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생일
* * *
따라갈걸. 그랬나?
혼자 남게 되어서 그런지 상당히 심심했다.
기다리면서 내 몸의 한계를 테스트해 볼까?
물구나무서기로 몸을 거꾸로 뒤집어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대단해!
한 손가락으로 물구나무서는 것도 어렵지는 않네.
그동안 운동을 하지 않아도 근육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운동한 적이 없었지.
테일리는 꽤 많이 했던 것 같지만 나는 운동과 담 쌓은 몸이었다.
예전에는 곧 죽을지 모르는 상태였던지라 운동을 할 이유가 없기도 했고.
이런 신체를 가지고 운동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다.
곧 흥미가 사라져서 그만두고 침대에 뒹굴뒹굴 했지만 운동을 했다는 거에 의미를 둬야겠지.
그런데 여자들의 쇼핑이 원래 오래 걸린다고 하지만 이 정도로 오래 걸릴 수가 있나?
밖을 보니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너무 과민반응인가.
오늘은 평소보다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마치 누가 억지로 시침을 붙잡고 돌리는 것처럼 길게…
시간은 상대적이라더니 진짜였나?
밥은 먹고 오는 걸까?
그냥 먼저 밥 먹고 있을까?
그냥 방종하고 따라갈걸. 그랬나?
멍하니 불 꺼진 방 침대에 누워있다가 팔로 눈을 덮었다.
깜깜한 방 안에서 나 홀로 누워있었다.
삑
“우리 왔어.”
“왜 이렇게 조용하냐?”
“자고 있나?”
깜빡 잠들었었나?
희미해지던 정신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지금 몇 시지?
내 방의 문이 열리며 예화가 안에 들어왔다.
“왔어? 왜 이렇게 늦었어. 한참 기다렸잖아.”
“일단 거실에 나와볼래?”
무슨 일이라도 있나?
내 손목을 잡고 침대에서 일으키는 예화의 손길을 따라 거실로 나와보니 냥지와 정란이가 어색하게 무언가를 가리고 있었다.
뭐야?
뭘 가리고 있는 거야?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서 뒤에 숨겨진 무언가를 확인하려고 하지만 냥지와 정란이가 옆으로 이동하며 다시 가린다.
쇼핑을 갔다 와서 무언가를 사 왔는데 내가 보면 안 되는 무언가라….
무슨 물건이길래?
예화를 시켜서 방 안에 있는 나를 데리고 나오게 해놓고 정작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숨긴 다라.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안 맞는데?
진짜 숨기려고 했으면 날 부를 리가 없고…
냥지가 정란이를 번쩍 들어 올려 식탁 위에 앉혀서 가린 뒤 나와 예화를 밀치며 방안으로 밀어 넣었다.
“잉? 엥?”
“자, 들어가세요. 조금 있다 부를 때 나와.”
“응? 왜 그러는데?”
“아.. 예지야! 들어가자.”
너무 수상했지만 억지로 알려고 하면 친구들 기분이 상할까 봐 얌전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보니까 좀 있다 알려주려는 모양인데 좀 참지 뭐.
아, 근데 요즘 호기심이 많아져서 지금이라도 문 열고 확인하고 싶기는 한데…
“예화야 요즘 노래 좋은 거 있잖아. 그거라도 틀어. 그리고 예지야! 예화가 할 말이 있다고 하던데?”
예화가 나한테?
그냥 말하면 되는데 왜 굳이 단둘이 있어야 해?
비밀 같은 건가?
“음… 어떤 노래 좋아해?”
“딱히 안 가리는데? 근데 다들 왜 그래? 숨기는 거 있어?”
“아니! 뭘 숨겨! 내가 숨기는 건 너에 대한 내 사랑이야!”
“수상해.”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컴퓨터를 켠 예화는 엄청난 볼륨으로 노래를 틀어버렸다.
시끄럽게 뭐 하는 거야…
뭔가를 숨기는 건 확실한데 짐작 가는 게 없네.
삑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누가 왔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니 깜짝 놀란 예화가 다시 나를 자리에 앉혔다.
“왜! 뭐?”
“누가 오지 않았어?”
“아무도 안 왔는데? 네가 잘못 들은 거겠지.”
안절부절못하는 예화를 안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한번 기다려보자.
혹시 예화가 불편할 수 있으니 델리는 벗어 놓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취급 곤란]
“너..너! 요새 너무 대담한 거 아냐?”
“좋잖아. 싫으면 말해줘.”
싫다면 언제든지 그만둬야지.
아쉽긴 하지만 어쩌겠어.
그 뒤로 계속 삑삑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지만 신경 쓰지 말고 눈을 감았다.
뽀송뽀송 잘 말려진 이불의 감촉과 포근한 이 느낌 역시 좋단 말이지.
적당한 사람의 체온이 느껴져 잠이 솔솔 왔다.
내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던 예화도 잠잠해진 거 보니 예화도 자고 있는 걸까?
하기야 쇼핑이 너무 오래 걸리긴 했어.
예화도 쇼핑 때문에 지쳤나 보다.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드는 걸 보면 그런 거겠지.
난 근데 피곤하지도 않은 상황에 잠이 오는데… 방송 때문에 피곤했다고 치자.
피곤하든 말든 잠 오면 자는 거지.
내가 생각해도 너무 게으른 생각인걸…
“얘 좀 봐. 예지 좀 데리고 있으라고 했지 같이 자라고 했어? 일어나.”
흔들리는 느낌에 눈을 떠보니 냥지가 나와 예화의 몸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응…?”
“아, 깜빡 잠들어버렸네. 미안!”
냥지가 나를 일으켜 세우고 눈에 무언가를 두르며 가렸다.
이쯤 되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계속 숨긴 무언가가 나를 위해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무언가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나는 것 보면 저녁을 차린 건가?
얼마나 회심의 작품이면 이렇게까지 하냐.
근데 그럼 아까 삑삑 소리는 뭐지?
“자. 여기 앉으시고 마음의 준비!”
“설명도 안 해주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면….”
“짠!”
웬 사람들이 이렇게…
거실을 가득 채운 사람들과 식탁에 가득 차려진 음식들과 음료.
잔잔하게 들려오는 음악.
음식들의 중앙에 놓여있는 케이크 위에 타오르는 초.
“누구 생일이야?”
“너야! 네 생일!”
내 생일이라고?
그러고 보니 내 생일이 언제였지 기억이 안 나네.
기쁘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게 맞겠지.
“진짜 내 생일이라고?”
“아니야? 그럼 언제였는데?”
“몰라… 기억이 안 나.”
내 말에 정란이가 구석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낡은 달력 하나를 꺼내 총총 걸어왔다.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는 나한테 내밀어 보여주었다.
동글동글한 글씨로 내 생일이라고 적혀있는 3년 전의 기록.
서예지의 생일이 오늘이었던가?
내 생일은 언제였지?
이상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 생일 맞구나…”
“깜짝이야! 잘못 안 줄 알고 놀랐잖아!”
“우린 어떻고 헛걸음한 줄 알고 놀랐네!”
나도 모르던 내 생일파티가 시작되었다.
나와 친하지 않던 사람들도 보였고 모르는 사람도 보였다.
내가 초를 훅 불자 꺼지는 불빛에 무언가가 보이는 기분이었다.
‘이 날씨에 왜 애를 여기에…’
유독 추운 겨울에 눈이 내 몸을 뒤덮던 그때…가 뭐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낸다.
누구의 기억일까?
“울보야!”
뭐… 지금 행복하면 된 거지.
과거에 얽매이기에는 친구들이 주는 선물을 받으며 감사 인사를 전하기도 바빴다.
이 집이 제법 크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으니 엄청 좁게 느껴지는구나.
다 같이 식사를 즐기며 나를 위한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는데 다들 부끄러워하며 어색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베테랑 스트리머들도 이런 상황이 부끄럽기는 마찬가지인가 봐.
소개가 끝나자마자 순식간에 주변이 왁자지껄해지는데 역시 스트리머는 스트리머구나.
식사가 끝나고 수양이, 초야, 차향 이렇게 도둑 잡기 게임을 즐기기도 했고 친하지 않았던 에이전트님과 갬블러 그리고 조금이나마 친분이 있던 임뿌님과 꼬렛트님이랑 대화하기도 했다.
에이전트님은 근데 공익이야?
어떻게 왔지.
은초향이라는 분도 오셨는데 은초향님은 내가 봤던 사람 중 제일 작았다.
나와 친해지고 싶어 했다고 친구들이 소개해주니 일단 반갑다고 인사했다.
“아…안녕하세요!”
“제 생일에 와줘서 고마워요.”
“경기 꼬박꼬박 챙겨보고 있어요!”
내가 경기를 했었나?
요즘 게임도 잘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처음 만난 사람이라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같이 게임을 즐기니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아까 실감 나지 않았던 감동과 행복감이 뒤늦게 차올라서 헤프게 웃었다.
파티를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났을 때쯤에 냥지가 이상한 질문을 해왔다.
표정을 찌푸리며 무언가 큰 고민이 있는 것 같은 얼굴로 말이다.
“혹시 고ㅅ…”
“응?”
“아니야. 행복해?”
“응. 고마워.”
“다행이네.”
고? 뭘 말하려고 했던 걸까?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좀 찝찝하긴 하지만 신경 쓸 틈도 없이 친구들의 손길에 이끌려 게임을 하다 보니 시간은 어느덧 밤 10시가 되었다.
이제 슬슬 정리하고 떠나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빠져나가 버렸다.
폭풍이 몰아치고 간 느낌이 이런 걸까.
“언니. 피부가 너무 좋으신데 뭐 바르세요?”
“응? 나 화장품 써본 적이 없는데?”
“?”
“?”
그렇게 나를 바라봐도 대답을 해줄 수 없는 건 달라지지 않는데.
못 믿겠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초향이에게 친구들이 맞다고 증명해줬다.
“못 믿겠지만 진짜 안 써. 쟤 모든 게 천연이야.”
“아니, 그런 게 어딨어… 언니들 피부가 요즘 너무 좋아졌는데 수상해.”
“그러고 보니 내 피부 요즘 엄청 좋네. 뭐지?”
“예지 때문일걸. 얘 옆에 자면 이상하게 피로가 없어지더라.”
초향이는 지금 다 같이 짜고 자신을 놀리는 건지 아니면 진지하게 말하는 건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음… 맞다고 말하기 뭐하니까 가만히 있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