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47화 (47/78)

〈 47화 〉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무언가

* * *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두컴컴한 방이 있었는데 문 틈새의 자그마한 빛으로 조금이나마 그 방을 비추고 있었고 그건 틀림없이 안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굳게 닫긴 문에서 누군가의 자그마한 말소리가 문밖으로 새어나갔다.

“손모가지 잘리기 전에 거기 숨겨 놓은 패 빼라.”

“봤니?”

“못 봤을 리가 있겠나.”

“아 근데 그 녀자 일은 어떻게 돼가고 있어?”

“뉘기? 아, 그 새가? 빵즈 치곤 세게 곱더라. 친구랑 같이 살아서 똘구어야하는데 집 밖에 나오질 않아 쉽지 않다야.”

“같이 데려오면 안 되겠니?”

“너 싸스개니? 가뜩이나 요즘 우리 잡아 족친다고 여기저기서 헤집고 다니는데 둘이나 납치하면 우린 끝장이라 했잖나. 아직도 알아 못 듣나?”

“에레이 이래서 언제 흑사회가 중화제국 재건을 하겠어! 차오밍은 고작해야 녀자나 잡아 오라고 난리고 이게 뭐 하는 짓이냐는 말이야! 령도가 뭐 하는 거냐고!”

“입 다물라. 너 정신 나지 못하겠니?”

문지기 역할의 인간 두 명.

신분 확인 중 이 나라의 법으로 출입국관리법 제10조 제12조 제17조 제20조 모두 해당하지 않는 불법 체류자.

앞의 인간들을 처리 방식 고려. 사용자의 지시에 의하여 처형 불가 상태.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을 검색.

중요도 우선순위

1. 은폐.

2. 범죄 조직 청소.

3. 후환의 우려를 방지…살인… 사용자의 지시로 불가… 제압.

4. 기억 조작 그리고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청에 투기.

제압 결정.

어두운 방 안에서 둥둥 떠다니던 작은 비행체의 몸체에서 긴 호스 끝에 달린 카메라를 꺼내 문틈 사이로 들어간다.

남자들은 테이블에 앉아 카드를 가지고 놀며 음담패설을 나누거나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BnB B타입 사출. 제압 명령.]

비행체의 몸체에 구멍이 열리더니 거미 형태의 로봇들이 우수수 쏟아져 바닥을 돌아다닌다.

검은 몸체에 눈으로 보이는 붉은 카메라 렌즈.

송곳니로 보이는 이빨에서 방울지며 떨어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녹색의 액체.

위협적으로 회전하는 드릴이 달린 다리.

작지만 무시할 수 없는 외형을 가진 거미들이 문틈으로 쏜살같이 기어들어 가 남자들이 앉아 있는 의자 밑을 점거했다.

기이이잉 끼리릭 끼리릭

차칵 차칵

“무슨 소리지?”

“밑에서 들리는…”

고개를 숙인 남자들의 얼굴에 로봇들이 펄쩍 뛰어올라 달라붙는다.

“시발! 이게 뭐야! 뭐냐고!”

“이거 좀 떼줘!”

쓰러지며 발광하는 남자들의 몸 위로 수십의 로봇이 올라타고 잠시 후 조용해진다.

누구라도 로봇들의 무리가 조금씩 들썩거리는걸 본다면 밑에 깔린 남자들이 살아 있다고 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로컬 스캐닝 시스템 가동. 24명… B타입이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조직의 인원은 총 26명.]

[생각보다 작은 규모. 이 조직의 사업체 0, 재산 존재하지 않음. 이건 이쪽의 정보 수집을 방해하기 위한 정보 교란? 가능성 검토. 0%]

[어떤 근거로 사용자에게 부귀영화를 약속한 것인지? 숨겨진 정보가 있을 확률을 고려. 흥미로운 상황.]

[여유 전력 52%, MW. UAV 기동 타격 드론 가동. 소형 무인 전투기로 적을 제압하기 적절.]

델리는 BnB B타입을 풀었던 것처럼 똑같이 검은 구슬들을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바닥에 닿기 전 구슬들은 스스로 조립되더니 헬기처럼 혹은 전투기처럼 생긴 드론들이 어느새 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여러 형태의 드론들이 비행하고 있었는데 전투기 또는 헬기 어떤 드론은 우주선 같은 것도 있었다.

기이이이잉

조용한 소음.

이보다 더 모순되는 말이 있을까.

말 그대로 드론들은 조용하지만 가까이에서 들으면 요란한 소리가 났었다.

어떤 사람은 시끄럽게 들을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조용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만한 묘한 소리.

[이 구역의 인간을 모두 제압]

희미하게 들려오는 비명.

어떤 물건들이 부서지는 파열음과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총격음.

그렇게 국가 재건의 꿈이 무너지는 날이었다.

****

예지의 강좌는 매우 독특하면서도 신기했다.

밥 로스 아저씨가 그림을 순식간에 그려 놓고 사람들한테 참 쉽죠? 라면서 농락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 누구도 알아들은 사람은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강좌가 끝날 때쯤에 모두가 달인이 되어서 끝나는 기이한 수업이었다.

애초에 수업이기는 했나?

내 입장에서는 예지가 갑자기 목에 손을 대고 누르고 있다가 순식간에 목소리가 여러 개 바뀌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된 듯한 경험은 그 어디에서도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이지 않을까?

성우처럼 여러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재능을 얻었다는 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스트리머로서 값진 능력이었으니까.

심지어 자기가 만든 노래를 다 같이 부르자고 제의까지 했다.

그것도 저작권에 모두의 이름으로..!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고맙기도 했지만, 이걸 그저 단순히 고맙다고 말하고 받아 갈 수준일까?

예지는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모두에게 베풀었지만 받기만 하기에는 내 성미에도 조금 맞지 않아.

예지 생일이 언제지?

언제 한번 물어봐야겠다.

아니면 냥지가 알고 있으려나?

예지는 친구라면 계산 없이 너무 막 퍼주거나 잘해주려는 느낌이라서 걱정되긴 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전부 좋은 사람이니까… 괜한 걱정이겠지?

만약에 선물을 한다면 어떤 게 좋을까?

너무 비싼 건 좀 그렇겠지?

아, 아닌가?

괜히 멋대로 샀다가 본인이 원하지 않는 물건이었으면 난감하겠지?

냥지가 같이 살고 있으니 예지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이나 물건들을 잘 알겠지?

맞지맞지.

임뿌와 초야 언니 그리고 차향 언니가 같이 집에 가고 나 혼자 남은 상황이었다.

난 내일 휴방하는 날이니까 오늘 자고 가기로 했지.

냥지의 문에 조심스레 노크했다.

똑똑

“왜?”

“저기, 안에 들어가도 돼?”

“그걸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는데 일단 들어와.”

방 안으로 들어가니 냥지는 오늘 배웠던 목소리를 바꾸는 법을 연습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는데도 온갖 목소리로 바꿔보고 있었는데 특히 냥지는 평소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아닌 여리고 여성스러운 목소리를 주로 내고 있었다.

“왜?”

“아, 예지 생일이 언제인가 궁금해서! 이렇게 좋은 선물을 받았는데 모른 척 넘어가기도 좀 그렇잖아. 그치?”

“음… 난 모르는데… 일단 예지도 몰라. 예지는 예전의 기억이 아예 없거든. 일단 나중에 다시 물어볼게.”

“앗, 그래 주면 고맙고! 고마워.”

예지 본인도 모르는구나.

일단 이 문제는 미뤄둬야겠네.

“그런데 난 오늘 어디서 자면 돼?”

“자는 거? 내 방에서 자.”

“엥? 그럼 넌 어디서 자는데?”

“예지 침대에서.”

“잉..? 손님인 내가 집주인의 침대에서 자는 건 좀 그러니까 내가 예지랑 같이 잘게.”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냥지가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예지의 그것을 알고 있는 거야?”

그것?

무슨 말이야.

흠… 예지가 가지고 있는 물건? 아니면 다른 것?

갑자기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이유는 왜일까?

예지랑 같이 자면 알 수 있으려나.

아까 정란이랑 예화의 반응도 이상했고 물어보니 유독 예지랑 같이 자는 문제는 약간 경계하는 눈치인데 본인들이 같이 자야 한다고 우겼었지.

갑자기 궁금해졌어.

응응… 결심했어!

예지랑 같이 자봐야겠다!

그렇게 예지를 침대로 보내고 우리는 가위바위보로 결판을 냈다.

고작 가위바위보에 목숨을 건 듯 심각한 분위기로 바뀌었지만, 생각보다 승부는 싱겁게 끝났다.

나와 정란이의 승리였다.

나와 정란이가 승부를 내려고 했지만, 예지가 우리는 작아서 침대도 적당하고 부담 없을 것 같다는 엄청 슬픈 이야기를 했지만, 상관없겠지.

근데 내 키가 진짜 그 정도로 작은 걸까…

예지가 씻고 있는 동안 나와 정란이가 먼저 누워서 예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 내가 요즘 왜 건강해졌는지 알아?”

“응? 그러고 보니 요즘 유독 건강해진 것 같네. 왜 건강해졌는데?”

최근 정란이의 생활 패턴이 바뀐 것 같기도 하고 예전의 피곤함에 절은 목소리가 가끔 들렸었는데 그마저도 듣기 힘들 정도였다.

정말 활기 넘치고 건강해 보였는데 무슨 이유가 있다니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운동이라도 시작한 걸까?

“예지 옆에 자서 그래.”

“….그게 무슨 소리야?”

냥지나 예화도 그렇고 정란이도 이런 소리를 하네.

예지가 옆에 같이 잔다고 그 모든 게 바뀔 수가 있나?

어쩌면 예지는 자장가의 천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 목소리에 노래 실력으로 자장가를 조용하고 포근하게 부른다면 불면증 킬러일 수도 있겠어.

순간 정란이의 말이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자장가라도 불러?”

“같이 자보면 알 거야. 인간 테라피 그 자체야.”

점점 알 수 없는 말을 하는데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감이 안 잡히네.

비유인 걸까 아니면 말 그대로인 걸까.

예지는 다 씻었는지 뽀송뽀송한 머리로… 뽀송뽀송?

머리숱이 저렇게 많고 긴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말린 거지?

무언가 머리를 말리는 기술도 따로 있는 걸까?

예지랑 아주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예지는 알다 가도 모르겠어!

예지는 우리 사이를 파고들어 누웠다.

“오늘 진짜 고마워.”

“응..? 뭐 약속했었는데…”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음음!”

“별거 아닌데…”

이렇게 같이 누워있으니 이상할 정도로 편안하고 포근했다.

예지 특유의 평온한 분위기 때문인 걸까?

어디서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와 정란이를 보니 이미 침까지 살짝 흘리면서 푹 잠들은 모습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깨어있었는데… 나도… 잠이 오네…

이상하게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지는 느낌이면서도 몰려오는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수..수면제라도 먹은…

자고 일어나니 이상하다 못해 수상할 정도로 몸이 개운했다.

진짜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겠지?

이렇게 일찍 일어난 것도 오랜만인 것 같아서 눈을 뜬 채로 침대에 뒹굴뒹굴했다.

예지나 정란이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모양.

그렇게 체감상 10분 정도 시간이 지났다고 느낄 무렵 예지가 두 팔로 나를 꽉 끌어안으며 고개를 내 어깨에 파 묻었다.

“엥? 뭐야. 숨 막혀!”

“뭐야… 예지야… 숨 막혀…”

정란이는 방금 일어난 건지 깜짝 놀라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예지의 힘이 얼마나 센지 끄떡도 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나도 벗어나기 위해 정란이와 발버둥 쳤지만 결국 우리가 제풀에 지쳐 그만둘 때까지 예지는

묵묵히 우리를 안으며 누워있을 뿐이었다.

“나 죽어… 예지야…”

“왜구루냥…”

진짜 왜구루냥….

금방 풀어주겠지 싶었지만, 예지의 이상 행동은 계속됐었다.

한참이나 우리를 안은 채로 풀어주지 않고 누워있자 냥지와 예화도 방 안으로 들어와 방법을 같이 찾을 정도.

“아, 맞아. 예지 옆에 있으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니까? 진짜 신기해.”

“어? 너희들도? 진짜 체감이 확 온다니까. 얘 안고 자면 피로가 싹 풀려.”

친구들이 왜 예지랑 같이 자고 싶어 했는지 확실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체감이 왔었지.

왜 인간 테라피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지만 지금은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이제 슬슬 배고파…

나에게 어제 무슨 일이 없었냐고 물었지만, 어제 일을 아무리 떠올려봐도 아무런 일이 없었는데 좀 더 생각해봤지만 없었던 일을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긴 설득 끝에 예지는 우리를 놓아주었고 풀려난 우리는 마음껏 자유를 만끽했다.

그 이후로 예지의 평소와는 다른 행동이 계속되었는데 평소에 절대 빼지 않았던 안대와 의수를 풀고 거실 소파에 앉아있거나 그렇게 부끄러워하던 스킨십을 거리낌 없이 했었다.

한쪽 팔로 예화를 옆구리에 끼고 찡그린 얼굴로 TV를 멍하니 바라보는 그 모습은 옛날 여왕의 모습이 저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위엄있지만 걱정되기도 했다.

오늘 악몽을 꾼 것도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자꾸 하는 것도 그렇고 너무 걱정됐다.

심지어 티는 내지 않았지만, 손도 벌벌 떨고 있어서 더 그렇기도 하고.

옛날에 얼마나 무서운 일이 있었으면 이럴까.

난 짐작도 하지 못하겠다.

다만 예지의 눈과 어깨의 흉터가 내가 알 수 없는 예지의 과거를 짐작하게 해줄 뿐.

그래도 빨리 떨쳐내면 좋을 텐데.

정란이가 흉터 지우는 약이라고 가져온 연고를 손에 짜내 눈에 골고루 발라주었다.

내 손길에 움찔하긴 했지만 아프지는 않은 듯 눈을 지그시 감고 머리를 소파에 기댄 채로 손길을 묵묵히 받고 있었는데 순간 자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얌전했다.

예화가 음흉한 손길로 몸을 만지작거리지만, 예지는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살짝 붉어진 얼굴로 그만하라고 타이를 뿐이었다.

그런데 예지는 어떤 운동을 하길래 이렇게 몸이 탄탄한 걸까?

분명 엄청난 운동을 하면서 몸을 가꿨겠지?

물어보다가 갑자기 그 생각이 떠올라 깜짝 놀랐다.

어쩌면 그 강도 높은 운동을 매일 하면서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깜짝 놀라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몸이 부러운 건 맞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네.

우리가 떠들썩하게 떠들며 노는 동안 시간은 어느덧 황혼이 찾아왔다.

밥도 맛있게 먹었고 이제 슬슬 집에 가야 하는 시간인데 왠지 좀 아쉽게 느껴졌다.

내일 방송을 해야 하니까 가긴 가야겠지.

집으로 간다고 인사를 하고 나오니 예지가 나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마중 나온다는 말에 싱긋 웃어주었다.

지금 같은 평화로울 때에 그런 일이 있을까?

어떤 동네는 분위기가 좀 그렇다고 하지만 그런 곳을 제외하면 평화로운데.

예지가 택시를 불렀다고 말하기에 고맙다고 대답하고 우리는 그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진지하게 이사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말하니 예지는 주변에서 이사 오려는 사람이 왜 그리 많은 건지 모르겠다고 말하길래 살짝 어이가 없었다.

진짜 모르는 건 아니지?

그렇게 물으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수한 눈으로 날 올곧게 바라보길래 웃음이 피식 삐져나왔다.

나보다 언니고 키도 큰데 왜 자꾸 여동생처럼 느껴지는 걸까.

그런데 날씨가 쌀쌀하네.

걸칠 거라도 하나 들고 올 걸 그랬나.

살짝 후회하는 중에 갑자기 내 몸에 무언가 덮어졌다.

응?

뒤를 돌아보니 예지가 은은하게 웃으며 나에게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걸쳐주고 있었다.

얼굴이 꽤 가까이에 있었는데 평소의 예지 분위기랑 뭔가 많이 다른 기분.

“다음에 만날 때 돌려줘.”

평소와는 다른 묵직하면서 허스키한 목소리.

분명 평소의 목소리는 곱디고운 높은 톤의 목소리였는데 지금은 누군가를 홀릴 것 같은 고혹적으로 들려오는 목소리.

서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의 대화도 이보다 더 달콤하면서 야하게 느껴질 수 없을 거야.

마음 한구석에서 어렴풋이 느껴지는 기대감을 애써 무시했다.

얘가… 어..?

예쁜 건 알고 있었지만… 어?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크고 빠르게 쿵쿵 뛴다.

그보다 달콤… 뭐… 야…?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기대감? 뭘? 다음에 같이 노는 것을..?

터져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잠시 얼굴이 너무 뜨겁게 느껴져 양 볼에 손을 올려서 식히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왜일까?

갑자기 왜 이런 기분이 느껴지는 거지?

이런 분위기로 친구와 대화하는 건 처음이라서 그런 걸까?

예지에게 볼 수 없었던 자신감 넘치는 태도, 겉옷에 약간 남아있는 온기, 원래 성격에서 나오는 부드러운 배려.

분위기 때문인지 순간 같은 여자임에도 행동이나 분위기가 너무 매혹적으로 느껴져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니 심장이…

꺄아아아아아!

정신을 차리니 아무도 없는 택시 안에서 나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고장난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야.

아까의 그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지만 막지 못했다.

아니, 굳이 막지 않았다.

창밖의 풍경을 구경하며 천천히 오늘 일을 곱씹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다음의 만남을 나도 모르게 기대하고 있었다.

왠지 부끄럽게 느껴졌지만, 이상하게 싫지는 않아.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