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연기가 어려워
* * *
예화가 내일 보자며 돌아가고 이제 잘 시간이 되었을 무렵.
“나 예지랑 자고 싶어잉~”
“내가 잘 건데!”
고양이 잠옷을 입은 냥지와 날다람쥐 잠옷을 입은 정란이가 서로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냥 둘이 같이 껴안고 자면 안 되나..?
아니면 내가 소파에서 자는 것도 꽤 괜찮은 방법일지도 몰라.
“둘이 같이 자고 그냥 나 혼자…”
“어허! 혼자만 편해지겠다고? 그러면 안 되지! 이건 용납이 안 되는 문제인데요?”
“이번에는 정란이 말이 맞지 않나.”
이럴 때만 서로 죽이 척척 맞네.
삐쭉이며 툴툴거리다가 냥지한테 입을 손가락으로 잡혀서 당겨졌다.
싫어… 혼자 있고 싶습니다. 다 나가주세요.
그보다 정란이는 왜 나와 자고 싶어 하는 거야.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짚이는 점이 없었다.
그냥 같이 자고 싶어져서 그런 건가?
정란이가 여태 같이 잤으면 됐지 나한테 양보해! 라고 말하면서 투덕거렸고 냥지는 그거랑 이거는 다른 거라고 말한다.
내 몸은 내 것이고 내 자유인데요..?
결국 가위바위보로 결정하고 정란이와 자게 되었다.
시무룩해진 냥지가 내게 아련하게 인사하며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누가 보면 내가 죽을병에 걸린 줄 알겠어.
“예지랑 처음 자본당.”
“그렇네…”
[정란이랑 자다니! 좋아..!]
매우 흥분한 목소리로 난리 난 테일리를 무시하며 하품을 했다.
슬슬 잠이 오네.
헤헤 웃으며 착 달라붙은 정란이는 키 차이가 심해서 그런지 고목에 달라붙은 매미처럼 나에게 매달렸고 나는 정란이를 데리고 방침대로 향했다.
자기는 평소에 잠을 못 자고 불규칙적이라고 말하는 정란이는 침대에 누운 지 10초도 안 돼서 새근새근 잠들어버렸다.
어… 평소에 잠을 못 잔다면서…?
[매우 불규칙한 생활패턴 개선 필요. 수면을 유도.]
몸에 나쁜 그런 건 아니지?
[부작용 없음]
정란이는 워낙 작아서 그런지 별로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테일리는 소란을 피우며 나에게 계속 말을 걸었지만, 스멀스멀 찾아온 잠기운을 떨쳐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전화로 친구들을 데리고 가도 되냐고 문의하니 그래도 좋지만, 촬영 방해가 되지 않도록 지정된 좌석에서 조용히 있어야 한다고 답하길래 감사하다고 전했다.
신입이나 이쪽을 꿈꾸는 새싹들을 가끔 모아서 볼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 있다고 한다.
그러면 게임사의 기밀이 다 누출되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물론 비밀 유지가 필요할 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재능있는 새싹들에 좋은 이미지를 심어서 회사에 입사시키면 되는 거 아니냐고 웃더라.
신 캐릭터 출시까지 친구들이 소문만 내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지만 뒤이어 어차피 요즘 세상에는 유출이 안 될 수가 없으니 신경은 안 쓴단다.
그런가…?
그런데 닉 케이슨, 이 아저씨는 처음에는 좀 무뚝뚝하고 차가운 인상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옆집 아저씨 같은 분위기였다.
일할 때랑 일상일 때 분위기가 다른 건가?
앞으로 한국 지부에 담당자한테 전화하면 된다고 하길래 번호를 받아 적었다.
집에 찾아온 예화와 같이 밥을 먹은 우리는 다 같이 냥지의 차를 타고 밸보 지부로 향했다.
냥지의 차를 탄 정란이와 예화가 무서워했지만 왜 무서워하는지 모르겠네.
속도감이 제법 느껴지기는 했지만 난 나름 냥지가 운전을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친구들과 우르르 밸보 지부에 들어가니 안내해주는 사람이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라고 탈의실로 안내해 길래 문을 열었지만, 탈의실에는 웬 보기 민망한 보디슈트가 놓여있었다.
민망한 디자인은 진짜 노출이 많고 그런 디자인이 아니라 그냥 내 몸에 착 달라붙어서 몸의 윤곽이… 하여튼 내 눈에는 민망하게 보인다는 소리다.
어… 설마 입어야 할 옷이 이거?
히어로 영화에서 히어로들이 입고 연기할 때는 그저 감탄만 했었는데 그걸 내가 입고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좀 그렇네.
음, 그래도 바디 슈트 디자인은 굉장히 멋있어 보였다.
이걸 내가 입지 않았다면 더 멋있게 보였을 텐데…!
걱정하며 입어보니 처음 입어보는 바디슈트의 느낌은 굉장히 묘했는데 일단 의외로 편한 느낌이 들면서 피부에 착 달라붙은 이 감촉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내가 듣기로는 이런 옷은 엄청 불편하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부드럽고 편했지만, 이 감촉이 너무 생소했다.
처음 느껴보는 감촉인데 신소재 같은 건가…?
손으로 만져보니 미끌미끌한 촉감이 느껴졌다.
이 복장으로 많은 사람이 나를 본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뜨거워졌다.
아, 좀 부끄러운 복장인데… 괜찮아!
평소에도 방송으로 많은 사람이 날 보고 이야기하잖아!
그렇게 용기를 가지며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지만 내 발걸음을 다시 멈추게 만든 생각을 하나 떠올랐다.
이거 어떻게 보면 내가 입었던 옷 중에서 제일 야하지 않나?
노출이 하나도 없긴 하지만 몸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 어떻게 보면 몸 전부를 노출한 것만 같은 매우 부끄러운 생각.
“예지야 여기 있어? 들어간다.”
“ㄴ..냐..냐..냐냐냥지…야! 안돼!”
문고리를 손으로 꼬옥 붙잡고 있는 힘껏 몸으로 막아 섰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문고리와 당황한 냥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야! 왜 못 들어가게 해? 그보다 옷 입는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려? 뭔가 복잡한 복장인가?”
“…끄러워..!”
“응?”
“부끄러워…!”
누군가 옆에 오자마자 바로 확 체감이 왔다.
이 복장은 엄청 부끄러운 복장이야…!
부끄럽다고!
“그럼 나만 살짝 보자! 부끄럽다고 촬영을 취소할 순 없잖아! 열어봐.”
“아… 안 되는데…”
“다들 기다리는데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일단 빨리 익숙해지고 가야지. 무슨 복장인지 한번 보자.”
“우..웃지마..?”
문을 슬며시 열어서 눈만 빼꼼 내밀어 눈치를 보니 냥지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급하게 손이랑 팔로 몸을 가려보려고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어우야…”
내 가슴을 빤히 바라보는 냥지의 눈길에 몸을 돌려 소리를 빽빽 질렀다.
“여길 왜 봐…!”
“아니 웃은 건 아니잖아. 와, 이렇게 보니 한국인 체형이 아닌데? 맨날 헐렁한 옷 입고 다녀서 몰랐는데 너 진짜 끝내주는구나.”
“평가하라고 한 적 없거든…!”
엄지를 척 들면서 내 몸을 평가하는 태도의 냥지의 모습이 기가 막혔다.
“근데 네가 부끄러워하니까 뭔가 야릇한 분위기가 나는 거지. 그냥 당당한 태도였으면 괜찮을걸?”
그…그런가?
그러고 보니 다 벗는 것보다 은근한 노출이 더 시선을 끈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어본 기억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손으로 가려서 더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지.
손을 슬며시 치우자 냥지의 시선이 내 온몸을 훑어내리 듯 보았다.
아닌 것 같은데…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지금 다들 기다리니까 빨리 가자.”
“버…벌써..?”
내 손을 붙잡고 나가려는 냥지를 피하려고 했지만 좁은 탈의실에서 냥지를 피할 수는 없었고 결국에는 냥지에게 붙잡혀 촬영장으로 가게 되었다.
그래 이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이건 연기고 배우들도 알몸으로 연기한 적이 있다고 하잖아?
난 그런데 배우가… 아니 이제 배우니까!
그리고 사람들이 게임 캐릭터로 보는 거지 내 몸을 보는 건 아니잖아?
우리 게이머들은 순수하게 게임만 즐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괜찮을 거야.
야한 게 보고 싶었다면 그냥 야동이나 보겠지!
촬영장이 점점 가까워지며 투명한 막에 보호되고 있는 부스 안의 의자에 앉아있던 친구들이 나를 보았다.
눈이 휘둥그레지며 깜짝 놀란 예화와 정란이가 나에게 손짓한다.
지금은 친구들에게 가고 싶지 않아..!
냥지의 손을 끌며 바로 지나치려고 했지만 냥지가 내 손을 끌고 예화와 정란이에게 다가갔다.
“시간 없다며…!”
“사실 시간 조금 남았었는데 남았다고 말하면 종일 거기 안에 박혀있을까 봐.”
“거..거짓말쟁이!”
예화와 정란이가 날 멍하니 바라보고 있어서 아까보다 더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해주면 좋겠는데 고요한 침묵이 오히려 나를 부담스럽고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뭐라도 말 좀 해봐…”
“와, 너무 정신없이 보고 있었다.”
“이건 근데 한국인의 몸이 아닌데? 어라?”
정란이가 자기 몸과 내 몸을 번갈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는 거지?
의미 모를 행동을 반복하는 정란이의 모습에 오히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릴 것 같았다.
“어라? 같은 한국인의 체형? 왜 나는…?”
모두가 말을 잇지 못했다.
정란이는 귀여우니까 괜찮아…
그런데 냥지도 슬렌더 체형…. 내가 돌아보자마자 나를 노려보길래 시선을 피했다.
“무슨 생각 했어?”
“늘씬하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보는 냥지.
진짜인데…
어쨌든 친구들과 이야기하니 어느 정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용기가 조금 생긴 느낌이다.
친구들의 초롱초롱해진 눈빛을 뒤로하며 촬영장으로 가니 사람들이 서로 이런저런 의논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셨군요! 저는 루카스 로퍼라고 합니다.”
“서예지라고 합니다…”
노란 머리의 아저씨가 내게 악수를 청하길래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한국인이신가?
“한국인이세요…?”
“저는 한국이 좋아서 여기에 출근하고 싶다고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좋군요.”
루카스는 인사가 끝나고 바로 오늘의 촬영에 관해 설명했다.
예전에는 특수한 복장을 입어야 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고 다만 촬영을 돕는 사람이 인식을 못 하게 하는 복장을 입어야 한다 고로 신경 쓸 필요는 없다는 소리군.
그리고 바닥은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져서 바닥에 충격이 가해지면 젤리처럼 물렁물렁해진다고 바닥을 발로 쾅 밟으며 설명했다.
신기하게도 바닥은 루카스의 발이 푹 꺼지며 발목까지 땅에 잠겨버렸다.
신기해.
근데 촬영을 돕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지?
“촬영을 돕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는데 어디에..?”
“아, 그건 소품이 필요할 때 그리고 정말 어려운 동작을 할 때도 쓰기는 하죠. 그리고 이번에 예지씨가 연기할 캐릭터의 성격은…”
설명을 들어보니 지난번에 보냈던 설정이랑 똑같았다.
혹시 몰라서 다시 설명하는 건가?
설명을 끝낸 루카스는 시작 하자며 부스 같은 곳으로 들어가서 나를 지켜보았다.
뭐… 어쩌라는 거지?
“거기 걸려있는 샌드백을 예전에 방송에서 쓰셨던 백열각? 그걸 해봅시다.”
의외로 재미있을지도…?
헤헤 웃으며 샌드백을 여러 번 빠르게 걷어찼다.
“좋습니다. 하지만 예지도 알다시피 이 캐릭터의 성격 쿨하며 악랄합니다. 지금의 예지는 너무 순수하게 웃고 있어요. 좀 더 무서운 느낌으로 웃어봅시다.”
무..무섭게?
다시 샌드백을 걷어차며 나 나름 악랄하게 웃어봤다.
“자신감이 부족해 보입니다. 너무 어색하게 웃고 있어요. 그리고 이런 발차기 가능합니까?”
루카스가 누군가를 부르자 날렵해 보이는 사람이 와서 루카스의 설명을 듣고 발을 회전하며 찌르듯이 찼다.
하지만 루카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바라는 느낌은 이게 아닌데 말이죠. 예지가 제 설명대로 해보시겠어요? 방금 발차기처럼 하시면 됩니다.”
“이.. 이렇게..?”
내가 발을 비틀어 차자 샌드백은 대포 터지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고 이때다 싶어서 회심의 빌런 미소를 지었다.
“정말 완벽합니다! 제가 생각했던 그대로군요! 하지만 표정 연기가…”
진짜 악랄하게 미소 지어본 건데…!
내 눈매도 날카롭게 생겨서 웬만하면 빌런 미소가 나오지 않나?
억울해서 내가 거울로 내 표정을 보고 싶은 심정이다.
끊임없이 계속 표정 연기를 해봤지만 잘 안 되었고 스스로에게 슬슬 화가 날 지경이었다.
다른 사람들 피곤하게 하지 말고 잘하란 말이야.
으으…
“오! 방금 그겁니다! 감을 잡으셨군요.”
“네..?”
다시 미소를 지어봤지만,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부정을 한다.
“지금의 그 골든레트리버가 떠오르는 그 미소 말고 방금의 그 미소 말입니다.”
아까의 그 느낌을 살려 씩 웃어보니 루카스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그 느낌으로 갑시다. 그리고 행동도 자신감 넘치게 해야 합니다. 지금의 예지는 자세부터 너무 위축되어 있어요.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가득해야 하는 설정에 맞지 않는다는 소리죠.”
연기… 쉽지 않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