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38화 (38/78)

〈 38화 〉 신 캐릭터 제작 썰

* * *

단언컨대 제일 힘들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성우였다.

그저 행동만으로 연기했던 모션캡처 촬영과는 다르게 그 캐릭터의 목소리가 되는 성우는 나에게 제대로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뭔지 확실하게 알려주었다.

심지어 평소의 내 말투처럼 소심하게 혹은 떨면서 말하면 무조건 다시 녹음해야 했다.

그리고 게임 캐릭터 대사라서 그런지 현실적인 말투가 아닌 경우가 참 많았는데 내 성격이 소심해서 그런지 조금만 읽어봐도 수치사 직전까지 나를 몰고 갔다.

이걸 끝으로 그만둘까?

돈은 많이 줬는데 어차피 난 이제 돈이 딱히 의미가 없기도 하고….

나를 돈으로 사려고 하는 건가! 날 모욕할 셈인가! 라고 꾸짖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돈이었다. 그 드립이 생각나는 날이었다.

사실 생각만 이렇게 하는 거지 이미 시작한 일이고 익숙해지니 생각보다 재미있어져서 그만두기에는 아까웠다.

엄청 부끄러웠지만, 생각보다 뿌듯하고 재미있는 그런 기분이 꽤 괜찮았기 때문에 계속할 생각이긴 한데 언젠가는 익숙해지겠지…?

필요한 말만 하는 과묵한 복수귀가 컨셉이었는데 그 덕분에 대사가 짧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에 섹시 담당이나 쾌활한 성격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읽어보니 섹시 어필 대사가 조금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과묵한 복수귀가 왜 섹시 어필이 필요하죠?

투명한 창문 너머에 있는 사람들이 시작하라는 사인을 주었다.

“펴…편하게 죽을 생각 하지 마…”

“말을 떠시면 안 돼요. 다시 해봅시다.”

“죄송합니다…”

“예상대로 비명이 멋지군…”

“좀 더 자신 있게 그리고 말을 흐리시면 안 돼요.”

“생각보다 강한데 한번 즐길까…?”

즈…즐긴다고..?

뭘…?

아니 나도 과거에는 남자였으니 뭔지는 알겠는데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야..?

이걸 내가 말하려니 부끄러워 죽겠네..

“어.. 캐릭터 이해 때문에 그런데 과묵한 복수귀가 말하기에는 너무 그렇지 않나요..?”

“싸움을 즐긴다는 설정입니다. 모호하게 들리도록 일부러 대사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네요.”

“이제 우리의 악연을 끝낼 때가 왔다… 크롭 하워드.”

“난 그날을 아직 잊지 못한다. 넌 잊었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끝없는 연습을 계속해서 그런지 말을 떨 거나 더듬지 않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역시 뭐든 연습하면 실력이 느는 걸까?

“이날만을 기다려왔다! 죽어라!”

“하!”

“으으윽..”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게 나한테도 느껴지긴 하는데 여전히 부끄러워…

으으윽…

하여튼 그렇게 지냈다.

그 후로 나는 자주 모션 캡처나 녹음하러 갔고 냥지는 항상 따라오려고 했지만 냥지의 방송을 방해하면서 그러길 원하지 않았기에 냥지를 설득했다.

냥지가 살짝 토라지기는 했지만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몰래 와서 보고 있었다.

올 때마다 얼굴이 가끔 붉어지는 것이 걱정되긴 했지만, 의수가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해서 넘어갔다.

굳이 기를 쓰고 막아야 할 이유가 없어서 그냥 넘어갔다.

사실 나와 내 친구들의 방송 시간은 꽤 불규칙하기 때문에 그렇게 큰 지장이 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불규칙하다고 해도 아침에 방송 시간을 공지하긴 한다.

그리고 정란이는 이사가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꽤 자주 우리 집에 찾아왔고 이상할 정도로 자주 묵으려고 하는데 문제는 나와 자려고 안달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정란이가 자주 찾아와서 냥지가 기뻐하긴 했지만, 침대 쟁탈전은 자주 벌어졌다.

침대도 있는 애들이 굳이 비좁게 자려고 하는 이유가 짐작되지 않았고 이해가 되지 않아…!

일단 정란이는 의수의 말로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으나 나노봇으로 완벽하게 건강을 되찾았다.

일반인의 절반도 먹지 않았던 정란이는 절반이나마 먹는 수준이 되었고 약간이지만 힘이 세지고 잠을 잘 자는지 예전보다 더 활기찼다.

그런데 약간씩 바뀐 수준인 것 같은데 의수의 말로는 이게 한계라고 의수의 입장에서도 당황스러웠는지 AI 답지 않은 반응을 보여주었다.

[정란이가 생활 패턴이 많이 엉망이었구나…]

[특이 케이스. 이제 건강한 건 확실하지만, 겉보기에는 비슷함.]

살이 약간 붙은 것 같기는 한데…

정란이 본인은 친구들과 자주 만나서 그런 건가 신기하다고 하면서도 몸에 힘이 넘친다고 좋아했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가끔 의미 없는 팔딱거림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내 입장에선 저건 어떤 의미의 행동인가 싶기도 했었지.

예화도 몸이 안 좋다고 들었는데 스트리머들의 공통점일까?

몸 관리 잘하는 유튜보나 스트리머도 많이 보였는데… 아! 그건 운동 방송하는 스트리머들이었나?

요즘 예화가 바쁜지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아 나노봇을 주입하지 못했지만 언제 기회를 봐서 한번 넣어줘야겠다.

친구들이 건강하면 나도 좋지.

요즘 친구들이 나에 대한 시선과 인식이 좀 많이 바뀌었는데 일단 바뀐 점은 가끔 친구들이 연기했을 때의 모습을 보여주라고 말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살짝 당황했다.

집에서까지 연기하는 건 아직은 부끄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연기할 때의 모습이 예전 모습이 아니냐고 농담을 하기도 했지만 테일리는 일단 아니라고 한다.

가끔 방에서 거울 보고 연습하다가 들킨 뒤로는 가끔 놀림 받긴 하지만 다들 재미있어하니까 상관은 없지만, 친구들의 요구대로 바로 코앞에서 연기하려니 좀 부끄러워서 그만두었다.

오늘을 끝으로 나도 자유로워졌다.

이제 녹음도 모션 캡처도 다 끝났으니까.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 나는 오늘도 놀러 와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고 있는 정란이와 냥지의 입에 청포도를 씻어와 한 알씩 쏙쏙 넣어주었다.

소파가 넓긴 했지만 둘이 드러누울 정도는 아니었는지 냥지에게 살짝 안긴 정란이가 편안한 자세로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아기 새가 어미 새에게 모이를 받아먹는 것처럼 입을 쩍 벌려 내가 주는 포도알을 받아먹던 정란이가 갑자기 깜짝 놀라며 비명을 지른다.

“그.. 글러 먹은 인간이 되고 있어!”

“원래 그렇지 않아?”

“그렇넹. 청포도 땡큐.”

다시 누운 정란이의 입에 넣은 청포도를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야뭉이에게 밥을 주었다.

야뭉이와 난 제법 친해졌다고 자부할 수 있다!

우우우웅

휴대폰의 진동 소리에 나는 방에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최근 촬영이 다 끝났고 가끔 수정하거나 추가한다고 불려가서 찍는 게 전부이기 때문에 연락은 거의 없었는데 오늘도 수정인가?

어쩌면 너무 빨리 끝나서 문제가 생겼으려나? 그쪽에서도 이렇게 빨리 끝난 건 오랜만이라고 말했었지.

“예지씨 혹시 바쁘십니까?”

“아뇨. 말씀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지난번에 말한 비밀 유지 말입니다.”

“혹시 퍼지기라도…?”

내 친구들은 하지 말라면 안 하는데?

다른 쪽에서 세어나간 게 아닐까?

“그건 아니고 이제 슬슬 광고를 해야 하는데 방송에서 언급해주면 좋겠습니다. 물론 광고비는 챙겨드리죠. 비하인드 스토리를 풀어도 좋고 어떤 식으로도 상관없습니다.”

“친구들도 스트리머라서 홍보에 도움이 될 텐데 괜찮을까요..?”

“거절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한국은 꽤 중요한 시장이니 괜찮은 생각이군요.”

통화를 끊고 예화에게 우선 말을 해뒀다.

구경 갔었던 일을 방송으로 언급만 해도 돈을 받는다니까 완전 난리였다.

정란이랑 냥지한테도 말해주자.

“엥? 그냥 썰만 풀어도 돈이 이렇게 복사가 된다고? 예지는 신인가?”

“역시 우리 예지가 최고야!”

기뻐하며 만세를 하는 동안 둘의 휴대폰이 울렸고 곧바로 통화했다.

이번 광고 건에 대해서 설명하는 건가?

어쨌든 둘을 내버려 두고 나는 내 방에 들어와서 방송을 켰다.

테일리 Just Chatting

[광고] 배우가 된 후기

[ㅎㅇ]

[테하]

[드디어]

[젠장 기다렸다고!]

[2주일이나 방송을 쉬는 스트리머가 있다?]

[ㄹㅇㅋㅋ]

모션 캡처나 녹음을 시작한 지 2주 정도 지났을 때쯤에 나는 시청자들을 놀라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었고 공지로 녹음이나 모션 캡처로 많이 바빠져서 방송을 2주 정도 쉰다고 알렸었다.

내가 봐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볼 정도로 아예 다른 말투와 행동이었으니 장난기가 돌았다고 해야 하나?

“안녕! 오랜만이지?”

[?]

[???]

[??]

분위기가 다들 왜 그러지?

내가 기대했던 반응과는 완전히 달라서 살짝 당황했다.

[누구세요?]

[2주 동안 쉬었더니 말 더듬는 거 고쳐왔네 ㅋㅋㅋ]

[ㄷㄷㄷ]

아.

무의식적으로 평소와는 다르게 말했네.

“그…그런가요..? 방금까지 녹음하다 와서..헤헤”

[??]

[왜 다시 돌아와 ㅅㅂ]

[좋은 말로 할 때 다시 똑바로 말씀하십쇼]

[나]

[락]

[도르마무 거래를 하러 왔다! 도르마무 거래를 하러 왔다! 도르마무 거래를 하러 왔다! 도르마무 거래를 하러 왔다! 도르마무 거래를 하러 왔다! 도르마무 거래를 하러 왔다!]

“아니… 뭔가 부끄러워져서… 얘들아… 모션 캡처 말인데…”

[거 됐고 말이나 다시 똑바로 하쇼.]

[어이 예씨 잔말 말고 아까처럼 말해.]

[끼에에에에에에ㅔㅔㅔㅔㅔ]

[2주 동안 쉬다가 와놓고 사람 미치게 하네…]

[ㄹㅇㅋㅋ]

“아직 안 익숙해서… 천천히 고쳐볼게요…!”

[이미 고치고 다시 고장 내면 어떻게 합니까]

[ㅋㅋㅋㅋㅋㅋㅋ]

한번 의식해버리니 나도 모르게 다시 말을 더듬었다.

친구들이랑 대화할 때는 연기 톤으로 안 말하고 괜찮았는데…?

어쨌든 아까의 분위기는 사그라들고 다들 동의했다.

“모션 캡처 해봤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더라고요…! 부끄럽긴 했는데 다른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연기하니까 내가 아닌 느낌이라 재미있었어요…! 다만 좀 부끄러워서…”

[올ㅋㅋ]

[근데 캐릭터 이름이랑 복장은 뭐임?]

[아ㅋㅋ 드디어 흰 티랑 청바지 벗어나는 거냐고 ㅋㅋ]

“흰 티랑 청바지 안 입은 지가 언젠데..! 요즘은 이렇게 예쁜 후드티랑 동물 잠옷 입고 했었잖아…!”

억울해서 내가 입고 있는 후드티를 내밀면서 보여주자 시청자들의 반응은 영 시원찮았다.

[예쁜 옷 좀 입으라고 ㅋㅋ]

[지난번에 토끼 잠옷은 귀엽던데]

[그 외모 그렇게 쓸 바에 저 주십쇼.]

“싫어…! 입고 싶은 거 입을 거야..!”

[ㅠㅠ]

[목소리 녹음할 때 어땠음?]

“녹음할 때가 제일 부끄럽더라… 나 얼굴 터지는 줄 알았어… 나 한동안 진도도 못 나간 적 있었어…”

[ㅋㅋㅋㅋㅋ]

[대사 딱 하나만 해주라]

(대사 한번당 만 원)

제발…

[ㅋㅋㅋㅋㅋㅋㅋ]

[이래도 안 해?]

“안 해…!”

[여러분의 힘이 필요합니다!]

[후원 모금 ㄱㄱ]

[선생님들 이거 실패하면 저 정말 힘들 것 같습니다…]

[사람 하나 살려야지 ㄹㅇ]

[하나가 아닌데요?]

(대사 한번당 31,000원)

제발…

[이래도?]

“응, 안 해…!”

돈은 벌 만큼 벌었는데 어디서…!

[이 아이가 배가 부르다는 느낌을 알까요?]

[모두 힘을 모아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누가 안 했냐?]

기하급수적으로 금액이 너무 올라가길래 취소를 누르고 딱 한 번만 해주기로 했다.

이제 방송은 취미에 가까워져서 후원은 이제 받으면 좋고 못 받으면 말고 이런 식이라서 후원을 취소해도 상관없었고 딱 봐도 무리하면서 돈 쓰는 티가 나서 그냥 해주기로 했다.

[갓일리 ㄷㄷ]

[세계 최고의 스트리머 서예지]

[평소 느낌이랑 제일 다른 거로 해주세요]

[지금 예화 냥지 정란이가 푸는 예지 썰 들으면서 예지 방송 보니 웃기네여 ㅎㅎ]

“안 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 다시 보기 풍년이네]

[내 하루 어쩔 거냐고 ㅋㅋ]

“시작할게요… 난 널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하워드. 갈기갈기 찢어주마!”

평소의 연기 때처럼 고함을 지르며 대사를 말했다.

[와]

[지렸다 ㄹㅇ]

[갈아입으세요;;]

[순간 쫄았음]

[아니 ㅋㅋ 이렇게 잘하면서 왜 그렇게 소심하세요 ㅋㅋㅋㅋ]

[왜 부끄러워하는지 아시는 분?]

“아싸는 원래 이런 게 좀 부끄러워…”

[같은 아싸인데 모르겠는데요?]

[아싸인 척 ㄷㄷ]

[아싸 기만]

[인싸들은 진짜 아싸가 뭔지 모른다니까]

[빨리 나와라 ㄹㅇ 예지 한번 보고 싶다]

[그동안 참아왔던 팬심을 드러낼 수 있는 날이 오네…]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그러십니까? 다들]

[악수;]

[행복 잡기 당하고 싶어서…]

2주 만에 방송해서 그런지 한 달간 말하고 싶어도 말 못 했던 썰을 신나게 풀며 놀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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