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49화 (49/78)

〈 49화 〉 내 돈!

* * *

우리는 야만의 시대를 살았다.

물을 뿌리면 그대로 얼어버릴 정도로 추운 겨울 오갈 곳 없는 길거리 신세의 사람들은 눈을 가려진 채 어딘가에 보내졌었다.

난 그 사람들 중 하나였다.

흔들리는 배에서 며칠 동안 타고 갔는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는 일주일? 한 달?

모르겠다.

사람들한테는 당연한 시간이 우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으니까.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어딘지 모를 곳으로 보내지는 동안 우리는 죄수처럼 배식을 받으며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잠깐 바람을 쐴 수 있었는데 우리는 그때 시간을 추측할 뿐이었다.

눈을 뜨고 일어나면 몇몇은 다시 눈을 뜨지 못하고 그런 그들을 군인들은 가끔 들어와 청소하듯 치우고는 했었다.

어느 날 섬에 도착하고 나서 총을 든 군인들의 명령에 따라 배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걸음에는 힘이 없었고 눈에는 생기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탈출을 시도할 기력도 의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후덥지근한 기온.

끝없이 꼬이는 벌래.

우거진 야자수 나무들과 허리까지 자란 수풀.

모인 사람들의 불쾌한 체온과 욕지거리.

그 모든 악조건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 나왔다.

그 불만에 높은 계급으로 보이는 누군가가 품속에 권총을 꺼내었고

그 사람을 쐈다.

아직 불만이 있는 사람이 남았냐고 물었을 때 당연하게도 그에 대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의 얼굴은 공포로 얼룩져있었고 우리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다시 끌려갔다.

도착한 곳은 지하의 큰 벙커였다.

거기서 우린 매일 실험실의 기니피그처럼 인체 실험과 개조를 당했다.

파란 액체로 가득 찬 거대한 실험관 안에 밀어 넣어지고 입에 산소 마스크를 착용했다.

우리에게 유일하게 주어지는 자유 시간은 식사 시간과 잠을 잘 때 뿐이었다.

그들이 실험을 하면서 약물을 주사하거나 수술할 때가 있는데 힘이 강해지거나 후각이 예리해지거나 이상한 증상이 생기기도 했다.

문제는 그 강해진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근육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손상을 입거나 심장이 멈추는 그런 일이 벌어지기도 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나갈 생각을 포기했었다.

그들이 우리를 실험하면서 무언가를 정리했었는데 우리로서는 그게 무엇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한 달을 서로에게 의지하며 버티다 보니 우리는 인종 상관없이 모두에게 전우애가 피어났고 나는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비록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식사 시간과 취침 시간에 잠깐 뿐이었지만 우리는 그 잠깐으로도 친해질 수 있었다.

우리는 첫날 불만이 있다고 사람을 죽인 계급이 높아 보이던 그 사람을 그라고 부르며 욕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 상황이 익숙해질 때쯤에 생긴 일이었다.

“한 달이면 충분하다. 이제 너희들이 우리가 헛수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할 때다!”

우리는 전쟁에 바로 투입됐다.

“끄르…ㄹ ㅅ..살…”

버티지 못하고 생을 포기한 사람과 부상으로 의식을 잃은 사람들이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생사를 알 수 없었다.

반사적으로 폭음이 들려온 곳을 돌아보니 시뻘건 화염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사람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공포 때문인지 몰라도 그때의 나는 그렇게 봤었다.

살고 싶어서 정신없이 불 붙은 사람들에게 멀어지려고 바닥을 기어 다녔다.

나를 죽이려고 하는 적을 정신 없이 죽이며 최대한 이곳에서 멀어지려고 했다.

“쓸만하군.”

그들은 우리를 같은 인간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무렵 구조 작업이 대충 진행되었고 우리들은 다시 섬으로 돌아왔다.

내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살았지만 가장 친하게 지냈던 내 친구는 눈을 뜨지 못했다.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인지 이성을 잃고 달려든 놈도 있었다.

그리고 엉뚱한 사람이 죽었다.

“명령 불복종 그리고 상사를 위협하는 행위는 전우를 위험하게 만든다. 지금 여기서 똑똑히 알아둬라. 너희는 사람이 아니다.”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던 사람은 결국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그날 밤 탈출을 시도했던 사람들은 머리가 폭발하여 죽었고 우리는 그때부터 저항할 생각을 버렸다.

수술을 하면서 머리에 폭탄을 심지 않았을까 우리끼리 추측했었다.

세뇌, 충성 테스트, 실험, 개조를 모두 거친 대원은 고스트 대원으로 해골 마크를 받게 된다.

여기까지 버틴 우리는 모두 끈끈한 전우애로 똘똘 뭉쳤다.

우리는 고스트 대원이 되었다.

대원이 되고 나서는 생활의 질은 크게 올라갔고 술과 담배 개인 시간까지 생겼었지.

그리고 우리는 살기 위해 죽음으로 뛰어들었다.

임무를 거부하면 죽는다.

내가 임무에 성공하지 못하면 다른 대원이 투입되어 죽는다.

전우가 죽어도 우리는 장례를 치르지도 못했다.

우리는 이름 없는 유령이요, 허상이니까.

다만 우리는 모두 섬의 변두리에 작은 무덤을 만들었고 시간이 남을 때마다 우리는 그곳에 들러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고스트 대원은 전쟁터에 적진의 중심지에 투입되어 교란 임무 혹은 암살 임무를 수행했고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고개 저을 때 우리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해 죽음 속으로 뛰어들었다.

전쟁이 심화할수록 대원들의 생존율은 심각할 정도로 떨어졌었고 대원이 살아서 돌아오면 그는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모두가 죽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임무는 핵시설을 점거하기도 하고 요인 암살을 주로 했었나?

전쟁이 끝나갈 무렵 대원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얼마 남지 않았고 우리는 기대하던 전역의 시간이 왔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전역을 의심하지 못했을까?

많은 비밀을 알아버린 우리를 왜 살려둘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섬을 지키고 있던 병력과 그는 우리를 공격했고 대원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이상하게도 머리 안에 있는 칩은 터지지 않았다.

결국 전역 날 살아남은 대원은 나를 포함해서 셋밖에 남지 않았다.

다 죽고 섬에서 살아남은 인간은 셋 뿐이었고 우리는 구조 됐다.

그리고 그날부터 유령은 그토록 바라던 인간이 될 수 있었다.

“존. 이봐. 또 그때를 떠올리는 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

아직도 그 섬에 잠깐 들려 그 작은 무덤들을 본다.

피우고 있던 전자담배를 끄고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우리는 잠깐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뭐.. 나였어도 못 잊긴 했겠군. 일이나 하자고. 그래서 어쩔 거야? 포기? 접촉?”

“포기는 무슨… 조만간 만나봐야겠어.”

****

델리를 착용한 이후 친구들의 과보호는 어느 정도 줄어들었다.

뭐만 하면 내가 하는 일을 뺏어가기는 하지만 공포의 기저귀 작전이 실행되지 않는 것 만으로 감사히 여겼다.

안대는 밖에 나갈 때 말고는 벗어두기로 했다.

역시 없는 게 더 편해.

남들이 볼 때는 어쩔 수 없이 써야 하지만.

일단 저챗 방송으로 방송을 켜고 델리를 바닥에 놔뒀다.

최근 에너지 소모가 심하다고 한탄을 하길래 충전이나 하라고 어깨에서 빼냈다.

어깨에 달려 있다고 충전을 못하는 건 아니지만, 전원을 끈 상태에서 충전하는 것이 효율이 높은데 어차피 꺼져 있는데 달고 있을 필요가 있나.

“어제 휴방 이유는 공지에 올려뒀죠…?”

[ㅇㅇ]

[스토커 신고 하라니까 결국 그렇게 될 줄 알았다]

[내가 아는 건 우리 집고양이 이름인데]

[선생님의 고양이 이름은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손 보여줘]

“손 괜찮아…! 별로 안 다쳤어!”

화면에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서 보여줬다.

깨끗한 새 붕대로 둘둘 둘린 손은 상태가 어떤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한동안 재활]

[방송 오래 하면 냥지가 끄게 만들라던데 ㅋㅋ]

[그만 연기해!]

[근데 안대는 ㅇㄷ?]

“밖에 나갈 때만 하려고, 한동안 빼고 생활해보니까 편하던데…”

[의수도 빼놨네ㅋㅋ]

[님 도대체 방송 어떻게 진행하려고 ㅋㅋㅋㅋㅋ]

“오늘 저챗 방송만 하고 끌 거야…”

화면에 채팅창을 보며 잠깐 생각에 빠졌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할까.

친구들이 너무 과보호하려는 이야기?

그때 일을 좀 풀어볼까?

어차피 잘 끝난 일이고 내 방송을 보고 있을 혹시 모를 스토커한테 경고할 겸?

우우웅

유튜보 편집자가 소식 늦게 접했는데 괜찮은지 묻길래 별거 아니라고 카톡 했다.

[다쳤으면 푹 쉬긴 해야지]

­아프지마님의 10000원 후원!

얘! 왜 맨날 아프니? 푹 쉬렴!

[ㄹㅇㅋㅋㅋ]

[그래도 좀 더 켜주고 가줘]

“좀 하다가 끌 거야…! 어제 휴방 하기도 했으니까.”

눈치를 보다가 방송 분위기도 괜찮아서 그때 일을 조금씩 풀어봤다.

“기절 시킨 줄 알았는데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칼을 얼굴에 찌르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 손목을 잡았는데 칼날이 발사되지 뭐야…? 피하긴 했는데 눈에 날아와서 큰일 날 뻔...!”

[아, 그거 불법 무기인데;;]

[이번에 뉴스에서 폭력 조직이 잡혔다고 하는데 그게 예지 스토커들이었음?]

[그걸 이긴 게 ㄹㅈㄷ]

[아니, 근데 도망갈 생각부터 해 ㅅㅂ]

[스토커 규모가 ㄷㄷ하네]

[안 다쳐서 다행 ㅠㅠ]

[그걸 어떻게 피했냐]

[우리나라에 아직도 폭력 조직이 있었음? ㄷㄷ]

[이제 없음 어제 잡힌 놈들도 최근에 자리 잡았다가 바로 뿌리 뽑힘ㅋㅋ]

“어… 그리고 경찰분들이 총 들고 오시길래 깜짝 놀랐어…!”

아직도 그때를 생각해보면 내가 있던 세계와는 많이 달라 괴리감이 느껴졌다.

한국 경찰들이 총을 들고 뛰어올 줄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야.

[총? 아…]

[ㅠㅠ]

[근데 그거 제압용 충격탄이라서 죽지는 않을걸? 근데 범죄 조직이면 실탄일 수도 있겠네]

[봇들은 안 왔음? 그 정도면 봇들도 올 만한데]

“봇…? 그건 모르겠네…”

[ㅋㅋㅋㅋ]

[얘 공부 좀 하렴!]

[이번에 토위치 파티 열리는 데 참가 할 거?]

[곧 열리네]

“그게 뭐지…? 친구들한테 한번 물어볼게요…”

[참게비령 : 토위치에서 하는 파티가 있는데 스트리머들이 모여서 그냥 놀고 오는 거야.]

“앗…! 보고 있었네… 언제 왔어...?"

[참게비령 : 방금 ㅎㅎ]

그렇게 방송을 하는 중에 냥지가 도중에 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간지럽히며 강제로 침대로 밀어 넣고 이불로 나를 꽁꽁 싸놓았다.

“방송 끈다?”

나의 의견을 물어보는 듯하지만 냥지의 얼굴을 봤을 때는 무조건 YES가 나오지 않으면 혼낼 기세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끌 생각이었으니까.

[냥하]

[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

[먹이사슬 최상위권 ㄷㄷㄷ]

[냥지 >예화, 정란 > 예지 > 폭력 조직]

[가슴이 웅장해진다]

[냥바]

[예바]

[테바]

“오늘 정란이랑 예화는 합방 하느라 우리 집에 못 온다! 나 방송마저 하고 올게.”

“알았어…”

그런데 침대 위에 누워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왜 다시 온다는 거야?

왜 자꾸 내 침대에 오는 거지.

델리가 효율이 차이 난다고 말하긴 했지만, 체감이 될 정도로 차이가 크게 나는 걸까?

얘들이 말하는 거 봐선 차이가 좀 많이 나긴 하나 본데 직접 느껴보지 않아서 체감 되지 않았다.

이런 고민을 몇 번 해본 것 같은데…

냥지가 돌려놓은 로봇 청소기가 위에 야뭉이를 태우고 천천히 들어와 방을 유유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고양이 자동차..?

로봇 청소기가 델리를 시비를 걸듯 툭툭 치며 지나갔다.

[제법 거대한 쓰레기. 귀중품일 경우 보관하시오.]

[열등한 쓰레기! 건방지기 짝이 없음. AI조차 못 되는 인공지능!]

[정정. AI 확인. 귀중품이므로 바닥에 방치하지 마시오.]

바짝 약이 오른 델리가 온갖 폭언을 쏟아냈지만 로봇 청소기는 그런 델리를 무시하며 거실로 나가버렸다.

최근에 냥지가 산 로봇 청소기인데 야뭉이의 만족도는 매우 높았지만, 가끔 델리의 화를 돋웠다.

나도 사고 싶은 게 생겼는데 쇼핑이나 한번 해볼까.

그전에 통장에 얼마나 있는지 확인을…

“델리.”

[의문.]

“자동 이체 걸린 이 계좌번호는 뭐야..?”

통장에 꽤 큰 금액이 자동 이체가 걸려있었는데 나는 분명 이런 걸 한 적이 없는데…

친구들한테 토위치 구독을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큰 금액은 금시초문이었다.

[내 계좌. 약속한 금액.]

약속한 금액…?

뭐를 말하는 거지.

“무슨 약속?”

[유튜보 편집 계약 수익금의 20% 약속 받음. 정확하게 이행 중.]

유튜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잠깐 생각해보니 예전에 델리한테 유튜보 편집을 맡기면서 약속했던 게 기억났다.

아니! 이제 편집 안 하잖아!

“이제 편집 안 하잖아!”

[계약 내용 못해도 2할. 기간 정하지 않음. 영상을 언제, 얼마나 줄지 언급 없음.]

“사기꾼!”

[하하하 인간의 유머 대단히 즐거움. 정당한 계약을 사기라는 농담 재미있었음. 앞으로 계약서를 작성할 때는 반드시 주의 깊게 확인할 것을 조언.]

“야…”

델리의 몸체를 발로 툭툭 건드렸지만, 전원을 끄고 반응하지 않았다.

야이….

이런 계약이 어딨어!

냥지가 불을 끄고 침대에 들어와 나를 안는 베개로 쓰고 있음에도 나는 뭔가 당했다는 생각이 나서 분했다.

나를 위해 고생하고 있는 건 맞아서 줘도 상관없는데 이런 방식으로 뜯기니 뭔가 화가 나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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