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73화 (73/78)

〈 73화 〉 경찰서 구경

* * *

5년 동안 수정 속에 갇혀있던 기니피그의 육체는 시간의 흐름을 받지 않은 듯 멀쩡했지만, 정신은….

당연하겠지만… 그…

­맥 H. 빌로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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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다치신 곳이 없으셔서 다행이에요.”

한동안 말없이 서로 침묵을 유지하다가 여경이 어색하게 말을 걸었다.

경험이 많으신 분은 아닌가 보다.

“네. 워낙 적절한 타이밍에 오셔서…”

“에이, 사실 우리가 없었어도 다치시진 않았겠는걸요. 이미 상황은 다 끝났던데.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가 멀쩡하지는 않아서 구급차도 같이 불러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거든요.”

사실 그렇긴 하지.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차분하게 처리했으면 더 좋은 결과를 끌어낼 수 있었을 텐데 너무 급하게 처리하려고 했었네.

머리에 열이 올라서 마음이 조급해졌나 보다.

속옷 사진 정도는 조금… 아니, 아주 부끄러웠지만, 그럭저럭 넘어갈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무턱대고 밀고 들어간 거지만 역시 조금 더 시간을 들이는 편이 나았겠어.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된 초기의 나였다면 불안감에 아라 패거리에 휘둘렸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고작 그런 사진과 소문으로 날 떠날 친구들이 아니라는 것을.

방송도 내가 피해지니 시청자들이 동정하면 했지 줄어들지는 않겠지.

이번에는 너무 무대포로 밀고 나간 점이 없잖아 있지만… 하여튼 그렇다는 소리다

“아뇨.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 만약 사진이 인터넷에 뿌려졌다고 생각하면… 아찔해지네요.”

처음에는 델 리가 조처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붉은 화면으로 사이렌 소리를 내던 휴대폰을 익숙한 자세로 수거하던 경찰을 보면 아무래도 경찰이 무슨 조처를 했다고 보는 게 맞겠지.

테일리 세계랑 좀 다른 방식의 기술인가?

“아, 아니길 바랐지만 결국 그런 짓을 하려고 했다니. 가중처벌인데…”

어차피 끝장이라 상관 없을지도 모르겠다며 중얼거리는 여경.

이쯤 되니 궁금해진다.

판사의 판단마다 달라지기는 하지만 보통 법에 정해진 형량으로 하는 게 대부분이다.

~이하의 징역이나 벌금처럼 말이지.

미국 같은 곳은 좀 다를 수는 있지만, 거기는 선진국 중에서도 싱가포르 다음으로 엄벌주의적인 국가라…

그런 미국조차도 과한 엄벌주의로 재범률 폭증이나 교도소 포화 같은 문제 때문에 엄벌주의를 줄이고 있다고 하는데 과연 이 세계는 그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한 걸까.

“아, 그런데 어떻게 막으신 거죠?”

설명을 들어보니 인터넷을 관리하는 경찰들의 AI가 있는데 내 사진을 보여주고 나와 관련된 사진은 올라오자마자 모조리 차단하고 삭제한단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따로 가해자가 소유하고 있는 휴대폰을 가상의 인터넷을 만들어두고 거기에 연결해 고립시켜둔 상태란다.

AI가 가해자가 들어가는 사이트마다 게시글을 올리며 사람인 척 연기하며 속이고 범행을 저지르면 즉시 휴대폰을 장악해 모든 조작을 막아버리고 주변에 범죄자가 있다는 뜻으로 사이렌이 울린다고 한다.

이중으로 대처했구나.

이야기하던 중 어느새 차는 멈추었고 창문 밖을 바라보니 경찰서에 도착한 상태였다.

경찰서가 크고 로봇들이 돌아다니는 것만 빼면 내 기억 속의 경찰서랑 비슷한 모습이었다.

여경을 따라 안을 들어가니 묘하게 익숙한 뒤통수가 먼저 보였다.

조그마한 키.

약간 마르고 작은 덩치에 옷의 소매가 길어 삐쭉 튀어나온 손가락.

결정적으로 최근 물들기 시작한 노란 머리카락으로 인해 투톤이 되어버린 헤어.

특히 주변에서 쉽게 보기 힘들 정도의 비율이 엄청 좋은 슬렌더 체형.

아무리 봐도 정란이었다.

음, 내 친구.

이제는 어디를 가도 눈에 띄는구나.

아주 대단한 미인이 되었어.

“정란아?”

혹시 몰라서 불러보니 역시 정란이가 맞았다.

얼굴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귀여움을 보니 확실하군.

“기다렸어! 혹시 지난번처럼 다친 곳이라도 있어?”

상처를 확인하려고 하는지 몸 곳곳을 더듬는 정란이의 손을 붙잡고 아까의 일을 설명해줬다.

걱정 되는 건 알겠지만, 겉으로 봐도 드러나는 상처가 없는데 조금 걱정이 과했다.

“다행이다…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

“미안해. 다 끝나고 설명해주려고 했어. 진짜야.”

“퍽이나 그렇겠다!”

음… 사실 정란이에게 들키지만 않았다면 설명하려고 하지도 않았지.

나에 대해서 너무 잘 아는군.

정란이는 내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푹 쉬었다.

걱정 많이 하긴 했나 보다.

뒤에서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던 여경은 우리에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내 정신 상태를 걱정해서 그런지 조용한 방에 정란이와 함께 조서를 작성했다.

여경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필요할 때만 잠깐 끼어들어서 설명해주고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열심히 조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내 정신 상태를 걱정하기보다는 옆에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경악하는 정란이를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살짝 울먹이는 정란이의 손을 잡아주니 곧 진정했다.

이거 근데 정란이가 다른 친구들한테 말한 건 아니겠지?

다른 친구들이 이 사실을 알면 일어날 소동은 엄청날 텐데 걱정이네.

“정란아. 다른 애들은 이 일을 모르지?”

“응.”

휴, 다행이다.

조서를 제출하면서 내 휴대폰에 저장되어있는 협박성 짙은 문자를 증거로 제출했다.

천천히 내가 제출한 조서와 문자를 읽던 여경은 그 강아지상 얼굴이 악귀나찰처럼 일그러지는 모습에 살짝 쫄아버렸다.

성격이 좋게만 보였는데 은근 성깔이 있으실지도 모르겠어.

하긴 괴롭힘이 심하긴 했지.

악귀나찰처럼 일그러진 얼굴을 빠르게 수습하며 헤헤 웃는 여경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 가셔도 돼요. 재판 날짜가 잡히고 그때 출석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만약 출석하기 힘드시면 연락해주시면 좋겠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사하는 내 옆에서 정란이가 고개를 숙이며 꾸벅 인사한다.

그 모습을 보니 예의 바른 어린이가 인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는 건 실례겠지?

“아, 그리고 피고인이 자백하는 경우에는 대부분의 형사사건에서 피해자를 증인으로 소환하지 않아요. 굳이 출석하겠다면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말이죠.”

물론 대부분의 범죄자는 스스로 자백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증인으로 소환된다고 생각하라고 여경은 설명해줬다.

하긴 범죄자가 자신의 범죄 사실을 자백할 리가 있을까.

재판은 궁금해서라도 출석하고 싶은데… 증인으로 소환되면 어떤 식으로 다른지 한번 봐야겠다.

하… 이제 집에 돌아가네.

“있잖아… 예지야…”

밑을 내려다보니 정란이는 꼭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며 우물쭈물한다.

잘 나가다가 왜 그러는 거지?

한참을 걸어가도 말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도대체 뭘 말하고 싶길래 이러는 거야.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미안해… 네 허락 없이 일을 벌여놔서… 그 사진… 내 휴대폰에 옮겨놓고 경찰한테 보여주고 신고했거든… 협박당하고 있다고 설명도 했고… 아! 그 사진은 아까 그 여경분만 보셨어! 진짜야! 삭제도 해주신다고 했어!”

아, 그럼 그때 말한 나한테 미안할 짓 딱 한 번만 해봐도 되냐는 말은 이런 뜻이었구나.

생각해보니 경찰은 왜 정란이가 저녁에 신고했다고 말한 거지?

점심때 나갔는데 왜 신고는 저녁에 했지?

“상관없어. 사진이 뿌려질 뻔했는데 막혔으니 오히려 고마워. 나도 뿌려지면 부끄럽거든… 그런데 신고는 저녁에 했다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너 점심때 나갔잖아.”

내 말을 듣고 정란이는 몸에 힘이 풀린 듯 그 작은 몸을 휘청거렸다.

걱정돼서 팔을 붙잡았다.

“다행이다… 신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 멋대로 일을 벌여 놓기 미안한 거야. 그래서 경찰서 앞에 벤치? 거기에 앉아서 한참 고민했지. 내가 이러는 게 맞는 걸까? 예지 네가 예전처럼 힘들어하면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들을 많이 했는데 생각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저녁이었지, 뭐야.”

“마음고생 많이 했구나. 이제 신경 쓸 필요 없어. 다 끝났으니까.”

“응! 다 끝났네.”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잡고 돌아갔다.

고스트 사건도 그렇고 서예지의 과거도 이제 끝을 냈구나.

걱정되는 모든 일을 끝냈으니 이제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 된다.

집 앞에 도착하니 저 멀리서 익숙한 모습들이 보인다.

청회색 머리와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신나게 노는 친구들의 모습.

“얘들아~ 우리 왔어.”

“어! 너희들 어디 갔다 왔어?”

“그래! 말도 없이 사라져서 한창 찾고 있었잖아!”

“아… 데이트?”

“둘만? 얘네들 묻어버려!”

어제 일상에 딱 정란이만 추가되어 어제와 같은 일상을 반복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들은 즐거운 모습으로 뛰어놀았다.

여전히 어린애처럼 놀긴 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쫄딱 젖은 채로 집으로 돌아가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 코를 훌쩍였지만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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