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45화 (45/78)

〈 45화 〉 전투

* * *

내가 델리를 어깨에서 떼어내고 안대를 벗자 친구들이 나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항상 끼고 있었는데 빼니까 좀 어색해서 그런가?

맨날 안경 끼던 친구가 안경을 벗고 오면 확실히 인상이 많이 달라지긴 하겠네.

VR에서는 팔 하나 없이 자주 놀았는데 현실에서는 느낌이 좀 달랐다.

오늘따라 평소와는 상태가 좀 달랐는데.

눈과 어깨의 환상통이 심했고 피곤하며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강철 같은 체력을 자랑하던 내 몸도 악몽을 꾸고 정상적인 상태는 아닌 모양인데 정신적으로 많이 피로해서 그런지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너무 피곤하게 느껴졌다.

사실 예지 ver. 3 이렇게 말했지만, 그 꿈은 나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사람의 따뜻한 온기가 그리웠었다.

아직도 아까의 꿈이 기억나 손이 벌벌 떨렸으니까 나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줬는지 알 수 있었다.

테일리도 그 여파를 피할 수 없었는지 오늘은 말도 없었다.

사람들은 가끔 컨디션이 안 좋으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가끔 있지 않은가. 특히 직장인들.

나에게는 오늘이 그런 날이라는 뜻이다.

“오늘은 왜 다 빼고 나왔어?”

“오늘따라 피곤해서… 없으면 어떨까 싶기도 했고.”

“한번 만져봐도 돼?”

“마음대로…”

소파에 기대어 앉아있는 내 옆에 냥지가 성큼 다가오더니 어깨를 살며시 쓸어 내리며 만져보았고 익숙지 않은 감촉에 움찔 떨었다.

“아파?”

“아니, 가끔 환상통이 있긴 한데 만진다고 아프진 않아…”

냥지의 손가락이 흉터를 따라 그리듯 만졌다.

너무 조심스럽게 만져서 부끄러우면서도 간지러웠다.

정란이는 흉터 지우는 약이라고 연고 같은 걸 가져와서 친구들이랑 같이 어깨랑 눈에 골고루 바르긴 했지만 이게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파여진 살이 복구가 되는 건 아니지 않나.

다른 애들도 만지작거리는데 만져보라고 하긴 했지만 그게 다른 부위를 뜻한 게 아니었는데 특히 예화의 손동작이 음흉하기 짝이 없었다.

귀찮아서 떼어내지는 못하고 말로만 그만 하라고 말한다.

“그만…”

“이게 말이 돼? 이게 자연이라고?”

수양이는 어떤 운동을 하길래 이렇게 몸이 탄탄한지 물었는데 내가 가르쳐줄 수 있다고 말하니 갑자기 화들짝 놀라 고개를 열심히 저었다.

왜 그런 반응인 거야?

오늘은 사람이 그리운 날이라 바로 옆에 붙어있는 예화를 왼손으로 품에 안고 TV를 봤다.

예화는 평소에도 말이 많았지만 당황하면 말이 더 많아지는 게 특징인지 정말 쉬지도 않고 끊임없이 입을 놀렸다.

“오우야, 진짜 좋다. 내가 이런 포지션인 건 처음인데.”

“예화 빨개졌다.”

벗어나려고 내 품 안에서 꾸물거렸지만 아까 정란이와 수양이를 안았던 것처럼 못 빠져나가게 힘을 줬다.

오늘은 사람의 온기가 필요한 날이니까.

“꺄하핳핳, 너무 화끈한데? 아니, 와.”

“행복해 보이시네요. 예화씨.”

“원래 예지 옆에 있으면 행복해진답니다. 다들 잘 아시잖아요.”

“음음, 맞지 맞지. 나 처음에는 안 믿었는데 같이 자니까 체감이 확 오더라고 갑자기 피로가 확 풀리던데 진짜 인간 테라피인가?”

내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나도 모르는 나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놀았는데 평소라면 나에게 착 달라붙어 말하는 지금 상황이 부담스러웠겠지만, 지금의 나한테는 오히려 고마운 상황이어서 이 상황을 마음껏 즐겼다.

그런데 들으면서도 내가 언제 그랬지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는데 귀찮아져서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밖에서 기분이 더러워지는 이상한 시선이 느껴지는데 아까부터 일어나기 귀찮아서 가만히 있었지만 이 정도면 제발 보라고 매달리는 수준이었다.

고개를 돌려 밖을 보니 웬 이상한 남자 둘이서 정확히 이쪽을 바라보며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스토커?

표정을 보니 추측하지 않아도 좋은 의도는 당연히 아닌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뭔가 불쾌한데…

요즘 계속 느껴지던 시선이 저 사람들이었나?

지난번의 시선들은 꽤 괜찮았던 것 같은데…

일단 이쪽의 정당방위 기준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행동할 때 딱 끝장을 내야겠다.

오늘 수양이 저녁 먹이고 택시 태워서 보내야겠다.

요즘 택시들은 무인 자동차로 자율주행을 하는데 덕분에 사람들이 안심하고 탈 수 있다고 한다.

한때 택시기사들이 일자리 문제로 파업하거나 시위하긴 했는데 택시기사들은 택시 정비사 그런 거로 바꿔서 한다고 하더라.

공부해야 할 것들이 엄청 많이 생기긴 했다는데 뭐 그래도 다행 아니겠어?

돈은 많이 나오겠지만 내가 부르면 내 계좌에서 돈이 빠져나가니까.

재산이 많아진다는 것은 이렇게 좋은 법이다.

없으면 추해지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친구끼리 같이할 수 있는 게임을 하면서 놀았다. 스이치에 모리오 같은 친구랑 같이 할 수 있는 게임 말이다.

VR 게임들이 인기를 독차지하여 PC게임들은 태반이 점유율이 갈려 나갔지만 그건 스이치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고 한다.

가족이랑 같이 할 수 있는 게임 그리고 친구가 오면 가볍게 즐기기 좋은 파티 게임임을 내세운 게 효과가 좋았다고 하는데 하기야 지금의 VR 게임들은 가볍게 즐기기에 무리가 있는 게임들이었다.

격투 게임 크라이, 오픈 월드 FPS 스캐빈저 콜, 곧 나올 AOS 게임 쇼크워, 언제 나올지 모르는 MMORPG 게임과 힐링 게임.

기깃값도 좀 비싼 편이라 집에 여러 대 두기 힘들고 접속 방식도 침대에 누워서 접속해서 게임을 하는 형식이라 좀 그렇긴 하겠네.

“저녁 먹을까…?”

“도와줄게!”

“나도!”

친구들이 전부 일어나서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부엌이 좁아져서 오히려 불편해질 듯 보여 그냥 앉히고 나 혼자 재료들을 꺼내 요리를 했다.

여기서 파스타 싫어하는 사람들은 없으니까 크림 파스타를 만들기로 했다.

의외로 파스타는 만들기가 쉽고 재료가 얼마 들어가지 않아서 가볍게 만들어 먹기 좋은 요리다.

왼손에 칼을 들고 썰어야 할 재료를 노려봤다.

역시 팔 하나로 요리는 버겁기는 하네.

한쪽 손은 재료를 고정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곤란한데.

지금이라도 내 방에 들어가서 델리를 착용하고 올까?

“이건 내가 할게.”

보다 못한 친구들이 결국 우르르 몰려와서 만들었다.

내가 하려는 것마다 친구들이 와서 대신해주겠다고 나를 밀어내며 대신했는데 저녁은 분명 내가 만들어준다고 했는데 어느새 나 혼자만 가만히 앉아서 놀게 되었다.

이러면 내가 무안해지는데 친구들의 눈치를 살펴보니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지 서로 의논하면서 파스타에 재료를 추가하거나 빼기도 하며 정신없었고 내가 끼어들 틈은 없는 듯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나 홀로 남아 결국 내 방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델리를 집어 다시 어깨에 맞춰보았다.

치이이익

다시 착용했지만, 델리는 말이 없었다.

쉬고 있는 건가?

얘가 없으니 확실히 불편하긴 하단 말이지.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거면 델리를 벗는 게 더 편하긴 한 것 같았다.

불편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는 맨몸에 비해서는 좀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어서 아무것도 안 할 때는 벗어 놓는 게 편하지만 활동하거나 무언가를 해야 할 때는 팔이 하나가 없다는 점이 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다.

아니지, 다시 생각해보니 델리한테 있는 여러 편의 기능을 생각해보면 좀 다르려나?

안대는 확실히 안 끼는 게 더 편해서 그냥 내버려 뒀다.

하여튼 손을 쥐었다 펴며 꼼지락거리면서 부엌으로 나오니 벌써 거의 다 끝난 모양인지 냥지가 그릇에 파스타를 담고 있었다.

식기들을 가져와 식탁에 올려놓았다.

내 눈치가 빠르다는 증거…!

이럴 때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밥 주기만 기다린다면 눈총을 받는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얀 크림이 묻어있는 파스타를 한입 먹어보니 평범한 크림 파스타였다.

당연하겠지만 평범한 크림 파스타 레시피니까 다른 맛이 난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

그래도 친구들이랑 다 같이 식사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건 맛있는 음식보다 더 행복해진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말고…

[요즘 냉장고에 음식이 맨날 똑같아… 색다른 것 좀 먹어봐…]

넌 조용히 좀 해.

테일리 요즘 배가 불렀어.

다시 평소처럼 나에게 징징거리는 테일리에게 핀잔을 줬지만, 곧바로 억울하다고 화를 내었다.

먹는 걸 좋아하나?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 내버려 두라고 말한 뒤 집으로 가야 한다는 수양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일단 휴대폰으로 무인 택시를 불러뒀으니 기다리면서 이야기나 해야지.

“오늘 재미있었어…”

“나두! 나도 이사나 할까?”

“요즘 내 주변에서 왜 이렇게 이사 오는 사람이 많지…?”

“정말 몰라서 묻는 거 아니지?”

무슨 이유라도 있었나?

“무슨 이유라도 있어..?”

“아무것도 아니야. 너 귀엽다고.”

왜 칭찬처럼 들리지 않는 거지…?

아무리 봐도 난 귀엽다기보다는 예쁜 외모 아닌가?

내 키가 174 정도 되는데 여자치곤 키가 엄청나게 큰 편이어서 귀엽다고 보기에는 역시…

키가 160도 안 되는 수양이가 더 귀엽다고 느껴지는데?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법이니 수양이한테는 내가 귀여워 보이는가보다.

음음… 맞지맞지.

가을이라 밤에는 날씨가 쌀쌀해서 그런지 가벼운 옷차림의 수양이가 살짝 떨면서 팔을 만지고 있었다.

어차피 다음에 만날 때 돌려받으면 되니까 내 겉옷을 입히면 되겠네.

겉옷을 벗어서 앞을 보고 있는 수양이에게 걸쳐주었다.

“다음에 만날 때 돌려줘.”

내 입이 수양이의 귀 근처에 있어서 속삭이듯 말했다.

평범하게 말해도 시끄럽게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거리니까.

1:1 대화로는 편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용기를 내봤더니 말이 떨리지 않고 생각보다 말이 부드럽게 나와서 나도 놀랐다.

이것도 사람이 많아지면 다시 내 버릇이 튀어나올 것 같기는 한데 장족의 발전이야!

아… 택시 왔다.

나를 멍하니 바라보는 수양이에게 활짝 웃어주며 나중에 다시 보자고 말하고 문을 열어 안에 태워줬다.

문을 닫자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수양이가 살짝 걱정됐지만 택시는 떠나갔다.

그새 감기라도 걸렸나?

나노봇이 몸을 잘 관리해줘서 감기 정도는 안 걸릴 텐데 좀 걱정이 됐다.

[이상 없음. 사용자가 문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도 요즘 테일리한테 물들어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니?

[무자각. 주변 사람의 고통이 예상됨.]

내 주변인들이 날 놀리는데 재미 들렸는데 거기에 델리도 합세했나 보다.

자꾸 알 수 없는 말만 반복하며 날 놀린단 말이지.

[경고. 누군가 다가오고 있음. 3명으로 예상.]

음, 알고 있어.

요즘 자꾸 이상한 시선이 느껴져서 뭔가 했더니 이상한 놈들이 붙었더라고.

여긴 정당방위가 어떻게 된다니?

예전의 내가 살던 곳처럼 칼에 찔려야 정당방위 성립이었나.

[피해를 받았다는 것이 입증된다면 성립. 다만 가벼운 부상으로 살인까지 허용되지는 않음.]

나도 그 정도까지는 갈 생각이 없어.

근데 내버려 두면 내 친구들한테 피해가 갈 수 있으니 확실히 해야지.

그래도 나름 긴장되긴 하네.

게임에서는 실컷 싸웠지만, 현실에서는 싸운 적이 없어서 조금 떨렸다.

나도 워낙 새가슴이라 겁이 많아서 혹시 실수하지는 않을까.

[상대의 몸을 걱정. 녹음 중.]

“형님. 빨리 끝내셔야 합니다. 요즘 CCTV가 성능이 워낙 좋아서 이 정도 교란기로는 5분도 못 끌어요.”

“하. 걱정도 많다. 고작 여자 하나한테 5분이나 쓸 것 같아?”

내 앞에 두 명… 내 뒤의 퇴로를 막는 덩치 하나.

앞의 두 명은 운동 좀 했던 것으로 보이는 살짝 근육이 보이는 덩치들이라면 뒤의 남자는 제대로 무언가를 배워왔다는 것이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의 균형 잡힌 근육이 가득한 몸이었다.

귀가 만두 귀네.

이개혈종이라 부르는데 이 이개혈종은 외부의 충격으로 귓바퀴의 연골과 연골막 사이가 벌어지고, 그 사이로 피가 차오르면서 귀가 부푸는 것을 이개혈종이라고 부른다.

이 증상은 완치가 힘든데 보통 격렬한 싸움을 하는 이종격투기나 레슬링 선수가 저렇다.

이 만두 귀를 훈장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심각한 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 병원에 가서 치료 받는 게 좋다.

사실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유명한 정보지만…

뒤에 놈부터 처리해야겠네.

그라운드 기술을 주로 쓸 가능성이 높은데 자칫하면 꽤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확률이 높다.

그라운드 기술들은 성공한다면 하나같이 풀기 대단히 힘든 부류들이 대부분이라 이건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있어도 풀기 힘들 가능성이 높다.

내 몸이라면 그럴 위기는 오지도 않을 것이고 잡히더라도 그냥 풀어낼 수 있을 정도로 워낙 힘이 세니까 걱정은 없었다.

그래도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

[전투 모드 준비. 긴급 상황이 벌어질 경우 처리.]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