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56화 (56/78)

〈 56화 〉 폭풍

* * *

장을 보고 집에 돌아오니 초향이 빼고 다 깨어나 활동하고 있었다.

초향이는 여러 의미로 대단한 애구나.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 않나?

사람은 너무 오래 자면 안 된다고 하던데.

건강은 이제 신경 쓸 필요 없겠지만 그전에는 어떻게 살아왔단 말이야?

“여어, 예하.”

“장 봐왔어? 하긴 먹을 게 없긴 했지.”

“왜 없는 거야!”

“너희가 다 먹었으니까!”

냥지와 예화가 말다툼하는 동안 정란이가 나갈 채비를 하는 게 보였다.

“어디 나가게? 밥 먹고 가지.”

“엥? 왜 막 보내셈? 혹시 내가 나가길 바라는 건가!”

“나가려고 하는 거 아니었어?”

“추워서 옷 입은건뎅. 나중에 방송할 때 갈 것임.”

그렇게 말하며 소파에 앉아있는 냥지의 옆에 가서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얘들 혹시 여기가 자기 집인 줄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아니, 사실 꽤 자주 있었다.

냥지는 오히려 좋아하긴 하지만 잘 때는 살짝 불만이 있어 보인다.

아무래도 둘이서 살던 집이 4명으로 불어나니 복작복작해지고 좁아진 느낌이 좀 있는데 더 넓은 곳으로 이사하여야 하나?

돈이야 지금 넘쳐 나고 있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꽤 큰 집을 장만할 수도 있을 텐데 이건 오늘 좀 고민해봐야겠다.

집값이 엄청나게 싼 편이던데 혹시 고급 주택 같은 것도 가능하려나?

아니면 주택을 새로 지어도 될 것 같은데… 델리한테 알아보라고 말해야겠다.

친구들한테 같이 살지 묻는 게 먼저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물어보기 무서워진다.

기껏 샀는데 아무도 안 오고 나 혼자 덩그러니 있으면 예전 생각이 날 것 같아서…

음… 좋아… 이 문제는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볼 문제군.

누워있던 정란이가 호에엥이라고 이상한 소리를 내자 예화와 냥지도 같이 의미 없는 소리를 내며 놀고 있었다.

저러고 있을 때 만들면 되겠다.

반찬 가게에서 사 온 반찬들을 반찬통이 옮기며 냄비 안에 참기름을 둘러 소고기와 미역을 볶아 물을 부었다.

물론 그전에 미역을 물에 불리고 소고기에 핏물을 제거해야 한다.

그다음 다진 마늘과 간장으로 맛을 맞추면 완성!

의외로 만들기 쉬운 편이라 혼자 사는 사람도 만들어 먹기 쉬운 편이지.

물론 요즘은 그냥 팩 까서 데우면 된다.

대기업에서 수많은 엘리트가 머리 맞대고 만들었는데 맛이 없을 수가 있을 리가 없지.

물론 그런 엘리트들이 가끔 맛이 괴악한 것들을 내놓곤 하지만 대부분은 맛이 괜찮은 편이니까 많이 사 먹는 거겠지?

내가 만든 건 미역국이 뿐이지만 뿌듯하군.

반찬가게에서 사 온 멸치볶음, 김치, 버섯 볶음을 식탁에 올려두고 미역국을 4그릇 담아서 각자의 자리에 배치해둔다.

이제 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세 명과 방안에 고양이 한 마리를 깨워서 데려오는 일만 남았군.

다른 스트리머들은 몰라도 얘네들은 방송을 켜지 않은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백조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냥지의 어깨를 톡톡 쳐서 깨우자 화들짝 놀라며 눈을 번쩍 뜬다.

냥지한테 붙어있던 애들도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다 같이 화들짝 놀라 일어난다.

“흐앗… 뭐야..?”

“밥 먹자고.”

눈을 비비며 식탁에 앉는 모습이 정말 백조구나.

백조에 가깝다는 말은 취소하겠다.

백조다.

내 방에 들어가자 아직도 이불에 둘둘 말려 자는 초향이의 모습이 보인다.

어깨를 툭툭 치지만 반응 없이 그대로 고로롱 잠들고 있는 모습이 인상 깊다.

정말 대단하다!

열심히 흔들며 초향이를 번쩍 안아 들어 의자에 앉혀두니 눈이 반쯤 떠진 상태로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사태 파악을 하는 듯 보인다.

“게으른 녀석들….”

“그게 방금까지 졸던 네가 할 말이야?”

“난 원래 게을러!”

자는 사이에 어떻게 이런 반찬들을 만들었는지 묻는 애들한테 미역국만 만들었고 반찬들은 사 왔다고 말해주며 식사를 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다 같이 먹는 아침은 특별하지는 않지만, 꽤 괜찮게 느껴졌다.

평소와 같은 평범한 일상이지만 난 이런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좋았다.

식사가 끝나자 초향이는 방송을 해야 한다며 집으로 가버렸고 정란이와 예화도 마찬가지로 방송을 위해 집으로 가버렸다.

정란이와 예화는 방송 끝나고 높은 확률로 여기 다시 오겠지?

냥지는 나와 단둘이 남게 되자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우물쭈물 눈치를 봤다.

내 생일 파티에서도 무언가 말하려다가 말았는데 무슨 말을 하고 싶길래 저렇게 고민하는 걸까?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응? 아, 아니. 그냥.”

“에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내 생일 때도 무언가 말하려다 말았잖아. 나한테 불만이라도 있는 건 아니지?”

“불만이 있을 리가 있겠어? 음… 아예 없지는 않을지도…”

설마 했는데 진짜 불만이 있었나?

깜짝 놀라 냥지의 얼굴을 바라보니 장난기 어린 얼굴로 시시덕거리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난치지 마! 진짜 할 말 없어? 그런 거로 안다?”

“음, 할 말이 있긴 한데 일단 앉아볼래?”

식탁에 앉은 냥지의 얼굴은 먹구름이 낀 듯 어두웠고 진지해 보였는데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내 생각일 뿐이지만…

“지금도 이걸 말해야 하나 싶네. 지금은 잘살고 있는데.”

“무슨 소리야?”

“내가 정란이, 예화랑 네 선물 사려고 백화점 갔을 때 있었던 일이야. 우린 각자 흩어져서 네 선물을 고르기 있었는데 나한테 웬 아저씨 두 명이 접근하는 거야.”

숨을 고르던 냥지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 아저씨 둘이 나한테 다가와서 미국에 웬 요원이라는 거야. 난 처음에 정신이상자인 줄 알았는데 경찰들이 와서 요원이라고 하더라고. 딱히 비밀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서? 갑자기 미국의 요원들이 왜 너에게 접촉했는데?”

“음… 예지 너에 대해서 볼 일이 있다고 하던데.”

“나한테 볼 일이 있다면서 왜 너한테?”

도대체 무슨 소리지?

나한테 볼 일이 있다면서 왜 냥지한테 접촉한 거지?

그리고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거야?

듣고도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네 과거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더라. 아무래도 네가 미국의 고스트 대원이었다고 확신하고 있나 봐.”

고스트…?

어떤 기억이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잠깐 스쳐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꽤 강렬하고 섬뜩한 기억 때문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지고 머리가 아파졌다.

“으으….”

“역시 괜히 말했나 봐! 괜찮아? 미안해. 내 생각이 너무 짧았어.”

“괜찮아. 계속 설명해줘…”

“아니야. 내가 실수했어. 예지야, 우리 그냥 잊고 평소처럼… 응?”

“계속 설명해줄래? 난 이 문제를 이제 끝내고 싶어. 확신했는데 뭐 어쩌겠다고?”

내 안색을 살피던 냥지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설명했다.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고 싶다고 말했어. 보호자한테 먼저 설명해주고 싶다고 나에게 말한 거고.”

보호자라…. 나에게는 냥지가 그 정도긴 하지.

그 요원들이 보기에도 그랬나 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마음 같아서는 그냥 없던 일로 치고 무시하고 싶었다.

굳이 고스트에 대해서 알아봐야 좋은 것도 없고 사과를 받아서 뭐 하겠는가.

지금의 내 일상에 그런 게 끼어든다고 생각하니 불안하기만 했다.

그런데 테일리의 고스트에 대한 과거의 기억들이 점점 떠올랐다.

마치 원래 내 진짜 기억이었던 것처럼.

테일리와 합쳐진 이후로는 테일리의 기억이 조금씩 나에게 들어왔었는데 방금 미국 요원과 고스트 대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후에는 폭발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무시하기에는 너무 강렬하게 느껴졌고 그 기억들이 나에게 만나기를 강요하듯 내 마음을 불꽃처럼 불태우고 있었다.

분노일까?

모르겠다.

지금의 내 심정은 함부로 판단하기에는 너무 복잡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어떤 감정들인지 알 것 같았다.

아련한 분노와 슬픔 그리고 두려움이 모두 뒤섞여 폭풍처럼 내 마음속을 뒤집어 놓았고 그 때문에 나도 모르게 냥지에게 알았다고 수락했다.

“불러.”

“응…? 괜찮겠어?”

“모르겠어. 괜찮은지. 근데 빨리 끝내고 싶네.”

폭풍...!

그건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가는 폭풍이었다.

내 마음속에서 몰아치는 감정의 폭풍...

어차피 테일리의 기억이 모두 생각나면 끝날 텐데, 며칠 기다리면 내 마음속의 폭풍은 끝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충동을 거부하기는 힘들었다.

내가 한 행동이 잘한 건지 모르겠다.

“진짜 부른다?”

“애들 오기 전에 빨리 끝내자.”

우우웅

아직 전화를 걸지도 않았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누굴까?

그 요원들?

“여보세요…?”

“냥지야! 안녕! 3일 뒤에 네 집에서 자도 되니?”

“아! 언니! 갑자기 왜요?”

“왜긴 왜야. 그냥 놀러 가고 싶어서지. 혹시 예지….”

“왜 자고 간다는지 알겠네. 아니, 언니 우리 집은 숙박소가 아니에요.”

“요즘 피곤해서 그래… 예지가 피로회복에 그렇게 좋다고 하던데… 사실 예지가 보고 싶기도 하고.”

“그건 누구한테 들었어요.”

“다들 그러던데?”

아까의 긴장감이 탁 풀려 의자에 기댔다.

초야 언니네.

“예지의 의견부터 들어봐야죠.”

“너희들은 예지 의견 안 듣는다며!”

“앗…! 그건 넘어가고 어쨌든 될 것 같아요. 안되면 전날에 연락 드릴게요.”

“안될 수도 있어? 무슨 일 있어?”

“그건 아닌데 일단 될 것 같아요.”

“그래. 그때 보자!”

초야 언니와의 통화를 끊은 냥지는 잠시 숨을 가다듬더니 결심한 표정으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당연하겠지만 그 요원이겠지.

강렬하게 느껴지는 감정들이 너무 힘들어서 머리가 살짝 멍해지고 답답해서 숨이 찼다.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그리움.

그렇게 힘들던 테일리는 무엇을 그리워 한 걸까.

조심스럽게 그 요원들과 대화하던 냥지는 더위 먹은 개처럼 헉헉거리는 나를 보고 통화를 끊고 나를 걱정스레 쳐다봤다.

“진짜 괜찮겠어? 너 지금 상태가 말이 아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표정 많이 좋아졌는데…”

“괜찮아…”

왠지 이번 일을 끝으로 나와 테일리가 완전히 하나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확실하지 않지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