끔 하고 싶을 때 하겠다고 테일 리가 말했다.
내가 느끼는 감각을 모두 느낄 수 있어서 그런지 정신세계 안에서 대리 만족을 하는 느낌인데 어떻게 보면 내 방송의 시청자라고 볼 수 있겠네.
물론 쓸쓸할 때가 있는 건지 가끔 친구들이랑 놀기도 하고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대화도 할 수 있었다.
[크로크무슈가 뭔지 모르겠지만 먹고 싶어졌어..]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거지?
[먹어봐..]
잉잉 소리를 내며 투정 부리는 테일리를 애써 무시했지만 결국 항복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요즘 자신감이 좀 늘었는지 고집이 세진 것 같아.
친구들이나 언니들은 보기 좋아졌다고 말했지만 테일리의 자신감은 날 곤란하게 만들었는데 너도 좀 자신감을 키워야 한다며 가끔 잔소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음에 상처가 좀 깊은 건가 추측해보는 친구들한테 차마 말을 못 하겠다.
원래 소심한 거야…
오늘은 아침부터 배달 음식으로 파스타, 스테이크, 샐러드를 주문했다.
냥지가 많이 먹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나노봇이 들어가고 나서는 예전보다 더 기운이 넘치고 여유로워지며 더 많이 먹었다.
많이 먹는 게 무슨 상관인지 몰랐는데 살이 안 찐다면서 먹고 싶은 것은 마음껏 먹어보는 모양.
벨 소리에 나가보니 배달원이 문 앞에 음식을 두고 갔는지 가져와 식탁에 세팅했다.
아, 이곳에서는 배달 용기로 플라스틱을 쓰지 않더라.
극심한 환경오염으로 인간이 생존하기 힘든 환경이 되어버리자 이런 기술들이 엄청 많이 생겼다고 한다.
환경 오염의 일등 공신이 사라진 덕분이기도 하고.
어쨌든 종이를 플라스틱처럼 쓸 수 있게 만들어진 것 같은데 난 모르겠다.
종이인데 흐물흐물해져야 정상 아냐?
종이 그릇에 담긴 뜨거운 파스타 면을 포크로 뭉쳐 맛보았다.
크림이 듬뿍 묻은 푹신푹신하고 부드러운 하얀 면발을 음미하며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짐작해보는 재미도 나름 쏠쏠하다.
향이 옅으며 동글동글한 양송이버섯, 약간 비릿하면서 향긋한 마늘 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통통하고 쫄깃한 새우의 식감, 그리고 베이컨.
짭조름하지만 올리브 특유의 향이 입안 가득 퍼지는 것을 즐긴다.
부드러운 우유 때문인지 부드럽지만 역시 이것만 먹으면 느끼하다.
입안에서 아삭아삭 씹히는 시큼달달한 오이피클이 이 느끼함을 잡아주지.
옛날의 피클은 원래 순수한 식자재 보존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피클의 독특한 맛 때문에 음식으로 취급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음, 미식가처럼 재료의 맛과 향을 평가하며 생각하긴 했지만 난 사실 미식가들처럼 혀가 예민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사실 파스타 같은 경우는 재료를 맞추기 쉽지.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서 먹으면 제법 재미있고 맛도 더 좋게 느껴지지 않는가.
어디 스테이크의 맛은 어떠려나.
스테이크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으니 약간 질기지만 달짝지근한 양념의 향이 고기의 풍미를 살려주었다.
이것은… 한우!
영수증의 원산지 표기를 보니 호주산이었다.
원숭이도 나무에 떨어질 때가 있는 법.
이런 실수도 가끔 해줘야 인간미가 보이지.
아니, 어쩌면 호주의 목장 중에서 한국의 송아지를 데려다 키우는 목장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말고…
냥지의 얼굴을 쳐다보니 대단히 행복한 얼굴로 맛있게 먹고 있었다.
살에 대한 고민이 사라진 사람은 행복해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냥지가 맛있게 먹고 있는 샐러드를 가져와서 입안에 넣어보았다.
오… 이렇게까지 신선한 야채라니 게다가 난생처음 먹어보는 신묘한 소스가 나의 흥미를 끌고 있었다.
이 가게만의 독자적인 연구로 만들어진 소스일까?
아니면 이 세계의 특별한 소스?
입에 남아있던 소스의 향은 금세 사라졌다.
착각이었나 싶어 다시 한입 먹어보니 아까의 그 맛이 재현되었다.
여긴 샐러드가 일품이었어.
냥지가 뒷정리하는 것을 도우며 일반 쓰레기에 종이 용기를 담았다.
이 향을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시판 소스인지 그 가게에서 독자적인 연구로 만든 소스인지 확인해보자.
다 치우고 소파에 앉으니 냥지가 내 옆에 누우며 달라붙었다.
“아, 이 행복한 느낌. 왜 항상 예지 네 옆에 있으면 기분이 좋지?”
“몰라…떨어져…”
아직은 달라붙는 게 창피하기만 하다.
살과 살이 닿는 그 느낌은 아직 익숙해지기에는 너무 어렵게 느껴져.
냥지가 내 말을 무시하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린다.
“맞다. 정란이가 오늘 저녁에 온다고 했는데.”
“언제…?”
“몰라? 도착하면 문자 보낸다던데 저녁 먹기 전에 오겠지. 야뭉아 좋은 말로 할 때 그 컵 가만히 놔둬.”
나도 고개를 들어 식탁에 앉은 야뭉이를 바라보니 우리의 경고에 잠깐 손을 멈췄지만, 다시 손으로 물컵을 톡톡 쳐서 결국에는 떨어뜨리고 말았다.
“야뭉아~~ 제발!”
뭐가 문제냐는 듯 우리를 보며 야옹 하고 울던 야뭉이는 우아한 발걸음으로 유유히 걸어갔다.
고양이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일까 아니면 무언가 우리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었을까.
어쩌면 아무 생각이 없을지도 몰라.
일어나려는 냥지의 어깨를 눌러 다시 눕히고 내가 일어나 행주로 쓱쓱 닦았다.
이 평화롭고 평안한 느낌을 누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어? 신곡? 역시 노래는 진짜 잘한다니까.”
“그냥 흥얼거린 건데…!”
냥지는 최근 뭐만 하면 나의 모든 점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얼굴이 예쁘다, 몸매가 좋다, 사랑스럽다, 노래를 잘 부른다, 게임을 잘한다, 성격이 좋다.
하여튼 낯부끄러운 소리를 마구 하며 나를 칭찬하는 데 기분이 좋긴 하지만 참 기분이 묘하고 대답하기 좀 그랬다.
혹시 야리돌림인가 싶었지만, 진심으로 그러는 눈치라서 그건 아닌 거 같고 지난번에 말했던 내 자신감을 키워주기 위한 작전일까?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네!
물어보니 그건 또 아니라는데 나중에 말해주겠지.
우우웅
“여보세요?”
“오늘 정란이 온다면서! 웬일이래?”
“이쪽으로 이사 온다고 말 안 했어?”
“난 농담인 줄 알았지! 집 밖에도 안 나오는데 이사를 할 줄 몰랐지.”
“그렇기는 하지. 공지 볼 때까지는 사실 나도 안 믿었어.”
“그럼 나도 오늘 네 집에 간다!”
[예화랑 정란이 온다..! 기대돼…]
다 좋은데 얘네들 전부 모이면 활기가 있다. 못해서 넘치기까지 하기에 오늘 정신적으로 피곤해질 것 같았다.
간만에 모이는 거니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현실에서 정란이, 예화, 냥지, 나 이렇게 모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 다 모이는 건가?
보통 정란이가 잘 안 나와서 넷이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물론 정란이도 밖에 나가는 것을 싫어할 뿐이지 방송하면서 성격이 좀 바뀌어서 그런가? 친구들끼리 놀 때는 인싸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본인한테 그 말을 하니 무슨 소리냐고 부인하지만.
정란이는 항상 누군가에서 조리돌림 당하거나 놀림 받는 역할이었지만 가끔 정란이가 놀릴 때는 그 누구보다 얄밉다는 평가인데 난 지난번에 당해보니 별로 그렇지는 않더라.
사람마다 다른 거겠지?
그런데 최근 고스트가 뭔지 어떻게 알았냐고 친구들이 물어보는데 그때마다 게임에서 본 것 같다고 그냥 넘겼다.
나도 테일리도 모르는데 대답을 어떻게 하겠어.
테일리도 과거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나는 고스트를 게임에서나 봤으니까.
하여튼 어설프게 넘기긴 했지만, 반응들이 조금 이상했다는 소리다.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손으로 내 배를 만지작거리는 냥지의 손을 붙잡아뒀다.
그냥 밀어내거나 쳐내면 금방 다시 시도하는데 한번 방치하니 가슴 근처까지 손이 올라가길래 기겁하며 막은 적이 있었다.
도대체 왜 만지고 싶냐고 물으니 어떻게 이렇게 생길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고 뻔뻔하게 말하며 다시 시도했었다.
너무 당당하게 말하니 할 말이 없는데 여자들의 스킨십은 원래 그런가?
사실 조금 부끄러울 뿐이지 별생각이 없기는 하지만 가끔 음흉하게 웃으며 엉덩이를 토닥일 때가 있어서 좀 그렇단 말이야.
만질 거면 그냥 만지지 굳이 그렇게 음흉하게 웃으며 만질 필요가…?
근데 이렇게 누워있으니 잠이 솔솔 왔다.
냥지도 마찬가지인지 조금씩 조용해진다.
“히에에엥. 문 열어줘…! 열어주세요..! 히에엥…”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문을 콩콩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뭐야…?
정란이 같은데?
눈곱이 끼지 않지만, 습관적으로 눈을 손으로 비비며 일어났다.
이렇게 큰 소리가 나는데 냥지는 아예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새근새근 잘만 자고 있었다.
“미안해… 나랑 냥지가 자고 있어서 몰랐네…”
문을 열어주니 정란이가 캐리어 가방을 끌고 들어와 한숨을 푹 쉬었다.
“10분 동안이나 안 열어주길래 혹시 어디 나갔나 싶었는데 문에 귀를 대보니 TV 소리는 들려오고…”
미안하다며 살짝 안아주고 정란이에게 캐리어 가방을 받아 안으로 들고 들어갔다.
“밥 먹었어..?”
“아니. 냥지가 같이 먹자고 하던데?”
그런가?
정란이가 잠옷으로 갈아입는다고 방 안에 들어가 있는 동안 정란이가 좋아하는 카레를 끓이고 감바스를 가볍게 만들어 보기로 했다.
감바스라고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게 요즘은 감바스 재료들을 묶어서 파는데 그냥 사서 끓이면 끝이다.
자는 냥지를 깨울 필요는 없겠지.
만들고 있는 동안 귀여운 날다람쥐 동물 잠옷을 입은 정란이가 도도도 달려와 내 옆에서 구경했다.
“와아, 내가 좋아하는 카레! 도와줄까?”
“아니, 거의 다 만들었어…”
정란이 키가 160도 안 돼서 그런지 여동생이 옆에서 구경하는 기분이라 귀엽게 느껴졌는데 혹시 이게 냥지가 나한테 느끼는 기분인가.
난 근데 냥지보다 키가 큰데…?
감바스 재료를 넣고 끓이니 옆에서 감탄 소리가 들려왔다.
“짱 멋있어.”
“어…?”
별 의미 없는 소리였다.
그냥 재료 다 넣고 끓이는 게 다인데 멋있다니…
갑자기 내 오른팔이 멋대로 움직이며 정란이의 등을 두드렸다.
응?
[나노봇 투입 완료. 활성화까지 30분]
“응? 뭔가 이상한 기분이? 뭐지.”
“무슨 소리..?”
“갑자기 몸이 이상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이었나.”
기분 탓으로 넘기며 지나가는 야뭉이에게 인사하던 정란이는 누군가 벨을 누르는 소리에 자기가 열어주겠다고 달려갔다.
근데 정란이도 아까 문을 두드리지 말고 그냥 초인종을 누르면 되지 않았나?
난 오늘 방송 쉬는 날이긴 했지만 다른 애들은 어떻게 하는 걸까?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예화다! 오랜만이야!”
“평소에도 이렇게 좀 나와!”
현관문에서 둘이 이산가족 상봉하듯이 포옹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맛있는 냄새. 뭐야?”
“카레랑 감바스…”
“와 누가 한 거야? 설마 냥지가?”
“내가 했어…”
“오! 네가 만든 요리는 처음 먹어보는 것 같은데 한번 먹어봐야겠다.”
거의 완성했으니 소파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하니 둘이 소파에 앉아 곤히 자는 냥지를 툭툭 치며 깨우고 있었다.
“우리 왔는데 이렇게 퍼질러 자고 있어!”
“맞아. 나를 10분 동안 밖에 방치하고 자고 있었다고?”
“아앙… 날 내버려 둬…”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살려주세요… 그만해…5분만…”
다 만들었다고 부르니 정란이와 예화가 젓가락과 컵을 세팅했다.
“와, 진짜 맛있겠다!”
“냥지야 빨리 일어나! 얼른!”
“흐아아….”
눈을 비비며 식탁에 앉은 냥지가 입을 쩍 벌리며 하품했다.
“잠 푹 잤네. 너희들 언제 왔어?”
“난 한참 됐고 예화는 방금!”
예쁘게 담아진 음식들을 사진 찍은 친구들은 곧바로 식사를 시작했다.
나도 제법 여성스러워졌다고 생각하지만 사진 찍는 건 별생각이 없었는데 여자들은 밥 먹기 전에 찍고 SNS에 올리더라.
난 SNS를 안 해서 그런가?
시청자들이 SNS 할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지만 그런 건 귀찮기만 해.
“예지야 유튜보는 잘 돼 가?”
“응..? 아마..?”
사실 확인 하지 않았지만 영상은 편집자한테 꼬박꼬박 보내주고 있으니 잘하고 있지 않을까.
우리는 식사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중 골치 아픈 이야기가 나왔다.
“내일 예지 촬영하는 날이었나? 내일 난 예지 따라갈 거야.”
“나도 그럼 따라갈래!”
“뭐? 나도! 왜 나만 빼놓고!”
정란이가 나한테 떼쓰기 시작하고 예화도 덩달아 같이 떼를 써서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너희들 방송은 안 하니..?
아, 근데 내 친구들은 방송 시간을 딱히 정해 놓지 않았고 저녁에 방송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상관없나?
냥지 혼자 구경하는 건 별생각이 없었는데 갑자기 둘이나 늘어나니 뭔가 부끄러워.
떼를 쓰며 늘어지는 그 둘에게 결국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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