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추억을 담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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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은 언제나처럼 느긋하고 온화했다.
이제는 자기 집인 줄 아는 예화와 정란이가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고 심지어 집주인인 냥지가 바닥에 뒹굴고 있을 때가 있었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얼마나 편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군.
냥지가 자기 집처럼 생각하라고 말했지만, 너무 편하게 지내는 게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배가 고파졌다.
앉아만 있어도 배가 고프다니 인간은 생각할 때마다 에너지를 쓴다던데 그 말이 맞나보다.
이렇게 한가하게 누워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 뇌는 열심히 일했으니 스스로 상을 줘도 되지 않을까?
오늘은 휴방한다든지.
이건 너무 양심 없는 생각이었나.
침 흘리며 자는 냥지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부엌에서 생크림 빵을 하나 꺼내 식탁에 앉아서 먹었다.
빵 마시쪙.
오랜만에 먹는 빵이라 그런지 맛있네.
간단하게 식사를 끝내며 거실로 돌아오자 정란이가 눈을 끔벅이며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깼어?”
“응.”
대화는 끝이 났다.
딱히 의미는 없지만 이런 일상도 나쁘지 않지.
자꾸 의미 없이 누워있는 모습을 자주 보여줘서 그렇지 우리도 사실 바쁜 사람이다.
바쁜 시간대가 다를 뿐이지.
한동안 가만히 누워있던 정란이는 천천히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끄으으.”
기지개를 켜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정란이가 나에게 말했다.
“밥 먹었어? 난 배고픈데.”
“난 빵 먹었지.”
“나도 빵이나 먹을까. 예지, 내가 뭐 먹을지 골라줘.”
“빵 먹어.”
“죽 먹을 건데.”
놀리듯 말하며 냉장고에서 어제 먹던 죽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집어넣는다.
가끔 주변 사람들한테 매를 부르는 말투라고 불리는데 실제로 너무 약 올리다가 냥지한테 꿀밤 한 대 맞은 전적이 있었다.
장난식이기는 하지만 정란이 입장에선 조금 아팠다고 찡찡거리니 말없이 머리를 토닥여주었지.
사실 싸운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싸우는 모습처럼 보일 때가 종종 있었다.
“맞다. 나 오늘 할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해. 오늘은 집에 좀 늦게 들어올걸? 기다리지 말고 먼저 밥 먹어.”
“무엇을 하길래.”
“이것저것? 편집자 재계약도 있고 밀린 일 한 번에 처리해야지.”
“음. 알았어.”
“아, 맞다. 나도 내일 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늦을 수도 있어.”
그런데 내 말을 듣던 정란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귀 기울인다.
갑자기 왜 그러지.
내가 말 실수한 게 있었나 생각해봤지만 짚이는 점이 없었다.
“왜?”
갑자기 이유를 물으니 잠시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이러면 수상하게 보인다는 생각은 했지만, 생각을 정리하지 않고 무턱대고 말하면 더 의심받을 거로 생각해서다.
이유는 딱히 생각 해놓은 게 없어서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답해야 할 내가 입을 다물어서 그런지 우리는 서로의 눈만 바라봤다.
어색한 행동으로 생겨난 침묵은 마치 나에게 대답을 강요하는 듯 느껴졌다.
정란이가 그런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는 소리다.
“음, 나도 그… 유튜보 편집자랑 간만에 만나서 이야기도 좀 하고 밥도 좀 같이 먹고… 컨텐츠 이야기…?”
간신히 머리를 쥐어짜서 나온 변명은 고작해야 아까 정란이가 말했던 대답을 똑같이 따라 하기였다.
그렇다고 나를 협박하던 놈들을 주먹으로 좀 두들겨주려고 한다는 말을 어떻게 하겠어.
정란이는 내 눈을 빤히 바라보다 씩 웃으며 넘어갔다.
요즘 정란이 분위기가 이상하다.
눈치 없는 나도 확실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이상해.
옷 갈아입고 오겠다며 자신의 방에 들어간 정란이는 간단한 외출복을 입고 방에서 나왔다.
“어때?”
“괜찮네.”
“음음. 나 정도면 예쁘긴 하지. 요즘 엄청 예뻐졌어!”
“그렇긴 하지.”
이제 정란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미인이었다.
이제 길 가다 길거리 캐스팅을 당할 정도로 바뀌었는데 화사한 미인보단 정말 귀여운 쪽으로 몸이 바뀌었다.
연예인 지망생들이 많아 이제는 길거리 캐스팅이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정란이는 확실하게 자기 회사로 끌어들이고 싶겠지.
지망생들이 너무 많아 레드오션인 상황이지만 정란이 정도의 외모면 누구라도 탐낼 거라 확신한다.
음… 이건 몸이 바뀌고 있는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인가?
신발을 신고 문을 열고 나가려던 정란이가 문고리를 잡은 자세 그대로 멈추었다.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응?”
이쯤 돼서야 살짝 눈치챈 거지만 혹시 얘가 지금 내 상황을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최근에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했던 이유가 이해되니까.
그러면 좀 곤란한데.
친구들한테 마음 쓰이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들킨 이상 어쩔 수 없나?
“음… 무슨 말?”
“아냐. 자, 저는 이제 나갔다 오겠습니다! 빠잉!”
뭔가 알고 있는 느낌이라 얼른 붙잡았다.
이거 괜히 숨겼다가 서운하게 느낄 수도 있고… 난 정란이한테 그랬던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숨긴다고 느낀다면 기분이 말이 아닐 것이다.
“나중에…말해줄게.”
내일 일 끝내고 말해줘야겠다.
내 말에 정란이는 씩 웃으며 의미 모를 말을 한다.
“그렇게 말하니 기분 좋다. 내심 서운했는데… 그럼 나도 너한테 미안할 짓 딱 한 번만 해도 돼?”
“응? 어.”
역시 알고 있는 분위기다.
불러세우길 잘했네.
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이런 건 쥐약인데…
그런데 미안할 짓?
무엇을 하려길래?
정란이는 그 말을 듣자마자 내 방으로 우다다 달려가더니 다시 나와 곧바로 현관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뭔데? 내 방은 왜?”
“내일 알려줄게!”
소란스러움을 느낀 냥지와 예화가 부스스 일어나 눈을 비볐다.
“무슨 일이야…”
“지금 몇 시지…”
“음, 이제 일어날 시간.”
내가 팡팡 두드려 일으키자 둘은 찡찡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종종 애 키우는 느낌이 들곤 하는데 기분 탓이라 믿는다.
방송할 시간이 됐는지 냥지는 나와 마찬가지로 대충 빵 하나를 집어 방에 가져갔고 예화는 내 옆에 딱 붙어 앉아 넋 놓고 있었다.
“따뜻하다…”
“난방 틀어놔서 안 추울 텐데?”
“그래도 따뜻한 게 좋은 거야.”
그건 그렇지.
“눈 온다.”
그 말에 창밖을 보니 하얀 눈송이가 조금 내리고 있었다.
우리가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조금 뒤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내 눈에는 눈 결정체인 눈꽃이 예쁘게 내리는 것이 보였지만 심정은 살짝 복잡해졌다.
겨울의 눈은 내게 그리 좋은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 아니니까.
추운 겨울에 눈송이는 나를 거의 죽음으로 몰아갔었고 눈에 묻혀 체온이 점점 빼앗겨 싸늘하게 식어가는 내 몸을 붙잡고 덜덜 떨던 기억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지.
체온을 너무 빼앗겨 사경을 헤매던 그때 쓰러진 곳이 보육원이 아니었다면 거기서 눈을 감았을 거다.
뭐, 그래도 예쁘긴 하네.
눈에 대한 나쁜 추억만이 있었지만 지금 이렇게 예화랑 보고 있으니 살짝 희석되는 기분이다.
“냥지야! 눈 온다고!”
“눈? 진짜네.”
여러 의미로 복잡한 시선으로 눈을 보고 있자 예화가 소란을 피우며 냥지를 방에서 데리고 나왔다.
근데 얘들은 왜 이렇게 들떴대?
마치 눈을 처음 본 어린애처럼 들뜬 친구들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밖에 나가서 놀자!”
“눈사람!”
애가 맞을지도…?
나한테 같이 나가자며 보채는 애들에게 손을 휘저었다.
“난 좀…”
“지금 아니면 우리가 언제 눈 올 때 놀아보겠어! 이것도 추억이야.”
“내 생각엔 앞으로 꽤 많이 그럴 것 같지만 이번엔 예화 말에 동의.”
추억….
추억이라…
추억이란 말을 듣자 나가고 싶어졌다.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내 머릿속의 추는 나가는 쪽에 확실히 기울었겠지.
“좋아. 나쁘지 않지.”
“근데 정란이는 어디 갔어?”
“무슨 볼일이 있다고 나가던데.”
“아쉽지만 내일 놀면 되겠지.”
내일도 예정된 거야…?
눈을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
동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동심 그 자체네.
나와서 눈밭을 바라보니 조금 거리낌이 생겼다.
스캐빈저 콜에서는 괜찮았는데 테일 리가 돼서 그런지 좀 그렇네.
아니, 근데 심문실은 안되고 왜 눈은 됐던 거야?
지금은 또 왜 그런대?
잠깐 생각에 빠졌는데 머리에 차갑고 축축한 무언가가 충돌했다고 느껴졌다.
그 충격에 살짝 머리가 흔들렸다.
“호오…”
“생각할 시간에 내 눈이나 피하시지!”
아이러니하게도 방금의 눈덩이 덕분에 잡생각이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두 번째 눈덩이가 내 뒤통수에 부딪혔을 때는 순수한 분노를 느낀다.
“이것들이!”
밝았던 주변에 서서히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정신없이 눈싸움하다 셋이서 거대한 눈사람을 만들었는데 별거 아니지만, 괜히 뿌듯함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오늘 일은 다른 누군가는 시시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나에게는 특별하게 느껴졌다.
친구랑 이렇게 눈으로 놀아본 적은 없었는데 좀 신기하게 느껴져.
나에게 눈은 매일같이 길거리의 사람들을 하얗게 뒤덮어 조용히 그 생명을 앗아가는 무서운 무언가였다.
항상 차갑게 느껴졌고 무서워해야만 하는 끔찍한 무언가였지만 오늘은…. 인정한다.
즐거웠다.
앞뒤 생각 안 하고 어린애처럼 놀았지만 이건 내 어린 시절의 보상이라고 생각하자.
애처럼 굴면 어때.
내가 아이였을 때는 어른처럼 굴었어야 했는데 지금 애처럼 굴어도 누가 뭐라 하겠는가.
이런 당연한 일상도 누리지 못했었으니 지금 펑펑 놀아야지.
“재밌네.”
내일 빨리 그것들을 치우고 정란이까지 넷이서 놀아보자.
“김치.”
유치하지만 우린 눈사람에 옹기종기 모여 사진을 찍었다.
이건 내 제안이었는데 친구들이 사이좋게 찍은 사진을 보니 나도 다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해왔기 때문이었다.
생각만 했었는데 지금 이렇게 찍게 되는구나.
그렇게 찍힌 사진에는 나도 놀랄 만큼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사진을 보는 친구들에게 부끄러워질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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