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41화 (41/78)

〈 41화 〉 고스트

* * *

“서예지라…”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고 조작된 주민등록증.

한국인으로 보이지 않는 외모와 몸에 남아있는 전쟁의 흔적.

그리고 심문실에서 보인 트라우마.

한국에서는 서예지라는 신분을 만들어서 숨은 듯 보이지만 테일리에게는 사회보장번호로 만들어진 은행 계좌가 따로 있었다.

서예지라는 이름의 통장을 주로 쓰지만, 일정 금액을 일정 주기마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테일리 이름의 계좌에 보냈는데 용도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걸로 숨겨왔던 정체가 들통났지.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은행원이 보고 있는 와중에 수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영업 시간이 지나고 시도했지만 때마침 시스템에 오류가 생겨 직원들이 테스트를 하는 도중 이변이 발생했었지.

개설된 계좌의 이름은 꽤 인지도 있는 유명인이었고 조사를 했지만, 수상한 점이 단 하나도 없던 것이었다. 아니, 딱 하나 있었지.

유일하게 수상한 점은 테일리를 아는 사람도 어떠한 활동의 기록도 존재하지 않았고 이것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간처럼 갑자기 방송을 시작한 날 전에는 무엇 하나 기록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의 국민임은 분명했다.

사회보장번호가 존재하고 20년 전에 위조가 불가능하게 바뀌었다.

어쩌면 뚫는 방법을 알아냈을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테일리처럼 비슷한 사람이 몇 있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공통점을 대부분의 고스트 부대원들이 가지고 있었다.

과거에 수뇌부 암살을 위해 만들어진 고스트 부대.

부대원들은 세상에 존재했다는 기록이 모두 말살 된 채 죽음을 각오하고 투입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죽어도 아무 지장이 없을 사람들을 모아 세상에 존재가 지워지고 암살자로 키워져 일회용 도구로 쓰인다.

그들의 삶을 비유하자면 하나의 탄환이었다.

전쟁영웅이 되어 묘지에 묻히지도 못했다.

그때의 그들은 존재하지 않은 인간이니까.

이 부끄러운 과거를 반성하며 희생자들의 존재를 찾는 것이 추격자인 우리가 할 일이었다.

죽었다면 시체를 찾아 귀환하고 살았다면 그들을 설득하여 데려온다.

서예지는 고스트 부대원으로 의심할만한 사람이었다.

사고라고 하지만 핏물 속을 구르며 총알이 휘날리던 시대의 사람들은 알고 있다.

저 흉터는 그저 사고의 흔적이 아니라는 것을 모를 수가 있을까?

시체 구덩이 속에서 눈을 뜨며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던 사람들은 안다.

폭격으로 생긴 지옥 같은 구렁텅이에서 기어 나온 자들은 알고 있다.

포로로 잡혀간 동료가 시신으로 돌아왔을 때 그 끔찍한 고문의 흔적을 봐온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 수밖에 없다.

그 끔찍한 고문을 직접 당해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우린 그 끔찍한 시대에서 살아남아 평화를 이루어낸 산 증인이니까.

처음에는 나이를 듣고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스캐빈저 콜에서 너무 많은 힌트를 주고 말았다.

문제는 이를 숨길 생각도 없었다는 건데 여태까지 주도면밀하게 정보를 조작하고 숨기던 행보와는 상당히 달랐다.

기억이 온전하지 않다고 말하는데 그것 때문일까?

일단 서예지를 데려와야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데 문제는 여태 살아남은 고스트 부대원은 모두 돌아가지 않으려고 저항을 한다.

강제로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들을 데려오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들에게 다시 상처를 주는 꼴이니까.

사과하기 위해 상처를 주다니 그 무슨 모순된 행동일까.

당연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골치 아프군.”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본인의 나이를 속인 건지 진짜인 건지 모르겠는데 21살이 그때의 고스트 부대원일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고 적어도 20대 후반이어야 가능한데… 부끄럽지만, 전쟁이 한창 격화됐을 때는 미성년자 고스트 부대원도 있었으니까.

분명 나이를 속이고 있고 20대 후반에서 30대로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어쩌면 21살 때의 기억이 남아서 자신을 21살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존 크로우 빌어먹을 새…

존 크로우와 콘래드 오클렛이 그때 죽지만 않았어도 이 좆 같은 짓을 끝낼 수 있는데 도저히 끝이 보이지를 않는군.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들어 담배를 입에 물고 오른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빨간 불빛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연기.

“Every cloud has a silver lining.”

모든 구름은 은빛으로 빛나는 쪽이 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하더라도 방법은 있다. 이 일이 힘들 때 가끔 생각하는 말이다.

지금의 평화는 군인들의 피와 희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평화로운 세계에 아직도 그 핏물 속에서 헤매는 사람이 있었고 우리는 그녀에게 과거의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

그녀에게는 빛이 있었을까?

****

나는 생각이 없다.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오늘따라 노곤하게 느껴지는 몸을 거실 바닥에 뒹굴면서 표현했다.

이건 진짜 피곤해서 이러는 게 아니야.

애초에 내 몸은 나노봇으로 인해 피로를 느끼기 힘든 몸이었다.

그냥 이때까지 열심히 달려온 나에게 주는 상?

그런 개념이었다.

다들 한 번쯤은 바닥에 뒹굴며 게을러지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따스한 햇볕에 누워 뒹굴고 있으면 이게 고양이들이 항상 창문가에 누워 자고 있던 이유인가 생각해보기도 하고.

옆에 들러붙어 오는 야뭉이를 살짝 밀어내고 바닥을 뒹굴고 있으니 어느새 냥지도 정란이도 합류하고 예화도 옆에 뒹굴었다.

[따뜻하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나한테 모일 필요가 있을까?

그 넓던 거실이 비좁게만 느껴진다.

“가끔은 이렇게 쉬니까 마음이 편하네.”

“응?”

“뭐야? 방금 예지가 말했어?

왜 그러지?

내가 뭔가 잘못한 것이라도 있나?

“너 요즘 점점 말투가 바뀌는 것 같다?”

“그…그런가..?”

“야, 이년아! 그걸 말하면 다시 돌아간다고!”

“아! 미안!”

“예화는 바보야~ 눈치가 없엉~”

“너도 똑같아.”

모처럼 햇볕을 즐기며 평온한 분위기였는데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가을이 와서 그런지 노랗게 물든 단풍잎들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나며 그 때문에 낙엽들이 살랑살랑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런 풍경이 보기 좋아 이따금 창문에 기대서 창문 밖을 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이제 나에게 온도는 상관없었지만 가을 특유의 적당한 온도에 이 풍경이 좋아서 가을을 기다린 적이 많았다.

누워서 창밖에 잎이 떨어지는 것을 구경하다가 외국인으로 보이는 누군가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꽤 멀리 있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다니 우연일까?

어쩌면 그도 이 풍경을 구경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주변의 사람들도 위를 올려다보며 구경하고 있었고 나랑 눈이 마주쳤던 외국인도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우연히 마주친 게 맞는 모양이다.

잘 생각해보니 마주쳤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내 존재를 확인조차 못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시력이 엄청 높아서 나는 그를 봤지만, 그는 누워서 얼굴만 내밀어 창문 밖을 보고 있는 내가 잘 보이지도 않을 테니까.

떨어지는 낙엽을 구경하다가 갑자기 벌어진 홀로그램 연극을 구경했다.

홀로그램으로 연극을 보여주는 건데 가끔 공원에서 나타나 작은 연극장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공원에 산책하는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 구경하며 사람이 많은 시간대에는 가족들이 애를 데리고 소풍 나오기도 하더라.

여기 연극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내가 있었던 세계의 연극이랑 좀 다를 때가 많기는 하지만 오히려 색다르게 느껴져서 내 흥미를 돋울 때가 많았다.

나른하게 누워 구경하던 중 갑자기 냥지가 내 옆구리를 간지럽혀온다.

“이..이히히… 하지 마!”

갑자기 볼을 부풀리며 살짝 삐진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냥지에게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예전에 나랑 했던 약속 잊어버렸지?”

약속…?

무슨 약속을 말하는 거지?

“야! 기억 못하는 거 봐! 서예지 너 지금 하나도 기억 안 나지?”

옆구리를 간지럽혀오는 냥지의 손가락에 저항도 못 하고 신나게 웃기만 했다.

노래를 가르쳐 주기로 했었지..!

지은 죄가 있기도 하고 뿌리치다가 다칠까 봐 무섭기도 하니까.

1분 동안 간지럼을 당하면서 왜 간지럽히기가 고문이라고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내 몸이 바뀌고 나서 간지럼을 더 못 참는 것 같기도 하고.

“그만해에…”

“잘못했어? 안 했어?”

“잘못했어… 항복…!”

“언제 해줄 거야?”

“내일…!”

냥지가 살짝 기분이 좋아진 얼굴로 웃었지만 방금까지 열심히 간지럽히면 당하던 나에게는 무섭게 보였다.

근데 진짜 가르쳐줄 게 하나도 없는데?

내 실력으로 부르는 게 아니라서 가르쳐주기도 뭐한데 테일리 네가 알려줄래?

[나 가르치는 거 못하는데..?]

나보다는 잘하겠지!

[그냥 수집가한테 물어봐… 책 내용 하나 읽어주겠지..]

수집가가 누군데?

[네 팔에 있는 AI 이름인데..]

아, 맞다!

이름 지어주기로 했는데 조만간 빨리 지어줘야겠다.

이봐.

의수야!

[용건.]

너도 알고 있잖아.

해줄 수 있어?

[거절.]

해줘.

[에너지 부족. 곧 시스템이…]

맨날 그런 식으로 빠져나가는 거 알거든?

제발 해줘!

오랜 설득 끝에 결국 의수가 도와주기로 했다.

맨날 쓰던 핑계가 막혔다는 걸 알았는지 투덜투덜하긴 했지만 괜찮겠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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