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46화 (46/78)

〈 46화 〉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

* * *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인데 어쩐지 말도 안 될 정도로 평화롭다 생각은 했었다.

이렇게 평화로운 곳에 이런 놈들도 일부지만 존재하긴 한다는 점이 마음에 안 들었다.

치안은 엄청 좋은 거 같던데 이런 놈들은 뭘 먹고 살길래 아직도 이렇게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 유지가 되는 걸까?

어느 정도로 손 봐줘야 문제가 안 생길까?

“아가씨.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곱게 말할 때 따라옵시다. 우리 두목이 그쪽을 참 마음에 들어 해요.”

“사모님. 따라오면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 수 있어요.”

지금도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고 있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걸까.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던 나인 줄 알고 있나.

눈치를 보니 내가 얼마나 잘 벌고 있고 친구들이랑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저 돈 잘 벌고 있고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말고 가주시면 좋겠는데요…”

“좋게 말로 해주니까 역시 안 들어먹는구먼. 역시 빵즈들은 잘해줘도 소용없다니까.”

“그게 빵즈들 특징 아니겠습니까! 고작 속국에 불과했던 놈들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은혜를 모른다니까요.”

음… 너무 틀에 박힌 전형적인 빌런들이라 오히려 놀라운 걸 역시 좋게 말로 해주니까 못 알아듣네.

“시간 끄는 모양인데 그래봤자 달라지는 거 없어. 아, 상처 입히면 두목한테 큰일 나는데.”

그 말과 동시에 3명은 날 앞뒤로 포위하며 나에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일단 대장으로 보이는 근육 돼지, 그 옆에서 아부나 떠는 마른 체구의 말라깽이, 과묵한 만두 귀 남자.

어떻게 보면 개성 넘치는 것 같기도 하네.

그런데 이곳의 정당방위 기준을 모르니까 일단 한 대 맞아야 하나?

납치 미수에 집단 폭행이라서 봐주려나.

뺨을 향해 느릿하게 다가오는 손바닥을 고개를 슬쩍 움직여 가볍게 피했다.

“뭐야? 봐주지 말고 빨리 정리해. 이러다 놓치면 두목한테 뒤져.”

“아. 제가 좀 피곤했나 봅니다.”

어차피 교란기 때문에 5분 동안 CCTV가 고장 난다고 하니 다 족쳐놓고 경찰서에 던져놓을까.

다시 재차 날아오는 손바닥을 피해 디딤발을 딛고 체중을 실어 로우킥으로 허벅지를 팡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걷어찼다.

로우킥은 그렇게 강해 보이지 않는 기술이지만 실제로는 일반인들은 버틸 수가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경기 좀 뛰어본 선수들이 쓰는 킥은 넓적다리뼈가 부러져 강제로 주저앉게 만드니 버티고 싶어도 못 버틴다고 해야 하나?

선수들도 정타로 잘못 맞으면 피멍이 올라오거나 제대로 걷기 힘들어하는데 일반인은 오죽하겠냐마는…

나한테 걷어차인 말라깽이는 자기 나름 운동을 했다고 까분 거겠지만 차인 허벅지를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며 풀썩 주저앉았다.

어찌나 고통스러워하는지 내가 걷어찼으면서 말라깽이의 비명에 깜짝 놀랐다.

어… 쉬지도 않고 비명을 지르는데 내가 뼈라도 맞춰줘야 하나..?

눈물을 줄기차게 뽑아대면서 바닥을 구르는데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아프겠다.

“끄아아아악… 흐악..흐아악!”

대단히 고통스럽다고 하는데 난 차여보지 않아서 모르겠네.

너무 크게 다치면 곤란한데 힘 조절을 제대로 시도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어… 병원에 데려가야 하지 않을까요..?”

“하… 시발. 운동 좀 하셨나 봐? 곱게 데려가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미래의 형수님이라 손은 안 대려고 했는데.”

근육 돼지가 내 뒤의 만두 귀에 눈짓하며 신호를 보냈다.

동시에 덮치려는 건가?

자세를 낮춰 내 하반신을 노리던 만두 귀 덩치의 얼굴을 노리며 말이 뒷발로 차듯 뒤로 걷어찼다.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강행하는 멍청이의 얼굴을 걷어차며 나에게 주먹을 뻗어오는 근육 돼지의 팔을 양손으로 붙잡아 빠르게 돌려버렸다.

우두둑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기괴한 각도로 돌아간 팔을 멍하니 바라보는 근육 돼지와 쓰러진 채 반응 없이 누워있는 만두 귀.

상황은 대충 끝난 건가?

곧 5분이 지날 거고 상황은 대충 정리됐으니 경찰을 부르면 되겠군.

아까 근육 돼지랑 말라깽이의 대화를 유추해보면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는 모르겠지만 폭력 조직이 있고 그 두목이 나를 잡아 오라고 시킨 듯한데 자꾸 되지도 않는 형수님 타령하는 이유는 그 두목이 내가 마음에 들었는 모양이고 그냥 평범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이 세 명을 보낸 모양이다.

발로 근육 돼지의 얼굴을 툭툭 차보았지만 팔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한 듯 거품을 물고 쓰러져있었다.

살아있지만 당분간 이런 짓은 꿈도 못 꾸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이대로 끝내기에는 그 두목이 남아있는 이상 친구들한테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건데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스토리였다.

델리 이 사람들을 보낸 조직 위치 역추적 가능해?

이대로 끝내기에는 마음에 들지 않거든?

확실하게 끝장을 봐야겠어.

얘네들이 갑자기 자기 죄를 뉘우치고 착해질 리가 없잖아?

후환을 남길 이유가 뭐 있어?

[동의. BnB B타입 나노봇 사출. 현재 근처의 경찰서에 신고 접수 확인.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발각당할 우려가 있어 스텔스막 클라우드 커튼 가동.]

두웅

내 주변에 살짝 뿌연 막이 주변에 펼쳐져 반구의 형태로 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밖에서 이곳의 존재를 모를까?

[확인 불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바닥만이 보임.]

델리의 몸체에서 작은 구멍이 생기더니 거미 형태의 로봇이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진다.

끼리릭 차칵 차칵

나노봇인데 얘는 좀 시끄럽고 덩치가 크네?

대충 내 손가락 정도의 크기로 보이는데 앞발에는 드릴로 보이는 날카로운 무언가가 달려있었고 전체적으로 몸체의 색이 까맣고 공격적으로 보였다.

끊임없이 드릴을 회전하며 움직일 때마다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이런 게 내 친구들이랑 내 몸에 들어있었다고 갑자기 무서워지네.

[A타입 인간의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누가 봐도 안심할 수 있는 디자인. 의료용이 아닌 B타입과 다름. 고객들의 안심시켜주기 위해 친숙한 디자인]

그렇다니 다행이네.

나노봇 B타입은 아니, 근데 나노봇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데?

하여튼 B타입은 근육 돼지의 머리를 윽….

보기 좀 그렇다.

쓰러져있는 근육 돼지의 머리 안으로 들어갔다.

죽는 건 아니지?

[난폭하지만 정보 수집에 효과적. 명령에 따라 다르지만, 효과적인 임무 수행 능력. 약간의 뇌 손상 예상되지만, 시간을 들인다면 손상 없이 정보 수집 가능. 하지만 고려할 가치를 느끼지 못함.]

죽지는 않는다니 다행이네.

근육 돼지의 몸이 들썩들썩하더니 축 늘어지며 B타입이 기어 나왔다.

진짜 죽은 건 아니지…?

[생명에는 지장 없음.]

B타입은 스스로 몸에서 물을 뿜어내더니 몸을 씻어내며 구멍을 통해 델리의 몸체 안으로 들어왔다.

이 안에 이렇게 살벌한 것들이 득실거린다니 뭔가 기분이 참 묘하네.

[위치 확인. 멀지 않은 위치. 신속한 처리를 위해 현재의 몸체를 바닥에 내려놓아 주길 요청. 섬세한 작업을 위해서는 본체가 가까이 있어야 로봇들의 조작이 수월함.]

델리를 떼어내서 바닥에 조심스레 놔두니 델리는 팔 형태의 의수에서 미래에서 볼법한 우주모함 같은 형태로 자신을 바꿔버렸다.

덩치는 약간 커졌지만 그런데도 작았다.

“정말 처리가 가능하긴 한 거야?”

[안심하고 집에 들어가 발 닦고 잠이나 잘 것. 친구들이랑 노는 것을 권장.]

“어… 그럼 이거 커튼인가 뭔가 좀 치우고 가줘. 경찰들이 주변에 있는 것 같으니까.”

[축소]

주변을 뿌옇게 가리던 막은 델리의 주변으로 축소되더니 어느새 델리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크으으… 으아아아아..!”

내 뒤쪽에서 움직임이 느껴져 뒤돌아보니 아까의 만두 귀가 나를 끌어안으려고 덮쳐오고 있었다.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건지 아니면 지금 제정신이 아닌 건지.

만두 귀길래 긴장했더니 두각을 드러낼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나 보다.

맷집은 제법 좋았는지 나에게 얼굴을 걷어 차였음에도 다시 일어난 점은 높이 평가하지만.

빛이 반사되어 번쩍이는 무언가가 그놈의 손에 들려있었는데 무언가 기술을 거는 줄 알았더니 칼이었다.

내 몸을 향해 찔러오는 칼날을 피하며 놈의 배를 발로 뻥 걷어찼다.

“그으윽…”

마약이라도 했나?

눈이 돌아간 걸 보니 확실히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다시 내 얼굴을 향해 찔러오는 놈의 손목을 잡아 채고 발을 강하게 짓밟았다.

좀 덜 다치게 제압하려고 하는데 그런 내 마음을 몰라주니 섭섭할 지경.

그나저나 이제 진짜 끝인가?

푸슉

어..?

[어… 위험해…!]

내게 손목을 잡혀있던 놈의 손에 들린 칼이 이상한 소리와 함께 내 눈에 칼날이 점점 커지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커지는 게 아니라 칼날이 날아오고 있는 거겠지.

내 생각보다 조금 더 빠르게 느릿하게 날아오는 것이 보였지만 지금 피하기 시작해도 좀 버거워 보인다.

놈의 손을 뿌리치고 손으로 칼날을 잡아 채려고 손을 회수함과 동시에 고개를 최대한 옆으로 꺾었다.

칼날을 잡아 채는데 성공했지만 어찌나 빠르게 날아왔는지 내 손을 깊이 찢으며 피가 내 얼굴에 팍 튀었다.

피가 손을 타고 주르르 흐르면서 사방을 더럽혔다.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이질적인 불쾌감.

하마터면 남은 눈도 잃을 뻔했다.

등골을 오싹해지고 식은땀이 흘렀다.

델리가 눈을 고쳐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너무 안일했다.

너무 방심했나.

이건 내가 멍청했다.

그냥 빨리 끝냈어야 했는데… 너무 힘을 빼고 때린 모양이다.

좀 세게 쳤다고 생각했지만, 놈의 맷집은 내 예상을 아득히 초월했는데 내가 볼 때는 인간의 맷집이 아닌 거 같아.

[다행히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네... 좀 아프긴 하겠다...]

이 정도의 힘을 가지고도 이런 놈들한테 상처 입다니 너무 한심하다.

한심해….

“예지야!”

내가 자괴감을 느끼는 동안 누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위를 올려다보니 창문을 열고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친구들이 보였다. 밤이라서 잘 안 보일 텐데 용케도 봤네.

아니네.

옆에 가로등이 있구나.

난 왜 이렇게 멍청한 거지?

걱정스럽게 나를 보는 친구들에게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서 안심 시켜줬다.

손에 부상 정도는 델리가 오면 알아서 해주겠지.

“여기 있다!”

“괜찮으십니까?”

“부상자 한 명! 응급조치!”

검은 복장을 하고 방탄복을 입은 사람들이 기관총을 들고 나에게 뛰어왔다.

검은 복면을 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분위기가 경찰로 보이는데 여러모로 내가 알던 한국의 경찰이 아닌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주변 확인하면서 경계해. B조는?”

“이 근처를 봉쇄하고 포위망을 좁히고 있습니다.”

“그렇게 찾을 때는 안 나오더니 여기서 납치나 시도하고 있어? 좆 같은 새끼들 일은 존나게 벌려놓네.”

“교란기도 보입니다.”

“야! 미란다 원칙!”

누워있던 놈들은 순식간에 수갑이 채워지고 끌려가 차량에 태워졌다.

나는 경찰의 손에 이끌려 트럭처럼 생긴 곳의 안의 의자에 앉아 치료를 받고 있었다.

“진짜 병원에 안 가셔도 괜찮겠습니까? 저희가 가는 길에 태워드리면 금방인데.”

“괜찮아요… 내일 따로 가보죠…”

치이이익

손에 초록색의 무언가가 뿌려졌다.

으… 깊게 베이긴 했네.

“아, 출혈이 좀 심한데… 일단 소독하고 지혈제 뿌려놓긴 했는데 내일 반드시 가야 합니다. 경찰서는… 이놈들이 워낙 확실하게 일을 벌이긴 했는데 일주일 안에 좀 와주세요.”

검은 복면에 눈만 삐죽 보이는 경찰은 착잡한 눈으로 내 눈과 비어있는 오른팔의 소매를 보며 붕대를 과하다 싶을 정도로 내 손을 꽁꽁 묶었다.

“예지야! 많이 다쳤어?”

어느새 친구들이 내려와 시끌벅적해졌다.

친구들의 뒤를 검은 복면의 경찰이 따라왔다.

“집 안에서 나오시면 안 된다니까…”

“이 피 좀 봐! 어떻게 해… 빨리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손만 다쳤어…”

“본인 주장으로는 그렇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고 내일 빨리 병원에 데려가 주세요. 지금 가면 좋겠는데 안 된다네요.”

“옷에 피가… 야! 서예지! 고집 부리지 말고 빨리 병원 가자.”

“흐에엥 왜 다쳐…”

[내 친구 왜 울려...!]

나도 다치고 싶었겠니…

내 친구이기도 하거든...!

내일은 반드시 간다고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오늘은 집에 있고 싶네.

“의수는 어디 갔어?”

아… 뭐라고 말해야 하지?

“모…몰라! 정신없어…”

친구들이 경찰들한테 의수의 형태를 설명하며 찾으면 꼭 연락해주라고 강조하는 걸 재촉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하… 오늘 참 피곤한 날이네…

그런데 아직 남아있는 기분이 드는데... 아직도 누가 날 보고 있는 기분이야.

기분 탓인가?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