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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51화 (51/78)

〈 51화 〉 예감

* * *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정란이랑 예화가 놀러 오기 전에 금방 익숙해질 수 있었다.

테일 리가 심문을 당하기 전의 성격이 이랬을까?

기억 속의 테일리는 호기심이 엄청나게 강하고 생각을 속에 담아두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비밀이 없고 긍정적이며 만남을 좋아했지만 외로움을 많이 타는 듯 혼자 있는 상황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이유는 고아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녀의 어린 시절은 항상 혼자였고 가족을 부러워했기 때문인지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항상 무리에 떨어진 늑대처럼 굴었고 사람들과 관계에 집착했다.

집착이라고 해봤자 연락을 자주 하고 자주 만나는 수준이었지만 남들한테 피해 주고 싶지 않은 생각이 좀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에 그친 것 같았다.

테일리의 기억이 흘러들어오고 말을 걸어봤지만, 반응은 없었다.

아무래도 나와 하나가 된 게 아닐까 짐작만 해볼 뿐이다.

하나가 되면서 테일리의 기억이나 성격도 점점 받아오고, 말이지.

서예지의 습관이나 성격은 이미 영향을 받았었지 않나 싶은데 잘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도 가족이 없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을 제외해도 신기할 정도로 닮은 점이 많았다.

왜 그럴까?

고민한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넘어가고 다른 생각을 해봤다.

아직 제대로 합쳐진 게 아닌 건지 변덕이 좀 심해졌는데 아마 곧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아니면 원래 우리들의 변덕이 심하던지 그러겠지.

냥지도 그랬었지만, 친구들은 하루 만에 바뀐 나의 변화에 무척 놀라면서도 좋아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고.

“얘가 자고 일어나니까 갑자기 사람이 확 바뀌었다니까?”

“어떻게 이렇게 바뀌지?”

“그 이야기는 그만하지?”

예화의 허리에 손을 두르며 내 쪽으로 확 끌어당기자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건 좀 그런가..?

“아, 좀 그랬나? 미안…”

“예지인 건 확실하네.”

“좋긴 좋은데 좀 당황스러워서 그래. 평소에 내가 하고 다녔는데 내가 당하니까 느낌이 좀 색다르네.”

스킨쉽을 좋아하는데 당하는 건 약하다고?

장난기가 동했지만 억누르고 넘어갔다.

장난치다가 우정 파괴 해버리면 어쩌려고?

“도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뭐임?”

정란이의 질문에 갑자기 냥지가 갑자기 사과처럼 얼굴을 붉히며 식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갑작스러운 돌발행동에 우리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아! 날파리! 아…하하..!”

“집에 어떻게 벌레가 들어왔지? 벌레 차단막이 꺼졌나?”

“무슨 벌레야?”

예화가 보일러 옆에 달린 무언가를 콕콕 누르며 확인하고 있었고 정란이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굳이 벌레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어 보였다.

“날파리! 얘들아 좀 덥네. 왜 이렇게 덥지?”

“고장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들어왔대?”

손부채를 팔랑팔랑 부치는데 얼굴이 붉어서 그런지 확실히 더워 보였다.

그런데 지금 가을이 끝나가고 겨울이 올 시기인데 더위를 느끼다니 어디 아픈 건가?

머리에 손을 올려보니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열이 좀 있는데.

냥지의 얼굴이 붉은 걸 보니 몸살감기라도 온 걸까?

나와 눈이 마주치자 냥지가 느닷없이 양손으로 내 얼굴을 밀어내며 고함을 질렀다.

“멈춰! 그 행동 멈춰!”

“무슨?”

“잠깐만 심호흡 좀… 흐읍…후…”

오늘 따라 안 하던 짓을 많이 하네.

냥지의 지금 상태가 딱히 정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괜찮아?”

“갑자기 흥분했네. 괜찮아. 응.”

본인은 괜찮다고 하지만 아까 분명 내 손에 열이 느껴졌는데?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정란이와 예화도 냥지의 행동이 수상했는지 미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정란이랑 예화가 밥 먹고 있는 동안 말 상대나 좀 해주다가 셋이 거실에서 눕길래 내 방에 들어왔다.

살이 안 찐다는 걸 알았는지 체질이 바뀌었다고 좋아하면서 뒹굴뒹굴 했는데 안 찌는 건 알겠지만, 인간으로서는 어떨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도 시간 날 때마다 그랬는데 편하긴 했었지.

그런데 오늘 왜 자꾸 무슨 일이 생길 거 같지?

기분 탓이겠지?

에이... 방송이나 해야지.

오늘은 일찍 방송하고 일찍 꺼야겠다.

“얘들아. 안녕.”

[ㅎㅇ]

[??]

[?]

[?]

“왜 그래? 버퍼링이라도 걸렸나?”

시청자들 반응이 영 이상하네.

버퍼링이라도 걸렸나?

[뭐임?]

[??]

[오늘 기분이 엄청 좋으신가]

[말투가 지난 방송이랑 비교했을 때 천지 차이이신데]

[헤으응 눈나 드디어 얼굴값…]

“원래 말투로 돌아가면 냥지한테 혼나. 새벽에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다가 말투 이제 고정하라고 하더라. 혹시… 불편한 건 아니지?”

[ㄴㄴ]

[훨씬 좋아졌습니다. 선생님]

[스토리 모드 예지를 현실에서도 볼 수 있다니]

[헤으응 이것은 내가 내는 소리. 난 헤으응하다. 이것은 누나 기쁨]

“좀 어색하네.”

이때까지 했던 말투와는 반대로 바꿔버리니 좀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나?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방송은 또 다른 기분이다.

이것도 하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어색하고 나발이고 고정하십쇼]

[인생은 좋은 것만 해도 짧은데 왜 굳이 좋은 점을 피하려고 하십니까.]

[ㄹㅇㅋㅋ]

[서예지 : 말 안 듣는 편]

[제발 말 좀 들어!]

“아, 알았어! 진정해.”

[듣기 좋습니다 선생님]

[드디어 내 스피커 볼륨이 100에서 40으로 줄일 수 있는 건가.]

[ㅋㅋㅋㅋㅋ 여기 방송 기준으로 사운드 맞췄다가 광고 한번 팍 뜨면 귀 터짐]

[요즘 자신감이 부쩍 늘었나 보네. 예전이었으면 냥지가 혼내든 말든 시도하다가 말고 시무룩인데 ㅋㅋ]

“너희랑 친구들 덕분이야!”

내가 착한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어도 지금처럼 바뀔 수 있었을까?

내 생각에는 전혀 아니었다.

좋은 친구들과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돈을 벌어도 행복하진 못했을 것 같다.

아닐 수 있겠지만 내 생각이 그렇다고… 델리 같은 친구를 만난 게 큰 행운이기도 하고…

[갑자기 분위기가 부끄럽네 ㅋㅋ]

[ㅋㅋㅋㅋㅋㅋ]

[ㄹㅇㅋㅋ]

[프라 오늘 인터뷰 봄?]

아, 맞다!

프라 나한테 말도 없이 인터뷰에서 나를 언급하고 말이야.

무척이나 곤란했다.

오늘 따라 외국인들이 내 방송을 많이 보고 있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 절대 아니라고 100% 확신한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기는 한데 크라이에서 나 유명하지 않아? 인터뷰 한번 했다고 시청자가 많이 불어난 것 같아.”

[당연하지 ㅋㅋㅋㅋ]

[방송 모르고 게임만 하는 애들도 많음. 걔들은 대회만 챙겨볼걸?]

[단순히 배우로 알고 있는 경우도 많아서 한번 보러 온 듯]

[UFC처럼 보는 애들도 많아서 대회만 보는 일반인들도 꽤 있음]

“아, 그렇구나. 프라한테 전화해봐야겠다. 그래도 2등 확정이잖아.”

프라한테 통화를 거니 묵직하고 남자다운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예지?”

“맞아. 결승전 올라간 거 축하해! 와아아아!”

“요즘 사칭은 이렇게나 발전했군. 너무 똑같은 목소리라서 속을 뻔했다. 조심해야겠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칭 의심 ㅇㅈㅋㅋㅋㅋ]

[아ㅋㅋ 잘 만든 보이스 피싱이네ㅋㅋ]

[감쪽같이 속을 뻔했네 ㄹㅇ]

[사칭범! 방송을 끄고 예지를 데려와!]

아니… 그 정도야…?

도스코드로 프라에게 통화가 오길래 받았다.

“내 전….”

“예지 네 사칭이 나한테 전화를 했었다.”

“야! 나 맞다고!”

“뭣! 그럴 리가 없다! 너의 말투는 좀 더 소동물에 가까운 말투다. 흠… 그러고 보니 지금의 말투가 더 어울리긴 하군.”

알고 놀리는 거 맞지..?

이쯤 되면 놀리려고 살살 약 올리는 것 같은데?

“됐고 결승전 축하해! 또 통화 끊으면 진짜 죽어.”

“음… 적응이 안 될 정도로 많이 바뀌었군. 내가 대회에 참가하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어쨌든 고맙다.”

“베로니카 있어?”

“다음에는 같이 결승전에 올라가겠다고 맹훈련 중이다. 잠시… 베로니카!”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며 베로니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4강 축하해! 꽤 잘했나 봐?”

[ㄹㅇ 잘하긴 하더라.]

[ㅇㅇ 프라랑 비슷한 스타일이던데]

[좀 다르긴 함]

“에이… 스승들이 누군데 4강에서 끝난 것도 사실 혼나야죠. 어… 근데 말투가?”

“첫 데뷔인데 이 정도면 훌륭한 거지. 말투 이야기는 이제 그만해. 오늘 종일 그 소리 듣느라 피곤해.”

“아하하하. 알겠습니다. 크라이 한판 하실래요? 이제 제법 상대해볼 가치가 있다고요?”

“나중에 같이 하자.”

“약속했어요.”

따로 날짜를 잡은 건 아니니까 생각날 때 하면 되겠지.

“지금 훈련 중이라서 이만 끊지.”

“알았어.”

“바뀐 말투 마음에 든다. 매력적이야.”

뭐래.

그 말을 전하자마자 통화는 바로 끊겼다.

짜식… 안 본 사이 아주 느끼해졌어.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ㅁㅇㅁㅇ]

[ㅋㅋㅋㅋㅋ]

[빌런 웃음 ㄷㄷ]

[스토리 모드 예지 보는 것 같아서 행복 잡기 마렵네요]

[ㅓㅜㅑ]

[맞다 일본에서 이제 성인지 막혔다고 하던데]

“내가 성인지는 그리지 마라고 했어. 그래도 수영복 정도의 노출은 상관없을걸? 그 정도 그림은 막기도 뭐해서.”

수영복 정도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는 배우들이나 모델들도 보여주는데 뭐.

바다에 수영복 입고 놀러 가기도 할 텐데 그때 사람들 눈을 다 가리고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도 좋아]

[헤으응]

[이랬는데 내일 바로 원래 예지로 돌아가는 거임 ㅋㅋ]

[ㅡㅡ]

“아니거든?”

똑똑

“잠시만 기다려봐.”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 문을 열고 나가보니 애들이 외출복을 입고 서 있었다.

“어디 나가?”

“쇼핑하러!”

“너도 같이 갈래?”

갑자기 방종하기도 뭐하고 쇼핑은 많이 따라가 봤는데 항상 피곤하더라.

싫다는 건 아니고…

“방송 중이라서.”

“우린 그럼 갔다 올게~”

묘하게 내가 같이 안 갈 거라고 확신한 태도네.

따라갈걸 그랬나?

근데 갑자기 웬 쇼핑이지.

집에 혼자 남은 적이 거의 없어서 그런가?

뭔가 허전했다.

조금… 아니 많이…?

애들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냐.

자리에 앉아 방송이나 하자.

[밸보는 신작을 풀어라~]

[솔직히 장르별로 게임 하나씩 뽑아줘야 함 ㅡㅡ]

[ㄹㅇ 지금 VR 게임 세 개밖에 없는데 그 장르 안 좋아하는 사람들은 뭐 하라고]

[PC 게임을 하세요]

[너나 해]

“나 왔어.”

[ㅎㅇ]

[뭐 하다 왔음?]

[예지는 분명 24시간 중 10시간을 샌드백을 혼낸다. 아마도 그것은 정확해. 방금도 샌드백 하나를 터트렸을 것이다.]

“친구들이 쇼핑 갔다 온다길래 갔다 오라고 했어.”

방송 진행 좀 하다가 나중에 선수들이랑 크라이 대전하는 방송할 거라고 예고하고 꺼버렸다.

친구들이랑 합창하기로 약속했었는데 조만간 도스코드로 같이 연습하기로 했다.

델리야.

그런데 어떤 용도로 쓸지 진짜 안 알려줄 거야?

[모르는 일]

거참 끈질기네.

알려주면 1할 더 추가?

[거절]

야, 솔직히 내가 거의 알아내고 지금 물어보는 거야.

지금 자백하고 광명 찾자.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넣는 거 모를 줄 알았어?

[놀라운 정보력. 흥미롭지만 거절하겠음. 알고 있는데 물어보는 이유는 무엇?]

제발... 내가 호기심에 미쳐서 죽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래?

나 어제부터 궁금했는데 너를 위해서 지금까지 참은 거야!

[치료해주겠음. 한번 해보길 바람. 궁금해졌음. 앞으로도 나를 위해 참아주길 부탁.]

협상... 협상하자...

이 녀석 보통이 아니다.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악착 같이 숨기는 거지?

나한테 숨길 이유도 없잖아.

제발 힌트라도 줘...

[힌트 : 1. 당신을 2. 놀리는 게 3. 재미있음 4. 하하하]

갸아아아아아악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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