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48화 (48/78)

〈 48화 〉 아가 예지

* * *

예지가 수양이를 마중 나간 이후로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디 갔나 싶어서 전화했지만 통화 연결음만 들릴 뿐이었다.

얘는 도대체 어디를 간 거야?

수양이한테 납치라도 당했나.

날은 점점 어둑어둑해지고 기다리는 우리는 점점 초조해졌다.

예지가 우리에게 말도 없이 밤늦게 돌아다닌 적이 없는 데다가 이렇게까지 늦은 시간에 활동한 적이 없다는 것이 걱정하게 했다.

아무리 요즘 세상이 평화롭다고 하지만 걱정하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화 안 받아?”

“아니 얘는 휴대폰을 집에 두고 나가네. 이러면 휴대폰은 무슨 의미야.”

정란이가 기대하며 물어보기만 원하는 대답을 들려줄 수 없었다.

애초에 휴대폰을 들고 나가지 않았으니까.

사람 걱정하게 만드는데 일가견 있어.

“일단 나가서 찾아볼게.”

친구들한테 그렇게 말하고 겉옷을 걸쳐 입자 예화와 정란이도 옷을 갈아입고 내 옆에 섰다.

하긴 얘네들도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겠지.

“무작정 아무 곳이나 뒤질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수양이한테 일단 전화해보는 게 우선 아니야? 어쩌면 아직 둘이 대화 중일지도 모르니까.”

예화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아니, 분명 같이 나간 수양이한테 먼저 전화해봐야 정상인데 어째서 나갈 생각부터 한 걸까?

너무 조급했나?

예화가 수양이한테 통화를 거는 동안 정란이가 창문 밖을 살펴보고 있었다.

창밖은 어두워서 육안으로는 밖의 상황을 제대로 구분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왜 이렇게 어두운 거야.

가로등이 고장 난 건가?

“여보세요? 수양아.”

[응? 왜?]

“옆에 예지 있어?”

[옆에 예지 있냐고? 아니. 난 이미 택시 탔는데 왜 예지 집에 안 들어갔어?]

“이미 택시라고? 언제 헤어졌는데?”

[시간 좀 지났을걸? 왜 무슨 일 있어?]

“그럼 편의점이라도 갔는가 봐. 걱정하지 말고 잘 들어가.”

[응응. 알았어~]

우리 둘은 뚝 끊어진 전화를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찾아야 하는 걸까.

예지가 자주 갈만한 곳을 생각해봤지만, 밖에서 활동은커녕 집에서 나오지도 않는데 딱히 어디에 있다고 추측할만한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저기 예지 아냐?”

정란이가 창문 밖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창문 밖을 보자 아까의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때와는 달리 주변 풍경이 보일 정도로 밝아진 모습이다.

고장 난 것 같았던 가로등은 어느새 환하게 주변을 비추며 밝히고 있었고 그 밑에 예지와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는 사람인 걸까?

거리가 꽤 멀지 않은 듯 상황을 뚜렷하게 관찰할 수 있었지만 거리가 꽤 있는 편이라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데 두 명의 덩치 큰 남자가 그 주변에 쓰러져있어서 분위기가 이상했고 유일하게 서 있는 남자마저 상태가 좋지 않아 보여서 걱정이었다.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일단 내려가 보자. 뭔가 이상해.”

예전에 친구들이 말했었던 예지의 스토커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르는 왜일까.

그 이야기를 듣고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으면서 이제는 안전할 거라고 넘긴 그때 나의 방심이 이런 결과를 낳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졌다.

진짜 위험한 상황은 아니겠지?

스토커 이야기를 듣고 진작에 경찰에 신고할 걸 그랬어.

급하게 내려가려는 찰나에 서 있던 남자가 무언가를 손에 쥔 채 예지의 얼굴에 휘둘렀는데, 서슬 퍼런 칼날이 가로등의 빛에 반사되어 그것이 어떤 물건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기서는 예지의 뒷모습만 보여서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피했을지도 모르고 아무 일도 없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이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설마 얼굴을 다친 거야? 아니면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

눈을 다쳐서 앞으로 영원히 시력을 상실하면 어떻게 해?

아니, 좋은 생각을 해야지. 예지는 싸움을 잘하잖아?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은 팍하고 튀어나오는 피를 보고 씻은 듯이 사라졌다.

곧바로 그 덩치를 제압하긴 했지만, 바닥을 보며 고개를 숙인 모습이 너무 무서웠다.

크게 다친 건 아닐지 겁을 덜컥 집어먹었다.

“예지야!”

이쪽을 올려보며 손을 팔랑팔랑 흔드는 예지의 모습에 안심하면서도 화가 났다.

내가 마음 졸이면서 봤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손을 흔드는 모습에 내 속이 천불이 났다.

친구들과 급하게 1층으로 내려오니 기동복을 입고 있던 경찰이 우리가 나가지 못하게 막길래 사정을 설명하고 급하게 뛰쳐나왔다.

분명 얼마 되지 않는 거리임에도 수백 가지의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정신없이 뛰어와 도착한 곳에는 차 안에 올라타 경찰들에게 치료받는 예지가 앉아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였고 끼고 나간 의수는 어디 갔는지 흉터를 드러낸 맨 어깨만이 보일 뿐이었다.

다행히 걱정하던 눈과 얼굴은 멀쩡해 보이지만 손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붕대에 둘둘 감겨 있고 약품 냄새가 많이 났다.

그런데도 자기는 상관없다는 듯 우리를 보고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예지의 모습을 보니 속에 가득했던 열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몸에 긴장감이 탁 풀렸다.

그래.

네가 무슨 죄가 있겠어.

하고 싶은 말은 얼굴을 보니 다 잊어버렸다.

근데 이렇게 크게 다쳤는데 병원에 안 가겠다는 예지가 얄미워서 볼을 꼬집어서 쭉 당겨버렸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얼굴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갈 길이 멀구나.

도망가면 될 텐데 굳이 싸우다니, 얠 어떻게 해야 안전에 대한 개념이 머리에 자리 잡을까.

****

그 일 이후 별다른 일 없이 평온한 일상은 계속됐다.

침대에 4명이나 옹기종기 모여서 잔 건 좀 불편했지만 안 보이면 불안하다는 데 별 수 있나.

손을 미라처럼 붕대를 둘둘 감아놔서 수저를 들고 식사를 하기 힘들어하자 친구들이 음식을 떠서 내 입어 떠먹여 주었다.

부끄럽지만 손이 이렇게 되니 어쩔 수 없기도 하고 편하기도 했다.

문제는 한 명이 나한테 밥을 먹이는 게 아니라 세 명이 각자 수저로 반찬이나 음식들을 떠서 입안에 쑤셔 넣는 게 문제였지만 날 생각해서 해주는 행동인데 거절하기에는 너무 매몰차지 않을까.

다만 델리의 모습이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들켜서 어딘가에 잡혀있지 않을까 걱정하긴 했지만 역시 델리를 걱정하기보단 잡으려고 시도한 사람들을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친구들한테 손목을 잡혀 끌려간 병원에서는 상처가 깊고 신경도 다쳤기 때문에 오래 치료해야겠다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흉터가 신경 쓰였는지 정란이가 흉질 수도 있냐는 질문을 하고 의사는 안 남을 수도 있겠다는 의견을 말했다.

이거 델리 오면 금방 다 나을 수 있지 않나 싶었지만, 델리는 아직도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으니까 얌전히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면서 사람들이 나를 보는 느낌인데 기분 탓인가?

너무 떠버리니 공주병이라도 생기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부끄러워지네.

이게 월클병…?

그리고 문제가 생겼는데 내 상처가 심해서 그런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친구들이 내가 다친 이후로 엄청난 과보호를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쓸 수 있는 손이 없으니 기저귀라도 채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소름 끼치는 소리를 들어버려서 이상한 생각을 해버렸다.

기저귀를 차고 누워서 응애 아가 예지라고 말하는 나의 기저귀를… 우욱…

그런 끔찍한 일은 사양이야…

등골이 오싹해져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상상이었다.

[흠…]

뭘 고민하고 있어…!

설마 끌린 거야?

[히히…]

웃는 이유가 장난에 성공해서 그런 거겠지….?

그런데 델리가 와도 문제네.

살이 깊게 잘려 나가 벌어진 손바닥은 얼마나 크게 다쳤는지 보여주는 지표인데 이게 하루 만에 나아버리면 개연성이 없다 못해 같은 사람으로 볼지도 의문이다.

손이 잘릴 뻔한 친구가 자고 일어나니 뽀송뽀송한 피부를 가지고 멀쩡하다?

나라도 의심하겠다.

“의수 새로 맞추는 게 어때?”

냥지가 내 입에 물컵을 대며 내 의견을 물어본다.

목마른 건 어떻게 알았지.

“좀 더 기다려보고 결정할게…”

“알았어.”

걱정하던 델리의 행방은 의외로 놀러 온 예화가 델리의 몸체를 가지고 오면서 해결됐다.

어…?

“찾았다! 여기 오면서 어제 거기를 지나가는데 풀숲에 빛이 번쩍이길래 발견했어!”

“먼저 발견한 건 나야!”

정란이와 예화는 서로 자기가 먼저 발견했다고 싸웠지만, 신경 쓰지 않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고, 고마워..?”

어떻게 된 거야!

[모두 처리 완료.]

왜 안 돌아오고 있었던 거야?

[자연스러운 등장을 위한 빌드업]

일찍 와줘서 고마워…!

자칫하면 친구들한테 사육 당할 뻔했어…

아까의 기저귀 소식을 떠올리니 아직도 어지럽다.

[부상 천천히 치료하겠음.]

****

“이봐. 서예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어?”

“무슨 소리야?”

“중국 놈들이 칼로 찔렀다고 하는데.”

“뭐?”

“우리가 보고하고 있을 때 칼에 찔렸다고.”

오…이런 좆 같은…

갑자기 웬…?

“자세히 설명해봐. 갑자기 중국 놈이 왜 나오는데?”

“우리가 보고하는 동안 이곳에 숨어있던 중국 폭력 조직에게 찔렸다고. 아마 납치를 시도한 것 같고 일단 미수로 끝났다. 최근 이곳에 자리 잡은 놈들인지 여기 경찰들도 정확한 위치를 모르더군. 어젯밤에 26명 전원 모두 체포된 상황이야.”

“아니, 그보다 서예지의 부상은 어느 정도야?”

부상이 크다면 일은 상당히 복잡해진다.

고통받던 그녀가 누군가에게 다쳤다는 것도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지만 우리가 사과해야 할 대상이 다쳤다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니까.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꼬이는군.

그 잔재들은 과거에 그렇게 깽판을 치다가 나라가 사라졌음에도 자제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빌어먹을 짜... 하...

“손 좀 다쳤다고 하는데 별일 없을 것 같아. 자세한 건 봐야 알겠지만, 그보다 내가 감시 좀 붙이자니까.”

“좀 닥쳐. 사생활 침해고 피해자한테 그러는 게 말이 되겠냐?”

“그럼 또 이런 일이 발생하면?”

곰 같은 덩치를 씰룩거리며 얄밉게 약점을 콕콕 찔러온다.

“알았어. 생각 중이니까 일단 나 좀 내버려 둬.”

그녀의 친구들한테 설명을 할까.

친구는 친구일 뿐 피를 나눈 가족들처럼 보호자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인데...

그녀와 같이 살고 있는 친구들이 집 밖에 거의 나오지 않아서 단독으로 만날 기회가 생기지 않는 문제가 생겨버렸다.

그렇다고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중요한 이야기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하지만 테일리의 상처를 치료해줄 사람들은 친구들 밖에 없으니 부탁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 일단 이 도시에 다른 위험 요소가 없는 상황인지 조사부터 하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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