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55화 (55/78)

〈 55화 〉 내 얘길 듣질 않는군요

* * *

예전에 정란이 배가 작다고 했었던가?

치킨 몇 조각을 먹고 엄청난 과식을 했다는 듯한 태도로 소파에 앉아있는 폼이 웃겼다.

예전보다 배가 꽤 커졌다는데 그전에는 얼마나 적게 먹었으면… 괜히 몸무게가 작게 나오는 것이 아니구나.

“쟨 저것만 먹고 어떻게 살 수 있나 몰라.”

“이정란! 더 먹으라고!”

“싫다고… 배불러!”

초향이도 덩치에 맞게 그리 많이 먹는 편은 아닌지 곧 먹는 것을 포기하고 정란이 옆에 붙어서 똑같은 포즈로 늘어져 있었고 우리 셋은 열심히 먹었지만 결국 손도 대지 못한 치킨 한 마리가 냉장고로 고스란히 들어갔다.

모두 소파에 앉아 평온하게 쉬던 중 초향이의 고자질로 순식간에 평온이 깨져버렸다.

“언니! 2시간 방종은 이제 진짜 하면 안 돼!”

“2시간 방종? 누가? 우리는 합방으로 6시간 했는데?”

“예지 언니가 2시간 방송하고 껐다니까? 그것도 사람들이 23일이나 기다린 콘텐츠라고! 내가 언니 옆에 누워서 보고 있었는데 얼마나 황당했는지 알아?”

왜일까… 방송을 조언해주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팬한테 혼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은…

그래도 방종하기 딱 좋은 각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분위기도 너무 좋았고 딱 끄면 괜찮았을 상황 아니었나?

2시간 방송이긴 하지만… 다음에는 짧방이라고 제목에 붙여야겠다.

“에이. 짧방이라고 제목 썼겠지. 공지 올렸거나.”

“아무것도 안 적었어!”

“야! 서예지! 방송이 장난이야!”

예화가 장난스럽게 내 어깨를 붙잡고 짤짤 흔들었고 친구들의 장난기 어린 타박에 당해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니 내 잘못이 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알았어… 다음에 잘 알아보고 방종할 게…”

“예지 괴롭힌 애 누구야! 또 시무룩하잖아!”

“너야! 너!”

예화는 냥지에게 멱살을 잡혀 흔들렸다.

그런데 이제 손도 다 나았고 밸보 신작 모션 캡처하러 가야 하는데 일단 연락이라도 해둘까.

나 때문에 연기돼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미루기도 미안하고 기다리고 있던 게이머들도 지쳤을 시점이니까.

아직 상처가 덜 아물었지만, 이 정도는 델리한테 시키면 흉터 없이 바로 치료할 수 있다.

그래서 델리야?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생각인지 묻습니다. 5트

[거부. 5트]

내 손바닥에 간질간질하더니 완치된 것이 느껴졌다.

아직 붕대를 풀어보지 않았지만 확실하겠지.

약간의 실수가 있기는 했지만 여태 맡긴 일은 대부분 완벽하게 처리하니까.

[알아서 잘 쓰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 것. 생일 선물이나 받을 준비. 감히 상상하기 힘든 선물이니 기대할 만함.]

생일 선물?

무슨 선물인데?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선물이라고?

여러 번 물어봤지만, 델리는 무시하기로 마음먹은 듯 아무 반응도 없었다.

궁금하게 만들고 숨는 건 얘가 세계에서 제일이지 않을까?

아주 악질이야.

일단 다 나았으니 더 붕대를 두르고 있을 필요는 없겠지

손에 두껍게 둘린 붕대를 확 풀어버리고 일반 쓰레기봉투에 집어넣었다.

“어? 손에 붕대는?”

“다 나았는데 굳이 계속 두르고 있을 필요는 없잖아.”

“아직 남아있는 걸 봤는데?”

생각해보니 흉터도 안 남기고 상처가 하루 만에 사라지는 건 너무 수상하지 않나?

뭐라고 변명하지.

냥지가 꽉 쥔 내 손을 펼쳐보더니 생각보다 빠르게 나았다고 말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반응이 건조한데?

내 손을 보니 길게 그어진 흉터가 눈에 띄었다.

흉터는 남겨두었던 모양이구나.

델리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방에 들어갔던 냥지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나왔는데 예전에 정란이가 꺼내서 발라주었던 흉터 제거용 연고로 보인다.

소파에 앉아 저마다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며 흉터 제거용 연고를 발라주는데 간지러움을 참느라 어찌나 힘들었는지.

진지한 얼굴로 발라주는데 웃기도 뭐하고 손은 간지럽고…

적당한 때를 잡아서 델리한테 흉터 지워 달라고 하면 되니까.

지난번에 눈이랑 어깨 흉터는 못 지우느냐고 물으니 너무 심해서 안 되지만 지금처럼 얕은 경우는 언제든지 지울 수 있다고 한다.

애초에 그쪽 세계에서는 흉터 없애는 기술 같은 건 관심도 없었다는 모양.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게 당연하고 공장 부품처럼 갈아 치우는 시대라서 흉터 지우는 기술 같은 걸 연구할 시간에 무기나 개발한다고 한다.

그래도 사람들이 다치는 걸 안타깝게 여긴 의학자들도 제법 있는 모양인지 나노봇이나 의수 같은 것들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기업이 있단다.

역시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를 가도 비슷해.

나쁜 사람이 있는 만큼 좋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다만 저쪽은 한참 전쟁 중이라 의학은 감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기가 비약적 발전을 했다고 한다.

정란이의 작은 입이 하품으로 쩍 벌어지는 폼을 보아하니 잘 시간이 된 모양이다.

저 하품은 10시 반 정도면 하던데 신기할 정도로 정확했다.

생활 패턴이 바뀌기 전에는 저렇게 졸려서 하품하고도 밤을 새운 적이 비일비재 했다고 하는데 잠 오면 자면 될 텐데 왜 그랬을까?

“하아암. 졸령.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비척거리며 내 방으로 들어가는걸 냥지가 붙잡고 자기 방으로 몸을 돌려 세웠다.

“이이잉…”

“뭘 이이인 이야! 집도 있는 애가 왜 자꾸 여기 와서 자는 거야! 빨리 돌아가!”

“이 늦은 시간에…? 그렇게 안 봤는데 서운하다.”

“응. 아니야. 이것들이 이제 뻔뻔해지네!”

“전 아무 말 안 했습니다.”

“저도요.”

“넌 이제 집에 가! 방송 안 해?”

말만 그렇게 하지 진심으로 쫓아낼 생각은 없는 듯했지만 어느 정도 항의하는 느낌이 든다고 생각되는데 약간 불만이 있긴 있어 보였다.

“우리 집에 놀고 자는 건 나도 좋지만, 예지는 내버려 둬!”

“얘들아 난 혼자 자도 되는데?”

“음, 예지 독점은 너무 욕심이 많지 않나 생각합니다.”

“맞아!”

“오늘 온 초향이는 빠져있어!”

“내 얘길 듣질 않는군요.”

조커가 될 것 같은 기분이야…!

아무도 내 얘길 듣지 않아….

먼저 들어가서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으니 양옆에 누군가 눕는 느낌이 들었지만 쏟아지는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잠들었다.

냥지와 초향이었다.

어떻게 설득했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더 차지한 모양.

내 허벅지에 살짝 올려놓은 냥지의 다리를 치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냥지는 잠버릇이 살짝 나쁜 편이었는데 이 정도면 오늘은 얌전히 잔 편이었다.

한번은 내 몸에 완전히 올라타서 자고 있던 적이 있었지.

본인은 모르겠지만…

아침이라도 만들어볼까 했지만, 냉장고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요즘 손님이 친구들이 자주 와서 그런지 냉장고 안에는 쓸만한 재료는 보이지 않았다.

장 보고 와야겠다.

어차피 다들 한동안 자고 있을 것이고…

문밖을 열고 나가니 날이 쌀쌀한 게 감기 걸리기 딱 좋은 날씨야.

따뜻한 미역국이라도 끓여야지.

마트에 걸어가고 있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날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스토커?

너무 예민한가?

아닌데… 확실히 누가 보고 있는데?

뒤를 돌아보니 누군지 모르겠지만 어떤 남자가 나에게 빠르게 접근했다.

뭐..뭐야?

“ㅍ..팬…팬입니다!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손에 작은 종이와 펜을 들고 나에게 내미는 것을 보니 팬이라는 소리는 거짓말인 것 같지는 않았다.

잔뜩 흥분한 듯 귀가 빨개졌는데 그냥 팬이라고 하기에는 좀 많이 흥분하셨는데?

대충 사인하고 건네주니 사진도 같이 찍어도 되는지 묻길래 그건 거절했다.

주변에 날 곁눈질하며 보던 사람들도 이것저것 말하며 아는 척을 해왔다.

음… 원래는 날 아는 눈치여도 함부로 접근하지는 않았었는데 누군가 사인을 받아 가니 참을 수 없어졌나 보다.

내가 좀 유명해지긴 했구나.

이제야 실감했다.

안 해줄 이유도 없으니 사인 좀 해주고 마트로 들어갔다.

그런데 아까 누가 보고 있던 느낌은 팬들이었나?

<거짓말이지?/>

크라이 근본 콘텐츠를 23일 만에 방송했는데 2시간하고 껐다고…?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예지사랑 : 모두 침착해라! 츠쿠요미다!

이이잉 : 내가 볼 땐 오류로 꺼진 듯? ㅇㅇ 설마 이 타이밍에 끄는 사람이 어디 있겠음

Wingg : 이것은 방송사고. 토위치 서버 문제가 틀림없다. 토위치 반성해라.

냥냥폰치 : 아ㅋㅋ 장난치지 말라고~

<이곳이 한국="" 예지="" 커뮤니티=""/>

여러분 반갑다.

나는 당신들의 친구?

이곳이 마음에 들지만, 예지의 방종 마음에 들지 않아요.

어쩌면 방송이 터졌는지?

금태양 : 예지의↗커뮤에↘당도한 것을→환영하오↘낯↘선↗이여↘

나는↘나의↗ 훌↗륭한↘토수들을↗ 굽↗어↘살피는↘

깨우↗친↘ 스트리머↗ 예↘지↗요↘

새쏵 : 가엾고 딱한 자로다.

Zdzsd : 오늘 방송 시간은 ㄹㅈㄷ

<아ㅋㅋ 곧="" 있으면="" 켠다고=""/>

얘들아 ㅋㅋ 생각을 해봐 ㅋㅋ

설마 2시간 방송하고 방종하겠냐고 ㅋㅋ

장난이지롱~ 하고 다시 켠다니까?

요즘 예전이랑 성격 많이 달라져서 장난치는 거라고 ㅋㅋ

프라랑 베니 불러와서 다시 연습함 ㅇㅇ

레드썽 : 정신 차리세요.

개소리전문 : 예 ㅋㅋ 켭니다 ㅋㅋ

예지킥 : ㅋㅋㅋㅋ 프라랑 베니 방송 껐음 ㅅㄱ

치킨좌 : 내 치킨은...?

­ㅇㅇ : 맛있게 드세요 ㅋㅋ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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