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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71화 (71/78)

〈 71화 〉 불쾌한 기억

* * *

폐공장의 문고리에 뽀얀 먼지가 켜켜이 쌓여있었다.

집게손가락으로 문고리를 휙 쓸어보니 회색빛 잿가루가 섞여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화재가 있었던 걸까?

건물은 멀쩡해 보이는데.

고개를 들어 올려 폐공장을 자세히 관찰해본다.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거친 공장은 이곳에 오고 나서 처음 보는 흉하고 내가 살던 지구의 건물 같은 모습이었다.

건물은 낡고 녹이 흘러내리며 사람의 발길이 끊겨 적막이 느껴진다.

주변의 화려한 건물들과 비교하면 아예 다른 세상 같은 분위기.

어쩌면 나와 비슷한 처지라고 볼 수 있겠군.

과거의 나처럼 아무도 찾지 않고 낡고 으스러져 철거만 기다리는 신세.

흣… 건물에 동질감을 느끼다니 다시 생각하니 웃기네.

지금은 하루하루 행복하기도 바쁜 삶인데 자꾸 청승 떨게 만든단 말이지.

살아온 과거는 그런 것이다.

행복은 쉽게 잊으면서 불행의 흔적만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잊는 게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생각하게 되는…

과거의 흔적이 가슴에 톱날처럼 박혀 끊임없이 내 상처를 벌려놓았지만, 친구들이 삶에 끼어들어 그 톱날을 뽑아주었지.

이제는 가족 같은 존재다.

그 흔적이 흉터로 남아 가끔 이런 청승을 떨게 하거나 우울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이것도 곧 좋아지지 않을까 희망적인 생각을 품고 있다.

행복은 그리 멀지 않았다.

잡생각이 많아졌네.

내 나쁜 버릇 중 하나였지.

과거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산송장처럼 바닥에 누워서 할게 없… 아니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자주 이랬었다.

손가락에 묻은 먼지를 후 붙어 날린다.

그런데 이런 건물은 보통 잠가 놓을 텐데?

문고리를 잡고 돌려보니 역시 잠겨있었다.

그럼 그것들은 아직 안 온 건가?

빨리 좀 오지.

하여간 양아치란 족속들은 제대로 하는 게 뭐 하나 없어.

어제처럼 펑펑 내리는 수준은 아니지만 조금씩 내리는 눈을 보다가 벤치에 앉았다.

오늘 너무 일찍 오긴 했나?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입김이 하얗게 뿜어져 나온다.

장갑 끼고 올 걸 그랬나.

손이 시려 왼손에 입김을 호호 불었다.

얼른 와줬으면 좋겠는데 빨리 처리하고 친구들이랑 같이 밥 먹고 놀려는 장대한 계획을 세웠단 말이야.

기다리기 심심해서 주변을 관찰했다.

주변에는 널브러진 폐자재들이 보이는데 아무리 봐도 무기로 쓸 수 있어 보인다.

승률이 아무리 100%에 가깝다고 하지만 미리 좀 치워둬야겠어.

법이 무거운 이곳에서 설마 무기까지 휘두를까 싶었지만,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지.

공장 내부에는 뭐가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외부에 있는 건 치워두는 게 맞겠지.

왼손을 코트 주머니에 찔러넣어 살랑살랑 걸어간다.

쇠파이프, 각목 그리고 이건 톱….. 시발, 난 톱이 싫어.

스멀스멀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라 발로 뻥 차서 전부 부셔놓았다.

부수면서 힘을 써서 그런지 몸이 서서히 따뜻해지고 땀이 살짝 흐른다.

이 날씨에 땀 흘리면 감기는 무조건 걸릴 텐데.

그건 나노봇이 알아서 해주겠지.

이 정도로 부숴놓았으니 무기로 못 쓰겠지?

뿌듯하게 느껴져 코트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그러나 뿌듯함도 잠시 조금씩 내리던 눈이 펑펑 내리는 수준으로 눈발이 휘날리며 날씨는 더 추워지고 내 손발은 덜덜 떨려왔다.

설마 아직 안 오는 건 그 녀석들의 계획…?

그냥 집에 갈지 말지 고민하던 찰나에 입구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도착한 건가?

굳게 닫혀있는 철문에 감겨있는 사슬이 끌러지는 소리가 나며 곧 바닥에 큰 충돌음이 들려온다.

분명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서 나도 담벼락을 넘어서 들어왔는데 어떻게 열었대?

듣기 싫은 마찰음이 들려오며 문은 점차 움직였고 이내 문이 열렸다.

여자들이 무리 지어 서 있었는데 그들 구성원은 하나같이 정상적인 복장이었다.

음… 쉽게 말하자면 적어도 양아치들의 복장은 아니었다.

그저 지나가는 길에 보이는 일반인 같은 복장?

인상도 다들 얌전하게 생겼는데 얼핏 보면 사람을 협박하며 돈이나 뜯게 생기지는 않아서 나름 충격이었다.

멀쩡하게 생긴 년들이 왜 그러고 다니냐.

그 무리가 안으로 들어오며 벽에서 튀어나오는 남자들이 몇 보였다.

뭐라도 익혔는지 덩치가 좀 있고 어깨가 떡 벌어진 놈들인데 왜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방송에서 격투기를 좀 한다는 사실을 알고 데려온 거겠지?

그런데 내가 프로도 이겼다는 사실을 알고 데려온 거 맞아?

그렇다고 하기에는 남자 셋 정도로 나를 막을 수 없을 텐데.

어지간히 얕보인 모양이다.

그놈들은 마치 사냥감을 구석으로 몰고 가듯 천천히 나를 에워싸며 포위했다.

빠르게 남자들의 복장을 훑어봤다.

무기는… 없어 보이지만 나이프 정도는 있을 가능성이 높고.

있다면 내 오른쪽에 서 있는 파란 잠바 녀석인가?

파란 잠바를 입은 남자의 바지 주머니가 불룩한 게 의심스러웠다.

파란 잠바, 빨간 모자, 금 목걸이.

대충 이렇게 기억하면 되겠네.

그런데 생각보다 막장인 놈들이네.

내가 알던 것과 다르게 여기 법이 약한 건가?

여자 중에서 화려하게 차려 입은 여자 한 명이 나에게 다가온다.

머리를 금발로 물들이고 하얀 블라우스에 까만 치마를 단정하게 입은 여자는 미인이라고 불릴만한 인물이었다.

다만 눈매가 사나워서 성깔이 있을 것 같은… 이건 나를 욕하는 말이지.

내 눈매도 워낙 날카로워서…흠흠.

그런데 왜 저년 얼굴을 보니 이상한 감정들이 떠오를까.

공포, 원망, 분노, 슬픔 수많은 감정이 뒤섞이며 나를 자극한다.

예전에 테일리의 기억과 감정에 집어 삼켜진 때와는 달리 서서히 옷을 적셔오는 파도처럼 나는 그 감정 속에 서서히 잠긴다.

서예지의 기억이 나에게 넘어왔지만 그건 온전한 기억이 아니었다.

괴롭힌 애들의 얼굴이 시커멓게 떠올랐으니까.

그래서 문자를 보고도 누가 보내는지 몰랐다.

그런데 이제 그 시커먼 얼굴들이 서서히 밝아지며 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예지야. 너무 오랜만이다~”

“….”

“왜 그렇게 울상이야? 넌 나랑 만난 게 반갑지 않은가 봐? 난 이렇게 반가운데…”

울상?

지금 내 표정이 어떤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 내 볼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리는 눈물이 내가 어떤 표정인지 대충 짐작하게 해주었다.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어머. 우리 예지 겉모습은 많이 바뀌었는데 성격은 변한 게 하나도 없네! 하긴 네 방송 챙겨보는데 예전처럼 찌질하게 굴긴 하더라. 정말 변한 게 없어~”

주변의 사람들이 내 주위에서 깔깔 웃음을 터트린다.

예전의 기억에 그 년들처럼 똑같이.

일단 감정을 좀 정리할 겸 잠자코 들어본다.

“왜 그렇게 떨고 있어? 우리가 괴롭히는 줄 알겠네. 아니면… 예전처럼 내 개가 되고 싶어서 기뻐하는 거야?”

금발 머리 여자는 가방에서 빨간 가죽으로 만들어진 목줄을 꺼내 나에게 보여주었다.

좀 오래됐는지 닳았지만, 거기에는 내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개처럼 짖으란 말이야!’

‘끄윽… 멍!’

기억이 난다.

“나도 내가 키우던 개를 갑자기 잃어서 얼마나 슬펐는지 몰라. 난 그저 개를 키웠을 뿐인데 우리 아버지한테 들키고 얼마나 혼났는지. 그렇지만 이제 난 성인이고 독립했으니 개 한 마리 정도는 여유롭게 키워도 되겠지?”

“운동 좀 배웠나 봐? 그런 거에 문외한인 나도 네가 싸움 잘하는 건 알겠더라. 근데 우리 강아지 눈이랑 팔은 어디다 팔아먹고 왔을까?”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듯 눈과 입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울상을 지었지만, 당연히 걱정돼서 말하는 게 아닌 건 누가 봐도 뻔했다.

이렇게 계속 저 여자의 말을 듣고 있으니 점점….

너무 많은 기억이 밀고 들어와 살짝 두통이…

“네 이름이… 정아라…였나?”

‘아라야. 정말 나한테 주는 선물이야?’

‘당연하지. 우린 친구잖아? 생일 축하해.’

‘도대체 그 애들은 널 왜 그렇게 못살게 구는지 몰라!’

‘모처럼 널 생각해서 구해온 단백질 풍부한….’

‘너 같은 애를 왜 괴롭히는 걸까?’

기억 속의 아라의 미소는 어딘가 비틀려있었다.

저 밑바닥에서 끓어오는 증오와 경멸.

인간의 악의를 똘똘 뭉쳐 태어난 사람처럼 느껴지는 태도.

“설마 내 이름 까먹었어? 시발년아? 하.”

기가 막힌다는 듯 머리를 쓸어올리며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왜 그러는 걸까.

정작 화내야 하는 사람은 나인데.

“근데 아라야. 남자들 더 데리고 와야 할 건데.”

“하. 남자 밝히는 꼴 좀 봐. 왜 셋으로는 부족하니?”

“부족하긴 하지.”

부족하긴 하지.

이런 놈들 한 트럭을 가져와도 내 몸도 못 건드릴 텐데.

내 말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웃음을 터트린다.

“우리 강아지. 농담이 많이 늘었네. 눈깔 파먹더니 꽤 용감해졌어.”

“이 년은 여전히 주제 파악 못 하네. 아라야, 굳이 시간 끌 필요 있어?”

오만하게 나를 바라보던 아라는 옆의 여자가 하는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싱긋 웃으며 말한다.

“내 앞에 무릎 꿇려놔.”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건데. 프라랑 경기 하는 건 못 봤어?”

“이제 겁이 좀 나니? 근데 어쩌나? 이제 늦어버렸는데. 방금처럼 좀 더 울어봐. 그럼 봐줄지도 모르잖아?”

손짓을 보고 내 주위에 서 있던 남자 셋이 슬금슬금 거리를 좁힌다.

파란 잠바는 철저하게 내 시야가 닿지 않는 왼쪽으로 갔다.

“와. 그때보다 더 예뻐졌네.”

“아라야. 나 먼저 하면 안 되냐?”

“너희 같은 새끼한테 줄 생각 없으니 개소리 말고 데려오기나 해.”

생각보다 싱겁겠어.

정면에서 달려드는 금 목걸이가 내 배를 노리고 주먹을 뻗어온다.

느릿느릿하고 굼벵이 같은 속도.

프라처럼 빨랐다면 긴장 좀 했을 텐데 이 정도 속도로는 기다리다가 졸겠네.

뒤에서 소리가 들리는 걸 봐서는 동시에 덮쳐오는 모양이다.

여자라고 봐주는 건 없는 건가?

금 목걸이의 허벅지를 강하게 걷어찬다.

격투기를 쓸 필요도 없이 이 정도면 병원에서 고생 꽤 해야 할 거다.

허벅지는 파도 치는 물결처럼 살이 울렁거리며 퍼져나갔고 그 남자의 허벅지는 점점 벌겋게 부풀어 올라 터질 것처럼 탱탱해졌다.

하나 끝.

왼쪽과 뒤를 고개를 돌려 빠르게 확인하니 아직도 그들은 제대로 된 공격을 시도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뒤쪽에 있는 빨간 모자의 명치를 주먹으로 강하게 후려치고 다리로 바닥을 쓸 듯 휘둘러 발목을 걸어 넘어뜨렸다.

잠깐의 위기도 느끼지 못했다.

파란 잠바는 놀라 거리를 벌리며 주머니에 칼을 꺼내… 어디서 본 디자인인데?

그때 그 칼날이 발사되던 나이프였나?

아니, 구하기 힘든 불법 무기라면서 왜 이렇게 흔한 것 같지?

죽일 생각은 없는지 다리를 겨냥하며 날아오는 칼날을 가볍게 피하며 그 파란 잠바를 입은 남자의 거기를 걷어찼다.

“넌 괘씸죄.”

“끄으으으으… 극…그륵….그에…..”

아, 그냥 다른 곳 때릴걸.

물컹한 무언가를 찬 느낌이 좀 뭐 했다.

쓰러진 남자는 너무 고통스러워 하지만 이제는 기억나지도 않는 고통이라 공감해주기 힘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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