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새벽 감성
* * *
가끔 자고 일어나면 내게 없었던 기억이 떠올라 당혹스러울 때가 있었다.
서예지와 테일리의 기억들이 내 기억 속에 스며들어 원래 있었던 기억처럼 당당하게 자리 잡을 때가 있다는 말이다.
기억만이 아니다.
때로는 습관이나 말투가 영향받을 때가 있었는데 그 영향력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었다.
그에 따라 내 안에 느껴지는 무언가도 희미해지고 있는 건 단순히 내 착각일까?
여태 나타나지 않았지만 내 안의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서예지의 존재 또한 희미해지고 있었고 테일리도 말이 점점 없어지고 있었다.
점점 소실하는 듯 느껴지면서도 무언가가 차오르는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걱정하는 나에게 우리는 하나가 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테일리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 보였지만 말해줄 생각이 없는 듯한 태도였다.
좋은 변화인지 나쁜 변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분명 변해가고 있었다.
‘고마워’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려온 것 같아 눈을 떠보니 냥지는 내 옆에서 눈을 꼭 감은 채 자고 있었고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델리?”
[의문.]
“혹시 네가 말했어?”
[부정.]
뭐였을까?
다시 누워 잘까 생각했지만 이미 잠에서 깨버렸다.
나는 특유의 기지개를 켜고 입에서 실실 나오는 하품을 입으로 막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냥지는 아직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목까지 이불을 끌어서 덮어주고 창밖을 구경한다.
창문을 열어 새벽 공기를 마셔보니 역시 새벽 공기는 좋다고 생각했다.
새벽이라 그런지 아무도 밖을 돌아다니지 않는 거리와 찬 공기.
나는 이런 조용한 시간을 즐기는 걸 좋아했었다.
최근에는 친구들 덕분에 이런 상황이 나오지 않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일찍 잠에서 깨버려서 오랜만에 이런 고요한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흠, 일찍 일어나는 것도 나쁘지 않네.
일상이 바뀌고 나서는 내가 나태 그 자체였기 때문에 자는 시간이 다른 사람보다 조금 길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많이 긴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매일 그렇다는 건 아니고 조금밖에 안 잘 때도 있고 뒤죽박죽이라고 해야 하나.
10시간 잘 때도 있고 4시간 잘 때도 있고 그렇다.
4시간 자면 새벽에 자주 일어나는 거 아니냐고 물을 수 있지만, 새벽 늦게 잘 때는 일찍 일어난다는 소리다.
이렇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니 지금까지 정리하지 않은 일들이 생각나네.
내 캐릭터로 동인지가 그려지는데 성인지도 그려지고 있다는 이야기.
내가 아닌 게임 캐릭터를 그린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려고 해도 왠지 찝찝해서 성인지는 그리지 못하게 해주면 좋겠다고 밸보에 연락했다.
그런 묘사나 나신 그림은 막고 단순한 노출 그림 정도는 상관없다고 말이다.
문제가 생기면 연락하라고 줬던 연락처로 메시지를 보냈는데 보내자마자 반응하길래 깜짝 놀랐다.
빨리 회복하기를 기원하며 나으면 빨리 연락해주기를 바란다며 성인지 건은 일본 지부에 연락해서 조치해보겠다고 하길래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이번에 모션 캡처 일정이 잡혔던 건 손을 다쳐서 당분간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다행히 괜찮다고 넘어가 주었다.
신작 연기 소식에 유저들이 울부짖는 건 미안하긴 했지만… 내 부상 소식에 해외 팬들이 몰려와서 걱정해준 건 고맙네.
그런데 이런 새벽에도 일하고 있다니 알고 보니 밸보는 블랙 기업…?
아… 시차…
흠흠… 까먹을 수도 있지.
델리한테 너무 의지해서 그런지 이런 상식도 가끔 잊고는 했다.
그런데 델리는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생각인 걸까?
물어봐도 대답해줄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려니 호기심이 자꾸만 나를 자극해서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인간은 호기심 때문에 목숨을 건다고 하지 않던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궁금해지니 알고 싶어진다..!
평소라면 그냥 넘어갔을 텐데 갑자기 호기심이 나를 지배한다.
나중에 꼭 알아내야지.
그나저나 너무 일찍 일어나서 그런가 할 일이 없네.
1~2시간 정도는 고요함과 여유를 즐겼지만, 그 이상 지나니 심심해진다.
예전에는 꽤 오래 즐겼던 것 같은데 일상이 항상 시끌벅적해서 그런지 좀 쓸쓸한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은 역시 바뀌는 법이라고 하던데 나도 제법 많이 바뀌었구나.
좀 이르긴 하지만 냥지를 한번 깨워볼까.
어차피 피로도 나노봇이 해소해주는 마당에 잠을 오래 잘 필요는 없지 않은가.
생각난 김에 바로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문을 열고 들어와 냥지의 얼굴을 뚫어질 정도로 쳐다봤다.
어떻게 깨워야 기분 좋게 일어날 수 있을까?
속눈썹이 길기도 하네.
“냥지야…”
조심스럽게 불러봤지만, 반응이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이 정도로는 깰 리가 없지.
“유리…!”
냥지의 본명을 불러봤지만,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꽤 깊게 잠들었는데 이걸 깨우자니 내 마음의 양심이 조금 아플 지경이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의 나는 이상한 충동으로 너무 심심했으니까.
이번에는 살짝 흔들어봤지만, 소용없었다.
기분 나쁘게 깨우고 싶지는 않아서 좀 고민이네.
“유리… 밥 먹자… 아침이야…”
“유리 바보…”
“음… 뭐라 해야 일어날까…”
좀 더 낯 부끄러운 말을 해볼까.
어쩌면 일어나지 않을까?
“유리야….”
입 밖으로 꺼내려는 순간 내가 무엇에 정신이 팔렸는지 말도 안 되는 행동들을 하고 있지 않은가?
누군가 내 몸과 감정을 조종하고 있기라도 한 걸까?
충동에 이끌려 지금 무슨 부끄러운 행동을 하려고 했던 거야.
“좋아… 진정하자…”
자, 진정하자.
나는 평소의 모습을 되찾을 필요가 있어.
소심하고 조용한 나를 떠올려보자.
하나, 둘, 셋.
진정은 무슨 놈의 진정!
난 이걸 반드시 해야겠어!
누구도 내 충동을 막을 수 없다!
“유리야, 사랑해…”
뿌듯… 아니, 지금 내가 무엇을 하는 거야?
평소에 예화가 자주 시켜서 하긴 했지만 이번의 경우에는 자발적으로… 생각해보니 친구끼리 장난으로 자주 말할 수 있지 않아?
예화도 자주 장난으로 친구들한테 그러는데 내가 못 할 이유는 없지.
물론 친구로서 사랑한다는 이야기다.
델리도 사랑하고 친구들도 사랑하며 내 시청자들도 팬들도 사랑한다.
가족이 없어서 그런지 정에 약해서 그런가?
이런걸 표현할 줄도 알아야지.
사람은 속마음을 읽지 못하기에 자신에 대한 감정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오해도 안 생기고 싸움이 크게 번지지 않지.
내가 친구들을 소중히 여긴다는 표현을 해야 친구들도 안심하지 않겠어?
아님 말고…
“사..사..사랑… 예화가 자주 하는 말…. 장난이니까!”
누구한테 변명하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되는대로 지껄여볼 뿐.
여전히 반응이 없는 냥지를 내버려 두고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앉아 TV를 켜니 방금 일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그보다 예화는 이런 걸 어떻게 자주 말하고 다니냐…
어쨌든 냥지가 못 들어서 다행이네.
듣고 일어났다면 수치사 확정이었겠지만 자고 있어서 조금 부끄러운 수준으로 넘어갈 만 했다.
감성 충만한 새벽의 영향인가!
TV에 크라이 대회 방송을 틀어주길래 지나치려다 한번 구경하기로 했다.
한국 선수에 내 친구가 방송에 나오고 있는데 지나칠 수 있을 리가 있나.
그런데 내 친구프라와 한국 선수와 싸우고 있었는데 어느 쪽을 응원해야 할지 참 애매하다.
한국인이면 한국팀을 응원해야 하지만 프라가 나와 연습을 엄청나게 했었기 때문인지 이겼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에 갈팡질팡했지만, 박진감 넘치는 싸움이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그런 생각을 잊어버렸다.
남의 싸움이 재미있다더니…
그리고 프라가 내지르는 2연타 봉권에 맞춰서 벽에서 콩콩 소리가 들려왔다.
콩콩
“?”
뭐지?
이웃집도 프라의 팬인 걸까?
프라가 봉권 2연타를 내지르고 유리해지니 흥분한 모양이다.
화끈하게 싸우는 걸 보면 흥분되긴 하지.
프라가 주도권을 잡으며 유리해지니 기분이 좋아졌지만, 한국이 지고 있는데 좋아하기도 뭐한 기묘한 상황이야…
그래도 친구가 이기는 게 더 좋지.
미안해요!
프라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잡기 기술로 한국 선수를 붙잡았다.
크게 뛰어올라 상대의 어깨에 올라탄 뒤에 허벅지로 상대의 머리를 붙잡는…. 내 기술이네?
행복 잡기다!
시원하게 바닥을 찍는 한국 선수의 머리를 마지막으로 경기는 프라의 승리로 끝이 났다.
쿵!
프라의 잡기 기술이 인상적이었던 걸까?
이웃집이 되게 신이 난 모양이다.
옆집 아저씨가 뭘 좀 아시네. 프라가 잘하긴 하죠.
그런데 집 안에서 난 소리 같은데?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침대에 누워있는 냥지의 모습만 보일 뿐 아무 일도 없었다.
역시 이웃집인가?
근데 그동안 방음이 잘 됐었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잘 들리지?
옆집 사람이 프라의 열혈팬인가 봐.
얼마나 신이 났으면 이렇게까지 크게 들릴까.
그래도 새벽이라 자중하셔야 할 텐데…
경기가 끝나고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준결승 축하드립니다! 다음 경기에 승리하면 이제 챔피언이라고 불러야겠군요.”
“아직 우승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되겠군요.”
“엄청난 자신감이군요! 그런데 이번 경기에 보인 마지막 기술은 혹시 프라가 만들어낸 기술인가요?”
“제 친구의 기술입니다. 엄청난 고난도 기술이지만 성공한다면 이만한 기술이 없죠.”
“혹시 친구가 크라이 선수인가요? 아니면 UFC?”
“그냥 방송하는 친구입니다.”
미친놈아!
갑자기 왜 나한테 어그로를 튀게 만들어!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고 태연한 태도가 어이가 없었다.
아니다. 좋게 생각하자.
크라이 하는 사람들은 이제 날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해졌을 텐데 이 정도로는 커뮤니티에 잠깐 언급되고 마는 수준이겠지.
가끔은 수양이의 긍정 모드가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베로니아는 떨어진 건가?
검색을 해보니 4강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운 나쁘게도 4강에서 프라와 만나서 떨어졌다고 하던데 나중에 경기 한번 봐야겠네.
그래도 첫 데뷔에 4강이면 좋은 성적은 맞겠지?
그렇게 TV를 보고 있는데 냥지가 얼굴이 붉어진 상태로 방에서 나왔다.
어디 아픈 건가?
“얼굴이… 어디 아파?”
“응? 아니! 아무것도!”
화들짝 놀라며 내 시선을 피하는 게 수상쩍지만, 본인이 아니라니 넘어갔다.
여전히 나와 시선을 피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오늘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그냥? 프라가 경기 하는 걸 보고 있었는데 재미있네.”
“프라…? 아, 네 친구.”
냥지가 옆에 앉아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저러는 거지?
“뭔가 이상한데…”
“뭔데?”
“너 뭔가 달라진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나? 뭐가 달라졌지?”
머리를 풀어서?
평소에 내가 잘 때 머리 푸는 걸 많이 봤으니 그건 아닐 건데.
“이제 떨면서 말을 하지 않네? 어?”
“말?”
무슨 말…?
어..?
그러고 보니 오늘 따라 말이 술술…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부끄러울 필요가 있나?
근데 너무 나댄 것 같기도 하고…
“그걸 왜 부끄러워하지? 방금 말 잘하던데 계속 그렇게 말해. 듣기 좋기만 한데.”
“음… 그래?”
괜찮겠지…?
갑자기 말 실수 하는 거 아냐?
고민하던 중 내 볼을 붙잡고 힘차게 흔드는 냥지의 손길에 고통을 호소했다.
“아…아! 아야!”
“또 이상한 생각 한다. 넌 생각이 너무 많은 게 문제야.”
“아파!”
“이 기회에 말투 좀 고치자.”
예전 말투로 돌아올 때마다 잡아당길 거라는 무서운 말에 무조건 항복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직도 냥지의 볼이 붉은데 감기라도 걸렸나.
분명 내가 목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줬는데 좀 걱정되네.
“아까부터 얼굴이 빨간데 감기라도 걸린 거 아냐…?”
“또! 또!”
“알았어! 그만!”
볼을 실컷 잡아당겨 졌다.
“아무것도 아니야. 밥이나 먹자.”
“정란이랑 예화는 안 기다리고?”
“알아서 하겠지. 집에 오면 시켜 먹으라고 하던지.”
오늘은 자기가 아침을 만들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늘만이 아니라 내가 손을 다치고 나서는 계속 자기가 하고 있지 않나?
냥지가 차려준 닭가슴살 샐러드를 먹으면서 생각한 건데 오늘 뭔가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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