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58화 (58/78)

〈 58화 〉 행복이란

* * *

내 마음속의 분노의 불길은 불타올라 잿빛의 재만 남았다.

이미 내게 분노란 감정은 남아있지 않았고 약간의 슬픔만이 남았다.

이 슬픔조차도 얼마 가지 않겠지.

그래도 이걸로 끝나서 다행이네.

아까 곰 아저씨가 내 주먹을 막지 않았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거라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자칫하면 범죄자가 될 뻔했네.

고개를 축 늘어뜨려 맥없이 바닥을 바라보니 내가 벌인 짓의 흔적들이 덩그러니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산산이 부서진 가구들…

이거 냥지 물건인데 내가 막 부셔도 되는 거야?

돌아오면 사과해야겠다.

내 흔적을 보며 살짝 패닉 상태에 빠지니 그쪽이 나에게 보상 문제에 관해 설명했다.

의료보험 무료, 주택 지원, 복무하던 현역 당시의 50%의 연금을 준다고 하는데 고스트들이 월급을 받았었나?

그냥 저쪽에서 정해준다고 한다.

그럴 거면 그냥 연금이라고 퉁치지 왜 말한 걸까.

장애 보상으로 매월 얼마큼 주겠다고 하는데, 사실 별 필요 없어 보인다.

돈은 벌 만큼 벌고 있고 욕심 부릴 만큼 큰 보상도 아니네.

제대군인 의료시설에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모두 무료라고 한다.

그리고 신분을 새로 만들었으니 언제든지 미국에 돌아와 주면 고맙다고 하지만 글쎄?

친구들이 전부 미국에 가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없지 않을까?

델리 입장에서는 편해지기는 하겠네.

없는 신분 몰래 만들고 조작하는 노력보다는 아무래도 편하게 원래 있는 신분으로 무언가를 하는 게 좋겠지.

신분은 감사하고 보상은 필요 없다고 말하니 안절부절못한다.

“왜요?”

“아무래도 보상을 받으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필요 없어요. 아, 사과 받은 거로 칠 테니 빨리 나가주세요.”

여기 사람들은 나한테 잘못한 게 없는데 보상을 받기는 부담스럽고 죄책감이 좀 느껴져서 받고 싶지 않았다.

저쪽 세계에서 준다면 모를까 그런데 다른 차원이라서 못 받으니 관심도 없어.

저 끔찍한 세계랑 연관되는 것도 싫고.

고로 내가 원하는 건 당신들이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친구가 밖에서 기다리니까 빨리 나가줬으면 좋겠는데요.”

“음, 알겠습니다. 혹시 생각이 바뀌신다면 이쪽으로…”

나에게 내미는 명함을 챙겨만 두고 그들을 내보냈다.

음… 주먹까지 휘두르고 심지어 불친절하게 말로 그들의 심기를 사정없이 긁었는데도 그들의 표정은 시원하다 못해 후련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원하는 것을 이뤘다는 태도는 살짝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본인들이 좋다는데…

그런데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다는지 모르겠어.

단순 사과를 받아준 것만으로 만족한 건가?

같이 치우겠다고 허리를 숙이는 그들을 빨리 나가라고 내보냈다.

“감사합니다.”

존이 그렇게 말하며 문을 열었다.

욕한 것이…?

아니면 곰 아저씨를 때린 것…?

저쪽 존과 다르지만, 왠지 이쪽의 존이 더 무섭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겠지?

문을 열고 나간 그들은 문밖에 있는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며 나갔다.

누구지?

“예지야…”

냥지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폭력의 흔적을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보였다.

냥지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우리는 한동안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한테 실망한 게 아닐까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식탁은 미안해. 근데 지금 집에 들어오면 발 다치니까 거기서 좀 기다려줘.”

“괜찮아..?”

뭘 말하는 걸까?

평소라면 모른 척 하겠지만 더는 나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나한테 너무 가혹한 짓이라는 걸 깨닫고 말았으니까.

자신한테도 친구들한테도 좋지 못한 짓이었다.

“사실 괜찮지 않아.”

이제는 솔직해지고 싶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하고 싶은 건 다해보고 그렇게 살고 싶어.

“좀 슬퍼. 아니… 많이.”

“그래.”

“솔직히 나 좀 귀찮지?”

“귀여운데?”

“앞으로도 귀찮게 할 건데?”

“그래서 귀여운데?”

나랑 냥지는 서로 해맑게 웃었다.

오랜만… 아니 이렇게 크게 웃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청소기가 돌아다니며 파편들을 치우면서 나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왠지 델리의 말이 공감이 가는데?

이 녀석 건방져.

“얘 좀 건방지다?”

“잔소리할만하지. 어이구. 애들 오기 전에 빨리 치워.”

내가 부시고 싶어서 부신 건 아닌데… 내 잘못은 맞지만!

그런데 가만히 있으면 어차피 로봇 청소기가 다 치워주지 않아?

그렇게 툴툴거리니 냥지가 내 입을 잡아채 잡아당긴다.

“입이 댓 발로 튀어나왔네. 이것 봐.”

“으으…”

“식탁 반 토막 난 건 너무 커서 못 치우거든?”

입이 잡혀 말을 못 하니 고개만 끄덕거린다.

냥지가 한숨을 쉬며 입을 놔준다.

일단 반 토막 난 식탁은 내가 들고 내려와 밖의 쓰레기장에 버려놓고 다시 올라왔다.

파편들은 로봇 청소기가 다 처리했는지 어느새 부엌은 말끔해졌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말끔해졌다기보다는 휑하지만 뭐… 하나 주문하면 되겠지.

그런데 이 난리 통에 야뭉이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고양이는 소음을 좋아하지 않아서 내가 식탁을 박살 낼 때 겁을 먹지 않았을까 걱정이 돼서 방들을 뒤지며 찾아보니 냥지의 방에서 몸을 뒤집어 배를 보이며 잘 자고 있었다.

겁도 없네.

냥지도 내 옆에서 야뭉이를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점심 안 먹었지?”

“음… 그렇지?”

오늘 여러모로 격한 행동을 많이 해서 그런지 배가 좀 고프네.

그런데 식탁은 내가 박살 내버려서 먹을 곳도 없는데 오늘은 외식 하려고 그러나?

냥지는 베란다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부스럭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뭐야?

“내가 하꼬일 때는 거실에 이거 펴놓고 밥 먹었지.”

베란다 창고에서 꺼내온 건지 비닐로 포장되어 있는 작은 책상을 가져왔다.

비닐을 대충 풀어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작은 책상을 거실에 편다.

어찌나 작은지 우리가 서로 다리를 펴고 앉는다면 발이 서로의 몸에 닿을 지경.

오랜만에 양반다리로 앉아서 마주 보았다.

내가 생각 없이 냥지의 눈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냥지가 부끄러운지 시선을 피하며 내 얼굴을 한 손으로 밀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뭘 봐!”

“네 눈.”

내 무지성 답변에 냥지는 고개를 푹 숙이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그 자세로 잠깐 멈춰있었다.

진짜 왜 그래?

무시하고 배달 앱을 켜서 뭘 시킬지 골라본다.

“뭐 시켜?”

“그전에 애들한테 전화 좀 해보고.”

냥지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한 손으로는 휴대폰으로 통화를 나머지 한 손으로는 더운지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추운 시기인데 더운가?

예화랑 정란이는 저녁에 온다길래 우리 둘은 먼저 밥을 먹었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몸을 축 늘어뜨리며 기대었다.

TV에서는 B급 감성의 이름 모를 영화가 재생되고 있었고 우리는 그걸 보고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나니 냥지는 지루한지 꾸벅꾸벅 졸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냥지의 머리를 손으로 끌어당겨 내 어깨에 기대었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사람의 온기가 달갑게 느껴진다.

영화가 끝날 때쯤 나도 졸려서 눈을 감았다.

“얘들아. 우리 왔는데?”

“나를 버려두고 둘이서 이렇게 끌어안는다고?”

몇 시지..?

시간이 언제 이렇게 지났대?

슬며시 눈을 떠보니 정란이가 소파 위에 서서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정도 거리는 부담스러운데?

내 얼굴을 보던 정란이가 해맑게 웃으며 뒤돌아 예화에게 말했다.

“예지 일어났다!”

“그렇겠지. 이 정도로 시끄러운데 못 일어나는 애는 냥지랑 초향이 뿐일걸?”

사물을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거실은 어두컴컴했었다.

언제 온 걸까?

“언제 왔어?”

“방금! 우리는 밥 먹고 왔어!”

잠만 자러 왔다는 건가?

그럴 거면 자기 집에서 자도 될 텐데… 어지간히 우리 집에서 자는 게 익숙해진 모양이다.

하품하며 소파에 올라타 기지개를 켠다.

고양이처럼 엉덩이를 쭉 빼고 기지개를 켜니 정란이와 예화가 감탄한다.

“완전 고양이야.”

“저 자세가 저렇게 유연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에잇.”

갑자기 예화가 내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힘차게 때렸고 나는 깜짝 놀라 제자리에 껑충 뛰어올랐다.

“뭐? 왜! 누구야!”

“아니. 엉덩이가 너무 흠흠…”

범인은 역시 예화였다.

눈을 흘기며 보고 있으니 예화는 모른 척 휘파람을 불며 내 시선을 피했다.

꽤 오래 잔 것 같은데 다시 잠이 온다.

델리 말로는 생체리듬 때문에 이 시간에는 반드시 자야 한다나?

어차피 나노봇이 있지만, 굳이 생활 패턴을 엉망으로 만들 필요는 없겠지.

냥지를 들어 침대로 옮기려는 순간 오늘은 다 같이 자고 싶어져서 다시 소파에 눕혔다.

대충 이불을 다 가지고 나와 거실에 이불을 깔기 시작하니 예화랑 정란이가 눈치챘는지 베개를 가지고 나와 이불 위에 던져 놓고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우움.”

소파에 자는 냥지를 바닥에 깐 이불 위에 눕히고 거실로 가서 물을 마시고 돌아오니 정란이와 예화가 거리를 두고 누워 중앙을 비워 놓고 나를 보고 있었다.

어쩌라는 거야?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둘 다 빈 곳을 팡팡 치는 게 웃겨서 피식하며 거기에 드러누웠다.

예화는 옆의 냥지와 나를 번갈아 보며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한다.

“양손의 꽃. 이게 인생이지.”

“이렇게 자본 적은 처음인데 괜찮네!”

그러게.

꽤 괜찮네.

갑자기 사무치는 외로움에 둘을 꽉 끌어안으며 눈을 감고 오늘 일을 생각해봤다.

이런저런 말을 하기는 했지만 내 일상에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다.

그런 변화는 원하지도 않아.

그저 행복을 추구할 뿐이야.

“이렇게 같이 자니 좋다.”

그래.

행복하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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