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63화 (63/78)

〈 63화 〉 말은 그 사람의 인격

* * *

“언니. 바이바이.”

“안돼! 가지 마! 내가 잘못했어…”

“수양이랑 약속했는데 안 갈 수도 없잖아.”

“흐헝헝…”

가련한 여주인공의 자세로 바닥에 쓰러져 우리를 보고 있는 언니를 무시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틀 동안 언니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네.

초야 언니는 가려는 우리를 온몸으로 막으며 나가는 것을 결사반대 하긴 했지만, 초야 언니의 장난은 언제나 그렇듯 이런 식이었다.

장난기가 많고 모난 구석이 없는 인싸 그 자체.

다른 사람과 두루 친해질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모난 구석이 없는 건 내가 아는 사람들은 죄다 그렇긴 하지만…

“얘들아~ 어서 와~ 기다렸어!”

손을 양손으로 짤짤 흔들면서 함박 웃음으로 우리를 반긴 수양이는 우리를 집 안으로 안내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가는 수양이의 검은 머리에 주홍빛이 약간 감돌고 있는데 염색이라도 했나?

일단 집 내부는 평범했다.

그냥 일반적인 여자 혼자 사는 집.

혼자 사는데 넓게 사는 냥지가 특이한 경우이긴 하지.

처음 봤던 냥지의 집은 혼자 사는데도 불구하고 침대도 두 개 다른 가구들도 마치 함께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처럼 배치되어 있었지.

친구들이 놀러 오면 자고 가라고 해뒀다나.

그것까지 생각해도 좀 과하긴 해.

우리를 부엌까지 안내한 수양이는 우리를 식탁 앞에 앉혔는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아직 따뜻해 보이는 음식들이 식탁 위에 놓여있었다.

“짜잔.”

“오! 수양이 쏘쏘해.”

“그건 도대체 무슨 말이야…?”

냥지의 이상한 평가에 수영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

“맛있어 보이네.”

“응? 에헤헤… 고마워~”

헤헤 웃으면서 얼굴이 발그레하다.

감기, 몸살인가?

손을 뻗어 수양이의 머리를 짚어보니 손으로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감기라도 걸렸어? 얼굴이 빨개.”

“그건 아니구…”

얼굴을 가까이하며 안색을 살피자 체온이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느껴졌고 수양이의 얼굴은 마치 사과처럼 벌겋게 익어버렸다.

얘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냐?

“야아~ 너무 가까워! 가깝다구! 거리 유지!”

내 얼굴을 양 손바닥으로 강하게 밀어내기에 순순히 밀려났다.

왜 이러는 걸까?

냥지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이쪽을 바라보다 한숨을 푹 쉰다.

이게 아싸…?

지금 나만 얘네들 행동을 이해 못하는 건가?

“밥이나 먹어! 그만 꼬시고!”

“그래! 식기 전에 빨리 먹자.”

냥지가 내 옆구리를 콕콕 쑤시며 내 손에 젓가락을 쥐어준다.

수양이도 맞장구치며 거드는데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거야.

마침 배가 고팠던 터라 젓가락을 받아 들고 당근과 파가 섞여 있는 계란말이를 하나 집어 먹어본다.

약간 짭조름하지만 잘 구워진 계란의 향이 입 안 가득 느껴진다.

감동을 할 정도로 대단한 맛은 아니지만, 집밥이라는 느낌이 난다.

우리 집은 자주 시켜 먹기는 했지.

영양 밸런스나 건강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 먹었으니까.

밥을 만들어 먹는다고 해도 거의 내가 만들었고 우리의 트리오는 요리에 재능이 없는 건지 레시피를 보고 만들어도 죽을 쑤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육개장은 진짜 잘 끓였는데?

“육개장 맛있다! 진짜 잘 끓였어.”

“수양이 요리는 처음 먹어봤는데 요리 은근 잘했구나.”

내 말에 우물쭈물 망설인다.

“대기업의 맛…”

아, 사 와서 끓인 거구나.

그렇다고 치더라도 육개장 말고도 다른 반찬도 꽤 맛있으니 요리 실력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여기 있는 반찬 전부 맛있네.”

“그…그래? 헤헤.”

우리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웃던 수양이는 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싱크대로 옮긴다.

냥지와 나도 도우려고 했지만, 손님은 얌전히 있으란다.

우리는 소파에 앉으며 기다렸고 뒤처리를 끝낸 수양이가 내 옆자리에 앉는다.

냥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보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는지 뚱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비비 꼬았다.

오늘 따라 왜 저러지?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었던가?

어쩌면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수양이도 난처해질지 모르니 냥지의 양 볼을 손으로 붙잡아 나와 눈을 마주치게 한다.

가끔 냥지가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 때가 있는데 대부분 이런 식으로 달래주면 소리를 빽빽 지르고 나아지더라.

최대한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달랜다.

“우리 유리.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걸까? 화 풀어. 응?”

잠시 이 상황을 파악하느라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던 냥지가 사태 파악이 끝난 모양이다.

얼굴이 점점 빨개지던 냥지는 화가 난 얼굴로 소리를 빽빽 지른다.

“야…야…! 너 그거 하지 말랬지이..!”

장난스럽게 씩 웃어주니 내 배에 묵직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우리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수양이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볼에 숨을 잔뜩 불어 넣어 부풀렸다.

너는 또 왜 그래…

나도 이제 여자라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여자들 특유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언제쯤이 돼야 익숙해질까?

머리를 슬쩍 긁으며 눈치를 보다가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물어본다.

“수양아. 너 염색했었어?”

“아니? 그건 왜에?”

“머리색이 주홍 빛이 감돌아서.”

“아! 몰라! 요즘 이런 색깔의 머리카락이 자라던데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 혹시 새치? 나 늙고 있나…?”

“야이씨. 우리보다 어리면서 무슨! 21살인데 그런 걱정은 왜 하냐고!”

“그런가? 언니도 얼마 차이 안 나면서.”

응흐흐흐 웃으며 대꾸하는 수양이.

“아, 그런데 나도 요즘 이상한 색깔의 머리카락이 자라고 있던데? 잠깐만.”

화장실에 잠깐 들어가고 나오며 한 가닥의 머리카락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청색…? 약간 어두운 청회색?

다른 머리카락을 한 가닥 더 내미는데 그건 또 하늘색이었다.

이건 또 무슨 경우야?

“요즘 피부도 엄청나게 좋아졌어. 기분 탓이 아닌 게 볼 좀 만져봐.”

“와. 어떻게 이렇게 매끈하지?”

“너도 예뻐진 거 같은데?”

“정말?”

델리야.

지금 얘네들 몸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no]

그럼 이거 왜 이래?

[인간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 본 AI는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음. 몸을 점차 단계 별로 개선. 그리고 그들의 캐릭터처럼 변경. 원하고 있던 부분이 아닌지?]

친구들의 몸이 바뀐다고?

잠시 고민을 해봤다.

그걸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얼굴과 몸이 바뀌는데 가족들이 놀라지 않을까?

나야 특수한 케이스지만 그들은 분명 다를 테니까.

“얘들아.”

“응?”

“왜 그래. 진지한 얼굴로.”

“얼굴이 너희들이 쓰고 있는 캐릭터처럼 변한다면 어떨 것 같아? 아무래도 좀 그렇지?”

원하지 않는다면 중지 시켜야지.

멈추는 건 간단하다.

그냥 델리에게 멈추라고 말하면 되니까.

“당연히 좋지! 그걸 말이라고!”

“야! 우린 바뀌어도 너보다 예뻐지지도 못해! 기만이야?”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당황해서 씩씩거리는 둘을 진정 시킨다.

음…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던 문제는 없을 것 같다.

[테일리의 안타까운 지적 능력. 인간들의 미에 대한 갈망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사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도 바뀐 것을 인지하지 못할 것.]

어떻게 인지하지 못한다는 거야?

가족들은 분명 눈치챌 텐데.

[파동. 테일리의 지적 능력으로는 설명하는 데 낭비하는 시간이 아까움.]

말 좀 심하네.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는지 다시 조용해진다.

하기야 얼굴 때문에 성형한다고 거금을 붇는 일도 허다했지.

이 문제는 어느 세계를 가도 비슷한 모양이다.

나도 몸이 바뀌고 이득을 많이 보긴 했지.

이 미친듯한 인기…

그러고 보니 정란이랑 예화도 그럼 바뀌고 있는 건가?

잠시 나노봇이 들어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냥지, 예화, 정란, 수양, 차향, 초홍, 임뿌 많기도 하다.

뭔가 빠진 기분인데… 아, 맞다.

제일 최근에 받은 은초향도 있었네.

나중에 각자 의견을 좀 물어봐야겠다.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나저나 내일이면 우리 집으로 돌아가는 건가?

우우웅

휴대폰이 진동으로 떨린다.

이제는 귀찮을 지경이니 스팸 문자 내용이나 한번 보고 차단해야겠다.

화장실로 들어와 문을 닫고 내용을 확인해본다.

[야. 너인 거 알고 보내는데 존나 씹네 ㅋㅋ 이제 좀 받지?]

[우리 예지 진짜 많이 컸다. 예전이었으면 진짜. 방송으로 좀 컸다고 눈에 뵈는 게 없나 봐? 네가 그거 하나 믿고 까부나 본데 망치기 전에 받는 게 좋을 거야.]

뭐야?

이 사람은 누구야?

누군데 아는 척이지?

문자 내용을 보니 나를 알긴 아는 눈치인데 짐작 가는 부분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 세계의 서예지의 지인인가?

친구라고 보기에는 문자 내용이 좀 아주 꺼림칙한데?

아니면 스스럼없는 사이라서 이러는 건가.

내가 그동안 연락을 하지 않아서 마음이 많이 상했다든지.

일단 나중에 연락을 해봐야겠다.

[미안. 누군지 모르겠는데 일단 나중에 연락해줄게.]

일단 차단해두고 나중에 연락해봐야겠다.

아무리 기분이 상했다고 해도 이렇게 기분 나쁘게 문자를 보내면 안 되지.

말이라는 건 그 사람의 인격을 보여준다.

장난이라도 이렇게 선을 넘어서 말하면 참아줄 이유가 없었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니 소파에 앉아있던 둘은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건다.

“뭐 했어? 물 내리는 소리도 안 나고?”

“응? 아, 거울 좀 봤어.”

“뭐야~ 나르시시즘? 하긴 나라도 저 얼굴이면 매일 거울 들여다봤겠다.”

“맞아. 진짜 질리지 않는 얼굴이야.”

수양이와 냥지가 차례대로 말하며 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아무리 내 성격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좀 부끄러운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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