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37화 (37/78)

〈 37화 〉 두근두근

* * *

“자, 다시 한번 설명합니다. 예지씨가 연기할 테일리는 남을 믿지 못하지만, 자신에 대한 믿음은 확고하며 항상 사나운 미소를 짓습니다. 그리고 평소의 행동에 그게 느껴지도록 해봅시다.”

나는 당당하다!

난 사납다!

그렇게 자신을 세뇌 하며 당당하게 걸어봤지만 역시 다시 시작이었다.

[아직도 하고 있어..?]

네가 대신해줄래?

[조용히 할게… 파이팅!]

평소에는 나오고 싶을 때 자기 마음대로 나오더니 이럴 때만 그러네…

“왜 그렇게 위축되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무언가 불편한 점이 있으십니까?”

“어… 그냥 성격이…”

“부끄러움이 많으신 성격으로 보이니 한번 생각을 바꿔봅시다. 자, 게임이라고 생각해봅시다. 게임에서도 이렇게 플레이하지는 않으시지 않습니까? 제가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더군요.”

스캐빈저 콜 때 말하는 건가?

그때는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고 봐야 하는데 크라이는 나 스스로 활동하긴 했지만 그러고 보니 크라이는 또 괜찮았네?

게임이라고 생각하면서 해서 그런 걸까.

연기하면서도 내 모습이 다른 사람한테 어떻게 보일까 걱정했지만, 그것까지 고민하면서 연기에 집중하기 힘들어서 일단 고민은 나중으로 미루었다.

“너무 못해서 죄송해요…”

“처음은 누구나 그렇죠. 급할 이유가 없으니 천천히 합시다. 요즘은 일정을 정해두고 사람을 갈아버리는 방식은 없어졌습니다. 많은 인력을 뽑고 일정을 정하지 않고 일을 합니다. 주 4일 일하며 퇴근 시간이 되면 그냥 집에 가면 되니 스트레스받을 필요 없죠.”

숨을 고른 루카스는 재차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모두 이쪽 업계에서는 베테랑이라서 알고 있는 겁니다. 초보자를 다그쳐봐야 그들의 재능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엉망이 됩니다. 이곳 한국에서는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빨리 끝내려는 행동이 오히려 모든 것을 망치고 말죠.”

잠시 5분 정도 쉬었다 하자면서 그는 대화의 물꼬를 텄다.

나는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고 루카스는 한 점의 의심 없이 웃으면서 대답해주었다.

진짜 급한 일은 추가 근무수당을 많이 쥐여주며 부탁한다고 속삭이듯 말했다.

너무 늦으면 눈치를 주기도 하지만 결과물이 좋다면 터치하지 않는 식이고.

물론 일을 더 하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전부 집에 가서 진행 못할 거라고 한다.

주 4일이면 몇 시간 일한다는 거야?

“주 4일이면 몇 시간..?”

“보통은 주 30시간이 기본이지만 저는 대체 인력이 없어서 35시간이군요.”

그런…!

스트리머들 방송 시간보다 더 짧아?

“그리고 생각보다 괜찮은 부분이 좀 있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재미없는 이야기는 그만두고 다시 일을 재개하자고 말하면서 당신은 재능이 있다고 나를 응원했다.

친구들이 있는 부스를 보니 친구들이 손을 휘저으며 입을 오물거렸다.

힘내라는 거겠지?

좀 쉬면서 잡담하니 아까보다 마음이 편안해진 기분이었다.

게임이라고 생각하자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대화하면서 긴장이 풀렸을지도 모르고 친구들의 응원 덕분에 긴장이 풀렸을지도 모르지.

게임이야!

서예지 넌 지금 게임을 하고 있는 거야!

크라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눈앞에 적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자신을 세뇌해봤다.

게임야… 게임….

그렇게 생각하면서 씩 웃으며 왼손을 허리에 올린 채 당당하게 걸어갔다.

또각또각

왠지 모르게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샘솟듯 솟아나며 내가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내가 다른 사람으로 바뀐 듯 완전히 달라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부끄럽다고 생각했던 동작들이나 행동들을 자연스럽게 보여주었다.

나 이번에는 잘했지…?

뿌듯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니 직원들과 루카스는 진지한 얼굴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길래 뻘쭘해져서 친구들 쪽을 바라보니 모두 손뼉을 짝짝 치고 있었다.

용솟음치던 자신감은 한여름의 땡볕에 아이스크림이 녹듯 사르르 사라지고 내 얼굴이 화르르 타오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오늘 좀 덥네…?

직원들이 반응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는데…?

설마 못했는데 친구들이 위로의 응원을 해주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까의 당당한 모습은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나도 모르게 어깨는 축 늘어지고 자세가 엉거주춤 이상하게 바뀌었다.

내가 입은 보디슈트가 다시 부끄러워졌다.

여…역시 연기는 재능이 없었나?

그렇게 내가 생각하고 있는 순간 루카스가 손뼉을 치며 말한다.

“훌륭합니다. 연기는 처음이라고 하시길래 솔직히 이번 작업은 꽤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건 기쁜 오산이네요.”

“괜히 띄워주시는 거 아니죠…?”

“그럴 리가요. 어떤 동작이 더 좋을지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봤습니다.”

충분히 잘해주고 있다면서 나에게 엄지를 척 들어 따봉을 날렸다.

이거 무조건 칭찬해주는 전략 그런 거 아니지…?

어디서 들어본 방식인데 무엇을 해도 칭찬해 주면서 자신감 키워주기였나.

“좋습니다. 이제 오토바이를 타는 모습을 찍어봅시다.”

소품을 가져 오라길래 살짝 기대했다.

진짜 오토바이라도 끌고 오는 건가?

어떻게 생겼을까? 게임에서 나오는 오토바이니까 분명 남자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엄청 세련되고 멋진 디자인이 아닐까?

곧이어 직원들이 가져온 나무 박스들을 이어놓은 듯한 오토바이 형태의 종이들을 보고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내 로망과 꿈이…

근데 올라타면 부서지지 않을까..?

“이거 제가 타면 부서질 것 같은데…”

“제가 만들어서 실험해봤는데 괜찮을 겁니다.”

해맑게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종이 오토바이를 손으로 퉁퉁치는 직원분의 모습에 어색하고 웃었다.

왠지 이거 타고 연기하다가 웃어버릴 것 같은데 그러면 실례겠지…?

직원들이 고무 타이어 같은 것을 가져와 밑에 깔며 그 위에 판을 올려놓고 종이 오토바이를 세팅했다.

올라타면 되는 건가?

아까의 미소를 지으며 올라타니 내 마음처럼 종이 오토바이는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결국 버텨냈다.

근데 이거 타고 뭐 하라는 거지?

“박진감 넘치게 오토바이를 타셔야 합니다. 누군가를 노려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정면을 보고 계시고 자세 멋지게 잡아주세요. 오토바이를 몰며 자신의 원수를 떠올리는 장면입니다.”

내가 앞을 노려보며 앉아있자 직원분이 자세를 이렇게 고쳐달라고 이것저것 말하고 난 거기에 따랐다.

“다리를 좀 더… 네 그렇게. 그리고 전체적인 자세는 앞으로 향하면서 오토바이에 바짝 붙이시고. 흠, 이쪽 어깨를 좀 더 펴볼까요? 손은 좀 더 강하게 핸들을 쥐어보세요.”

웃길 거라 생각했지만, 모두가 진지하게 내 자세를 고쳐가며 평가하자 나도 덩달아 진지해져서 좀 더 좋은 자세를 생각해보며 의견을 말해보기도 했다.

직원 두 명이 내가 잡고 있는 핸들을 같이 붙잡고 남은 한 명은 오토바이 뒷부분을 붙잡고 밑의 판을 밟으면서 이리저리 흔들었다.

“좋습니다. 이거 생각보다 너무 수월하군요. 계속 이대로 갑시다. 이번엔 절벽 아래의 누군가를 보고 급브레이크를 밟는 장면으로 가봅시다.”

대략적인 구도의 설명을 듣고 촬영을 준비했다.

밑의 고무 타이어와 판을 치우며 종이 오토바이에 다시 올라탔다.

이거 근데 종이 맞나?

몸체를 만져보니 목재로 만든 오토바이였다.

종이 박스처럼 생겼었는데 신기하네.

다시 두 명이 붙잡고 서서히 몰고 가다가 급하게 틀면서 세우고 나도 힘을 주면서 아래를 노려보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힘을 너무 줘서 그런지 오토바이 핸들이 뽁하고 뽑히는 느낌이 들어서 슬쩍 보니 핸들이 뽑혀서 내 손에 들려있었다.

“이런 제법 튼튼하게 고정했다고 생각했는데 허허”

“힘이 제법 강하신가 봅니다.”

“죄송합니다…!”

어차피 오토바이는 이제 필요 없다면서 웃어넘기며 직원분들이 오토바이와 부서진 핸들을 들고 나갔다.

뒤이어 나에게 와이어를 연결한 뒤에 사다리에 올라가 꽉 붙들고 있었고 여직원이 다가와 내 몸을 잡고 강하게 흔들었고 다른 사람은 사다리를 붙잡고 흔들었다.

건물 밖으로 떨어지려는 것을 버티려는 장면이라던가?

루카스는 시계를 슬쩍 보더니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퇴근 시간이라서.”

아, 맞다.

친구들!

지루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부스 안에 들어가니 다들 생각보다 흥미진진하게 나를 보면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냥지만 왔으면 심심했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와, 너 오늘 진짜 멋있더라. 난 네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상상도 못했어!”

“나 보고 깜짝 놀랐잖아. 오늘은 예지가 더 예뻐 보인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대단해~”

“좀 멋있긴 하네…”

순서대로 예화, 정란이, 냥지의 평가였다.

냥지는 좀 더웠는지 얼굴이 약간 붉었었다.

이제 슬슬 가을인데 냥지가 몸에 열이 많나?

끝도 없는 친구들의 칭찬에 그만하고 밥이나 먹자고 친구들의 등을 밀며 재촉했다.

그렇게 무작정 칭찬하면 부끄럽다고….

“인제 그만 떠들고 나가서 밥 먹자…”

“그래 밥 먹자! 밥! 얘들아 뭐 먹을까!”

냥지도 배가 고팠는지 평소보다 더 높아진 목소리로 우리들을 이끌고 나갔다.

마치 발등에 불이라도 붙은 모습으로 다급하게 나가는 냥지의 모습이 이상했지만, 배가 아주 고팠나 보다 생각했다.

도중에 나가서 먹고 왔으면 됐을 텐데 분위기 때문에 그런 걸까?

다음에는 나 혼자 와야겠다.

****

시무룩한 표정으로 관계자와 이야기하고 있는 예지에게 힘내라고 손을 휘저었다.

다행히 예지가 봤는지 얼굴이 밝아지며 재개하였다.

예지의 성격상 이런 자리에 온 것도 기적인데 열심히 꼼지락대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대견하게 보였다.

우리의 응원 덕분인지 아니면 좀 쉬어서 그런지 예지는 아까와는 달리 당당하고 멋진 워킹과 미소를 지으며 내 쪽을 바라보며 우아하게 걸어왔다.

성큼성큼 터프하게 걷는 느낌이 들면서도 우아한 느낌이 동시에 드는 설명하기에는 이상하지만, 지금의 예지 분위기와 상당히 어울리는 자세였다.

나를 보며 사납고 짙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불꽃같이 타오르는 듯한 착각을 부르는 눈길로 이쪽을 응시했다.

두근

처음 보는 예지의 열정적인 눈빛에 왠지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평소처럼 졸린 듯 반쯤 감긴 눈빛이 아니었다.

반쯤 감긴 건 똑같지만 무언가 다른 느낌.

살짝 부담스러워져 고개를 돌리니 정란이도 나를 바라보고 있어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나랑 정란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화했다.

“예지 오늘따라 멋있네.”

“그러게. 반할 뻔!”

아까부터 조용하면서도 시끄러운 이상한 응원을 하고 있던 예화를 바라보니 입을 손으로 가리며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존나 멋있어… 미쳤나 봐.”

정말 격하게 반응하는구나.

지루할 틈도 없이 예지의 연기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예지가 부스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끝났어?”

“오늘은…? 근데 이제부터 자주 나와서 찍어야 해…”

아까의 모습과는 달리 예지는 평소의 모습이었다.

무언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와, 너 오늘 진짜 멋있더라. 난 네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상상도 못했어!”

“나 보고 깜짝 놀랐잖아. 오늘은 예지가 더 예뻐 보인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대단해~”

“좀 멋있긴 하네…”

아까 연기하던 모습이 다시 떠올라 얼굴이 살짝 따뜻해졌다.

쿵 쿵

연기를 너무 잘해서 흥분했을 뿐이야.

그러니까 예지의 연기에 팬이 된 거지.

처음 했음에도 불구하고 재능이 있는지 금방 연기에 능숙해지는 예지가 멋있긴 하잖아?

“인제 그만 떠들고 나가서 밥 먹자…”

“그래 밥 먹자! 밥! 얘들아 뭐 먹을까!”

왠지 모르게 언성이 높아진다.

나도 모르게 배가 고팠나?

하기야 4시간 동안 구경했으니 그럴 만도 하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