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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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네. 내 기억 속에서 너희 남자들은 없는데 말이지. 그때보다 예뻐졌다는 소리는 무슨 말일까? 설명해줄 사람.”
정적으로 얼어붙은 공간에서 나만이 움직이고 있었다.
서예지의 기억을 모두 얻은 지금의 내 기억에서는 알몸 사진 한 장 말고는 그 이상의 성적인 터치는 없었는데 말이지.
괴롭힘도 아라 저년이 대부분이었고.
누누이 말했지만, 이곳의 법은 범죄에 고의성이 짙은 범죄자는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오죽하면 재판 전에 자살하는 사람이 나올까.
그래서 초기에는 놀리거나 무시하는 정도의 괴롭힘이었다.
그러나 아라가 끼어들고 나서 괴롭힘은 선을 급격히 넘어버렸기 때문에 나를 괴롭히던 애들도 방관하거나 아라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는 정도로 바뀌었다.
그 약간의 도움도 내가 저항하지 못하게 팔다리를 잡았던지라 빼도 박도 못 하는 공범이지만 저 여자들의 생각은 조금 다른가 보다.
언제든지 아라에게 모든 걸 떠넘기면 끝나는 줄 알고 있겠지.
멍청하게.
거추장스러운 코트를 벗어 던진다.
“뭘 입 꾹 다물고 누워있어? 물어보잖아?”
파란 잠바랑 금목걸이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한 건 맞는데… 빨간 모자 넌 아니잖아?
피부를 까맣게 태닝한 빨간 모자의 명치를 발로 밟았다.
금목걸이는 허벅지가 부러지고 파란 잠바는 그곳이… 음, 하여튼 부상이 심하니까 넘어가더라도 빨간 모자는 명치 한 대 맞고 넘어진 게 전부다.
기절했을 리가 없지.
“악..! 잠깐! 잠깐!”
“명치 한 대 맞고 자빠진 놈이 기절한 척은…”
놈은 두 손으로 내 발을 붙잡고 치우려고 힘을 주지만 어림도 없다.
여자들을 보니 얼어붙은 채로 꼼짝 하지 않았다.
아라도 마찬가지고.
“파란 잠바처럼 거기를 잃고 싶지 않다면 빨리빨리 말하자.”
한쪽 발을 거기로 옮기는 시늉을 하자 누워있던 남자는 기겁하며 말했다.
“없었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 없었다고! 애초에 시발! 넌 내 얼굴도 모르잖아!”
“근데 넌 알잖아.”
“아라 저년이 예전에 네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어. 오늘…”
“오늘? 누구 맘대로 말을 끊으래.”
다시 밟으려고 하자 놈은 재차 말을 이어갔다.
“오늘 널 데리고 좋은 구경 시켜준다고 아라가 불렀어! 그것 뿐이야!”
“흐응… 그렇구나.”
내가 이곳의 서예지였다면 오늘 덮쳐졌을지도 모르겠네.
이런 놈들한테 그동안 순결을 유지한 서예지가 신기했다.
아니면 이곳의 법이 지켜줬다고 해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역겹군.
“그래. 이제 제발 그 발 좀 치워!”
“그래.”
힘차게 걷어찬다.
거품을 물고 눈에 흰자를 보이며 그 남자는 기절했다.
이제 거슬리는 놈들은 다 치웠고 저 여자들을 처리해볼까?
“얘들아. 아까 신나 보이더라? 지금은 왜 웃질 못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아라한테 성큼성큼 다가갔다.
아까의 당당함은 어디 가고 지금은 겁에 잔뜩 질려 오들오들 떨고 있는 토끼 같은 모습이었다.
뭘 믿고 그렇게 당당하나 했더니 정말 저 세 명을 믿고 까분 거였어?
고작 이정도 밖에 안되는 애들한테 그렇게 오랫동안 괴롭힘당하다니.
예지야, 용기를 내보지 그랬어.
“내가 격투기 선수도 이겼었는데 그건 몰랐나 봐? 방송 보고 있었다길래 긴장 좀 했더니.”
“고작 팔 하나 없는 병신한테 지라고 너희를 데려온 줄 알아? 일어나! 일어나라고!”
분에 못 이겨 악을 쓰지만, 저 남자들이 일어날 수 있을 리가 없다.
일어난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로봇이지.
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애써 무시하며 하던 일을 마저 진행한다.
도망치려는 여자들은 한 대씩 때려주고 도망가지 못하게 막았다.
눈물을 주룩 흘리며 시킨 대로 했을 뿐이고 미안하다고 나에게 하소연하지만 정말 내게 미안해서 사과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이 위기에 처하니 이제 와서 미안하다는 거지.
“넌…. 넌 바닥을 기어야 하는데…”
“이제 네가 기어 다니겠네.”
“너 따위는 바닥을 기어야 하는데…! 난 너보다… 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더는 궁금하지 않았다.
이런 곳에 더 있고 싶지도 않았고 그저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다.
“길게 끌기는 싫고… 사진.”
내가 이곳에 온 목적.
하얗게 질리던 얼굴이 점점 혈색을 되찾더니 자신만만하게 씩 웃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이는 얼굴이네.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아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럼 그렇지. 너도 여자인 이상 이런 사진이 인터넷에 도는 게 부담스럽긴 하지?”
“그러니까 온 거겠지.”
“그럼 내 말을 잘 들어야 하지 않겠어?”
“아, 뿌리던가. 그렇게 하면 내가 장담컨대 여기서 멀쩡히 두 다리로 걸어서 나가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야.”
그냥 무시하기에는 신경 쓰이고 그렇다고 신경 쓰자니 짜증 난다.
내게 성아라는 모기 같은 존재다.
자고 있는데 가렵고 시끄러워 깨어났더니 귓가에 들려오는 에에엥 소리.
귀찮음을 무릅쓰고 불을 켰지만 그사이에 어딘가에 숨어버린 모기 같은 존재.
그렇다고 다시 누워 자려니 다시 특유의 에에엥 소리를 내며 다시 귓가를 맴도는 그런 존재다.
귀찮아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이제는 너무 거슬려.
“정말 그럴 수 있겠어? 진짜 뿌린다?”
손에 들고 있는 휴대폰을 보란 듯이 살랑인다.
어렴풋이 보이는 나체 사진.
“그런데 이 남자들이 봤다는 건 뿌렸다는 거 아냐?”
“어머~ 우리 예지. 신경 안 쓰는 척했는데 결국 신경 쓰이긴 했구나. 내 휴대폰으로 보여준 거니까 걱정하지 마.”
“범죄자가 되고 싶으면 뿌려.”
“괜찮겠어? 방송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던데. 이제 허세는 그만 부리자. 응?”
“올려보라고.”
무엇이 이 여자를 이토록 악독하게 만든 걸까?
천성? 교육 문제? 가족의 무관심?
열등감.
열등감인 것 같다.
성적, 재능, 외모.
아마 확실할 거다.
시험 성적표를 봤을 때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
서예지의 얼굴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질투.
무엇을 하든 빠르게 익히는 압도적인 재능.
처음부터 악의를 가지고 접근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 악의로 나한테 피해를 줬다는 게 중요하지.
“말 안 해도 올릴 거야. 난 네 인생이 철저하게 망가졌으면 좋겠거든. 내 아래에서 멍멍 짖는 그 모습이 다시 보고 싶어.”
그 말을 끝으로 버튼을 눌렀다.
이제 돌이킬 수 없겠지.
그리고 저 여자도….
“지금이라도 빨리 무릎을 꿇는 게 좋을 거야. 방금은 사람이 적은 커뮤니티지만 다른 곳도 곧 예약 글 설정으로 올라갈 예정이거든. 지금 빨리 글을 삭제하면 아무도 모를지 누가 알아?”
참지 못하고 그 여자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귀싸대기지만 꽤 아플 거다.
“일어나. 우리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 난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있거든.”
“흐…흐으…”
여기서 끝내지 않고 쓰러진 그 여자의 머리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
삐이
쓰러진 그 여자의 휴대폰 화면은 빨갛게 물들면서 이상한 사이렌 소리를 낸다.
삐이이이이이
뭐지?
당황한 건 그 여자도 마찬가지인지 당황한 얼굴로 휴대폰을 꾹꾹 누르지만, 변함없이 빨간 화면을 보여주며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진다.
주변은 순식간에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했고 우리는 한동안 눈밭에서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서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갑자기 철문이 열리며 경찰들이 들이닥친다.
근처에 지나가던 시민이 싸우는 소리를 듣고 신고한 걸까?
이렇게 인적 드문 공장을 지나가고 있던 건 둘째 치고 갑자기 이 타이밍에?
잠시만… 이거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내가 가해자 아닌가?
물론 내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는 있지만… 묘하게 상황이 복잡해지는 기분이다.
그렇게 들이닥친 경찰들은 주변을 에워싸며 나 빼고는 모두 체포했다.
미란다 원칙을 읊는 소리와 저항하며 소리 지르는 여자들 그리고 도망치는 누군가 주변은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였다.
절뚝거리며 경찰에게 주먹을 휘두르던 금목걸이는 선두로 뛰어오던 단발머리의 여경에게 두들겨 맞고 제압당한다.
이게 무슨…?
“당신을 현 시각…”
“괜찮으십니까?”
“어… 괜찮기는 한데 이게 무슨…”
딱 봐도 인상이 좋아 보이는 아저씨가 나에게 바닥에 떨어진 코트를 어깨에 걸쳐주며 푸근하게 웃는다.
저쪽 사람들에 비해 어마어마한 온도 차.
“늦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친구분의 신고로 겨우 찾았습니다. 어제 저녁에 신고를 하셨더라고요.”
“친구요? 누가…?”
“일단 서로 가시죠. 말씀해주셔야 할 부분도 있고 날도 추워서 여기서 말하긴 좀 그렇죠?”
“아…예.”
영문 모를 일이 한꺼번에 벌어져 도저히 상황을 짐작할 수 없었다.
전송을 누르자 화면이 빨개지며 사이렌 소리를 내던 휴대폰.
갑자기 친구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
나도 폭력을 썼음에도… 아니, 거의 일방적인 폭행이지.
그런데도 나한테는 온화한 태도를 보이는 경찰.
친구라면 정란이인가?
어제 정란이와 대화하던 게 떠올랐다.
어제 어디 가나 했더니 경찰서에 갔구나…
그러면 내가 협박 당하고 있다는 것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소리 내.
이걸 어떻게 설명 하냐…
눈앞이 까마득해진다.
이거 오늘 친구들이랑 놀기로 한 약속이 물 건너간 것보다 다른 친구들이 이 소식을 못 들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게 맞겠다.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양 옆구리에 남자들을 끼고 경찰 트럭 문을 열어 거칠게 던진다.
가차 없구먼.
말없이 뒷좌석 문을 연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는 내가 타자 다른 차를 타고 가버렸고 여경이 운전석에 탄다.
단발머리에 축 처진 눈매의 강아지를 연상하게 만드는 인상의 여경은 나에게 미소 지으며 말한다.
“혹시 불편한 점이 있으신가요?”
“아, 아뇨.”
아까 금목걸이를 두들겨 패던 여경이구나.
여긴 범죄자 두들겨 패도 문제가 없었나?
지난번에도 그러던데 딱히 뒷일 걱정을 하지 않는 듯 보인다.
여경은 그 말을 끝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조용히 있었다.
“오늘 서에 와주실 수 있나요? 불편하시다면 내일 오셔도 괜찮아요.”
“괜찮아요.”
오늘 일은 오늘 끝내야겠지.
오늘은 정말 피곤한 날이었다.
정말 피곤한 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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