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60화 (60/78)

〈 60화 〉 거대한 함선

* * *

자고 일어났더니 어제의 그 번호가 아닌 다른 번호가 나에게 전화했었다.

뭐지?

나를 안고 있는 냥지의 손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치워내며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서 덮어주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스팸?

스팸은 아닌 것 같고…

같은 번호가 이렇게 몇 시간이나 통화를 걸었는 거면 분명 나한테 볼 일이 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아니면 다른 사람과 나를 착각했다든지.

문자를 보내보고 답장 보면 알겠지.

[누구세요?]

이 정도면 되겠지?

이 정도로 전화를 시도한 거 보면 나한테 급한 볼일이 있다는 건데 그렇다면 이 문자를 보고 금방 반응하겠지.

누굴까?

갑자기 궁금해지네.

잘못 건 게 아니라 나를 알고 전화한 걸까?

이곳에 와서도 정란이와 관계가 유지된 걸 보면 어쩌면 내가 모르는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짐작 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네.

유일하게 연락하던 사람이 정란이 한 명 뿐이라…

이곳의 인연?

그렇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무슨 생각해…?”

“응? 아무것도.”

어느새 일어난 냥지가 가물가물 눈이 감기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휴대폰을 오랫동안 보고 있는 모습을 본 모양이다.

내 대답을 듣고 냥지는 다시 눈을 감고 잠들었다.

일단 확실해질 때까지는 애들한테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생각해봐.

이곳의 친구인 줄 알고 호들갑 떨면서 친구한테 이야기했다고 치자.

그런데 알고 보니 보이스 피싱이 나한테 속이려고 어설픈 한국어로 말하는 걸 친구들이 옆에서 듣는다?

내가 생각해도 안쓰럽다 못해 눈물이 날 정도로 불쌍한 사람으로 보인다.

어쩌면 보이스 피싱한 사람을 친구로 여길 정도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음… 일단 아침 먹고 출발해볼까.”

어제 정란이는 부모님 집으로 간다고 미리 올라가 버렸고 예화도 마찬가지인지 정란이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버렸다.

원래 나와 냥지가 살던 집이라 원래대로 돌아간 건데 왜 이렇게 허전한 건지 모르겠네.

있어야 할게 없는 이 공허함… 이제는 낯설게 느껴진다.

예전에는 익숙하다 못해 항상 함께했던 감정이었는데 지금은 이토록 낯설어.

“어쩔 수 없지…”

냥지는 아침을 그리 많이 먹지는 않는 편이니 가볍게 샐러드를 먹고 나가는 게 좋겠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 거실의 냉장고에 야채들을 꺼내 찬물에 씻어 그릇에 담는다.

소스를 아무렇게나 뿌려서 버무리면 끝.

사실 샐러드가 조리법이 뭐가 있겠어.

그냥 야채들 집어넣고 소스 뿌리면 그게 샐러드지.

이제 제일 큰 문제는 아직도 일어나지 않는 냥지를 깨우는 일이군.

평소에 일어나는 시간대에도 깨우기 힘든 애를 이렇게 이른 시간에 깨우는 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고된 일이다.

당분간 일어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담은 냥지의 눈꺼풀.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어.

“냥지? 유리? 일어나. 우리 이제 출발해야지. 지금 일어나야 안 늦어.”

어중간한 시간대에 출발하면 분명 고속도로는 차로 막힐 거고 그렇다면 우리는 한 치 앞도 나아가지 못하고 약속 시각에 늦겠지.

음… 이 모든 건 내 이론상의 결과다.

내가 만날 가족도 친척도 없었는데 어딜 갔다고 휴일의 고속도로를 경험했겠나.

예전부터 인터넷에서 휴일의 고속도로 짤을 보기만 했다.

이쪽 세상은 다르려나?

뭐… 사람 사는 세상 다 비슷하겠지.

언제 오든 상관 없다고 천천히 오라고 했지만, 이왕 가는 거 일찍 가는 편이 좋지 않겠어?

솔직히 고속도로에서 제발 길이 뚫리길 바라며 3~4시간 동안 기다리기는 좀 그렇지.

역시 일찍 출발하는 게 답이야.

결국 비슷하겠지만 조금 더 앞서갈 수 있겠지.

잠시 코를 막아봤지만 냥지는 입으로 잘만 숨 쉬며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다른 방법이 필요해 보이는군.

휴대폰 벨 소리 크게 울리기!

아이처럼 안아서 흔들기!

깨어나길 바라며 몸 굴리기!

이 모든 것이 소용이 없었다.

정말 대단한 강적이야.

그래도 내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냥지가 눈을 살짝 뜨며 내 얼굴을 보다가 다시 감았다.

내 노력이..!

“일어나! 방금 눈 뜬 거 봤거든!”

“그만…. 좀 더 잘 거야…”

“빨리 안가면 우린 고속도로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릴 거라고!”

“무슨 소리야… 다 똑같아…”

내가 살살 달래니 결국 깨어나서 거실을 정처 없이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아무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듯 보이는데…

손목을 잡고 의자에 앉혔다.

그래도 일단 식탁에 앉혀두니 느리지만, 꾸준히 샐러드를 집어 먹는다.

“샐러드 맛…”

“샐러드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 정신 차렸는지 눈을 비비며 식사를 끝냈다.

아직 사태 파악을 못했는지 느긋한 모습.

“우리 빨리 나가야 한다니까.”

“왜?”

“휴일이니까. 분명 길 다 막힐걸?”

아니면 KTX라도 타고 가려는 건가?

나 모르게 예약이라도 했었나?

“KTX 타고 가려고?”

“그런 걸 왜?”

왜 이렇게 여유로워?

이 정도면 부랴부랴 바쁘게 움직였던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다.

저렇게 여유로운 것을 보면 뭔가 좋은 방법이 있는가 보다.

난 모르겠지만…

역시 이쪽 세계에 온 지 1년도 안 돼서 그런가? 아직 내가 모르는 상식들이 너무 많아.

아무리 배워도 끝이 없단 말이지.

이제 냥지는 여유롭게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서 커피까지 마시고 있다.

“너도 마실래?”

“응…? 응.”

믿어보자.

생각 없이 저러는 건 아닐 거고.

이 커피 맛있네.

우리는 정말 느긋하고 여유롭게 집을 나섰다.

이쯤 되면 걱정되는 게 아니라 궁금해질 지경인데 어떤 방법이 있길래?

트렁크에 가져온 짐을 싣는다.

“세면도구.”

“챙겼어.”

“우리 이불.”

“자.”

“우리 여분 옷.”

“챙겼어.”

이불과 가방을 넣고 조수석에 탄다.

나도 운전면허를 따야 하나?

몇 시간이나 운전하기는 참 힘든 법인데 마냥 맡겨놓고 가만히 있기에는 좀 미안하지.

“안전벨트 했어? 이제 출발한다.”

“언니한테 톡 보낼게.”

[우리 이제 출발했어요.]

[초야 언니 : 이제 곧 도착하겠네.]

[초야 언니 : (토끼가 만세 하는 이모티콘)]

곧?

이제 출발한다니까?

20분 정도 지나서 도착한 곳은 신기한 곳이었다.

영화에서 볼 법한 거대한 함선은 유리관 같은 것들이 수십 개가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곳으로 차나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큰 통로에는 차들이 지나가고 있었고 작은 통로에는 사람들이 함선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무슨…

이 무슨 엄청난 발전…?

분명 도시나 사람들은 내가 살던 지구랑 다를 바 없었는데 갑자기 장르가 바뀐 기분이다.

함선의 꼬리 부분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청춘이라는 글자가 크게 박혀있었다.

“이게 가능해?”

“뭐가?”

“왜 이거만 장르가 달라?”

“무슨 소리야?”

그보다 이런 함선을 여객기 정도로 운영이 가능해?

분명 저 정도 크기의 함선을 움직이려면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소비되지 않나…?

아니면 어마어마한 부호들이 타고 다니는…?

“아니 도시랑 비교해보니 수준이 너무 다른 게 아닌가 싶어서.”

“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도시도 비슷할 건데…”

“이 정도 함선을 여객기 정도로 운영하면 적자 아니야?”

“아르나이트를 우리나라에서 개발했으니까…?”

통로를 통해 함선 안으로 들어가자 어마어마한 장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수많은 로봇이 바삐 움직이며 사람들에게 짐을 받거나 안내하고 있었고 차들은 마치 물건을 수납장에 보관하듯 거대한 상자 형태의 무언가에 넣어지고 벽 속으로 사라졌다.

거대한 로봇 팔이 화물 같은 것을 옮기고 있었고 작은 로봇들은 푸른 카메라 렌즈를 눈처럼 빛내며 친절하게 손님들을 응대하고 있었다.

어찌나 신사적인지 어떤 할아버지에게 칭찬을 받을 정도….

무…무엇..?

델리한테 설명을 들어보니 아르나이트는 델리 세계에서는 석탄 정도의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얼마나 발전한 거야.

“우리 이제 내리자.”

“응? 정해진 구역에 세워야 하는 거 아니야?”

“자율 주행하면 되지?”

아, 그러고 보니 수양이도 그런 택시를 타고 갔었지.

“그러면 왜 여태 네가 직접 운전한 거야?”

“재미있으니까?”

“사고 나면 어쩌려고?”

“?”

“아니야….”

내가 모르는 뭔가가 또 있겠지.

알면 알수록 신기한 세상이야.

내가 살던 지구랑 문명 수준이 비슷한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정말 신기해.

나도 모르게 들떴는지 냥지가 살짝 창피하다는 태도로 나의 손을 붙잡고 어딘가로 끌고 갔다.

너무 티 났나?

그런데 이런 신기한 걸 보고 어떻게 신이 안 날 수가 있겠어.

냥지가 데려간 곳에 작은 방이 있었는데 노란 의자 두 개가 놓여있었다.

앉아서 밖을 보니 아직 비행을 시작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밑의 건물들이 까마득하게 보였다.

“처음 타본 것처럼 굴지 마…”

“처음 탔어!”

내 말에 냥지가 시무룩해져서 나도 덩달아 시무룩하게 앉아있었다.

왠지 모르지만 내가 실수한 건가?

“미안.”

“응..? 아무것도 아닌 거로 왜 사과를 해.”

가끔 냥지는 정말 특이한 반응을 보일 때가 있었다.

역시 이런 특별함이 있어야 스트리머를 하는 거겠지?

우우웅

“뭐야? 언니한테 문자 왔어?”

“응? 아무것도 아냐. 요즘 스팸 전화가…”

“아직도 그런 게 많다니까. 언제 없어지는 거야.”

“그러게.”

그 모르는 번호겠지?

휴일이 끝나면 확인해야겠다.

내 생각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것 같은데 나랑 아는 사람이었으면 진작 연락을 했을 거고 진짜 피싱인가?

자꾸 번호를 바꾸는 것도 그렇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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