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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74화 (74/78)

〈 74화 〉 재판

* * *

아침 햇살이 눈꺼풀을 비집고 들어와 자신의 존재감을 알린다.

“아…”

긴 속눈썹에 이제는 완전히 청회색이 되어버린 머리색.

키는…. 이제 정란이보다 약간 큰 정도?

슬며시 키 이야기를 물어본 적이 있는데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지.

오히려 눈에 띄게 예뻐진 것을 기뻐하는 분위기였다.

친구들 다 그런 분위기라 다행이네.

침까지 흘리며 나에게 달라붙어 있는 냥지를 떼어내고 기지개를 켠다.

이제는 가끔 팔다리를 배 위에 올리거나 올라타도 짓누른다는 느낌보다는 품 안에 안긴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오늘따라 개운하지 않고 나른한 게 몸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은 듯하다.

가벼운 병 정도는 걸릴 수 있다는데 그게 이거였나?

왜 그건 안 고쳐주냐고 물으니 그 정도 자잘한 병에 쓰는 에너지가 아깝고 그것까지 막으면 너무 재미없다는 대답을 했었다.

너무 자주 걸리거나 심하게 불편하다면 고쳐주겠지만 그 정도는 몸의 자연치유력에 맡기는 게 효율이 높다고…

그런데 재미없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소리야…

하여튼 찝찝하다는 소리다.

“오늘 밥은 뭐 먹어야 하지?”

항상 하는 고민.

무엇을 먹을지 고민을 하게 된다.

대부분 사람 다 비슷하지 않을까?

만들어 먹을지 그렇다면 무엇을 만들어 먹을지.

시켜 먹어도 똑같은 고민을 하겠지.

“엣취!”

코가 간질간질하더니 결국 기침을 하는군.

어제 종일 추운 밖을 돌아다녀서 그런지 결국 감기에 걸렸나 보다.

어쩐지 나른하더라.

조금 열이 있는지 더운 느낌도 들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감기에 걸려보네.

원체 건강했던 내가 이 정도면 다른 친구들도 비슷한 상태이지 않을까?

음, 난 아침부터 이 눈 오는 겨울날 땀 흘리고 눈밭을 뒹굴었으니 다를 수도 있겠다.

방에 다시 돌아와 냥지 머리에 손을 대보니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옆방으로 들어가 냥지 침대에 누워있는 예화와 정란이 머리에 손을 올려 열이 있는지 확인했지만 역시나 멀쩡했다.

음… 어제 코트가 걸리적거린다고 벗어 던지고 싸웠는데 후회막심이다.

어쩌겠어.

“흐객…”

방을 나가려고 하던 중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와서 다시 침대 쪽을 바라보니 예화가 코를 골며 정란이를 깔아뭉개고 있었다.

표정이 안 좋아지는 정란이가 안쓰러워 예화를 슬쩍 옆으로 밀어 다시 원래 자리로 원상복구 시켜주며 방에서 나왔다.

흠… 오늘은 몸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아 만들어 먹기도 귀찮으니 그냥 나가서 먹어야겠다.

어차피 재판 때문에 나가봐야 하니까.

혹시 깨울까 조심조심 방에 돌아와 옷을 꺼냈다.

팔이 하나밖에 없어서 옷 갈아입기가 상당히 불편했지만… 별수 없지.

델리도 곧 돌아온다는데 괜히 새 의수를 맞추기도 아까웠다.

“크응.”

코를 훌쩍이며 두꺼운 머플러를 목에 둘렀다.

너무 커서 코까지 가려지긴 하지만 꽤 따뜻했다.

그런데 거울의 내 모습을 보니 마치 닌자 같이 보인다.

머플러로 입과 코를 가려서 그런가?

머플러 하나로 이렇게 보이다니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인가!

“욥..! 엣취..”

나름 닌자 같은 자세를 취해보다가 다시 기침이 나왔다.

헛짓하지 말고 빨리 갔다 오자…

집 밖을 나오니 너무 일찍 나와서 그런지 문이 열린 가게가 보이지 않았다.

최대한 두껍게 옷을 입었는데 조금 춥게 느껴지네.

택시를 잡으려고 주변을 둘러보던 중 건널목 건너편에 문이 열려있는 가게가 보였다.

어느 세상을 가도 분식집은 있나 보다.

신호를 기다렸다가 길을 건너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니 내 기억 속의 분식집이랑 완전 똑…

[손님. 혼자 오셨습니까?]

똑같지는 않네.

종업원으로 보이는 원통 형태의 로봇이 나에게 다가왔다.

여태 본 로봇 중 제일 투박하게 생겼네.

“혼자 왔어요.”

[원하는 자리에 앉으세요.]

킁…

대충 중앙에 털썩 앉으니 로봇의 눈으로 보이는 파란 카메라 렌즈 두 개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원하는 메뉴를 골라주십시오.]

메뉴라…

그런데 여기는 로봇 혼자서 모든 걸 도맡아서 하는 건가?

주변을 둘러보니 로봇 말고는 아무도 없는데… 뭐, 상관없나.

메뉴는 떡만둣국 하나만 시켜야겠다.

감기에 걸렸을 때는 따뜻한 국물이 최고야.

“떡만둣국 하나요.”

[감사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조용히 부엌으로 사라지는 로봇을 보며 주변을 둘러본다.

가게 안을 천천히 관찰해보니 정말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이런 점을 보면 이 세상의 대부분 직업은 로봇이 차지한 게 아닌가 싶겠지만 의외로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가 대부분이었다.

유튜보 방송인의 편집자가 AI인 경우도 있는데 AI의 편집들은 연출이 정말 좋고 대단한 기술을 뽐냈지만 무언가 기계적이고 딱딱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인간의 웃음 코드를 살짝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고… 어쨌든 이건 다른 직업들도 전부 마찬가지라 aI가 완벽하게 우월한 게 아닌 취향 차이로 갈린다는 평이었지.

물론 편하다는 이유로 AI 웹 소설 편집자나 유튜보 또는 청소 업체의 로봇 그런 식으로 활용을 많이 했다.

청소 같은 건 확실히 인간보다 앞서는 모양.

요리도 항상 맛이 똑같다고 하지만 그게 좋은 사람도 있으니 음식점에서 가끔 볼 수 있는 편…

[맛있게 드십시오. 뜨거우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김치와 단무지 그리고 내가 시킨 떡만둣국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부엌으로 돌아가 무언가 청소를 하고 있었다.

떡만둣국은 평범하게 맛있었다.

역시 평범하게 맛있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물을 한입 먹어보니 뜨끈한 국물 때문인지 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로봇에게 돈을 지불하고 가게를 나섰다.

역시 몸이 안 좋을 때는 든든하게 밥을 먹어야 한다.

지나가는 AI 택시를 불러 세워 안에 탄다.

[어디 가십니까?]

“OO 법원을 가주세요.”

aI는 대답 없이 조용히 차를 출발했다.

택시답지 않게 말없이 차만 운전하네.

사람보다 AI 택시가 더 좋은 것 같아.

“엣취…”

코를 훌쩍이니 갑자기 차 안의 온도가 따뜻해진다.

몸도 좋지 않아 나른하고 따뜻한 온도 때문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중 차가 멈추어 선다.

도착했구나.

안내를 받고 들어가니 이미 다들 모여있었다.

변호사님이 앉아있는 곳에 다가가 내 자리에 앉으려고 했는데 웬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이건 뭔데?

“아, 오셨습니까. 굳이 안 오셔도 되는데…”

“아뇨. 그런데 이건 뭐죠?”

“피해자가 가해자를 보면 정신적으로 고통 받는 경우가 많아서… 하하..”

아니… 뭐냐고!

부스에 달린 문을 열고 자리에 앉으니 안에 모니터가 하나 보였다.

대충 어떤 식인지는 알 것 같은데 너무 과보호가 아닐까?

모니터 옆에 작은 쪽지가 붙어있길래 한번 내용을 읽어봤다.

판사님의 입장과 동시에 재판이 진행되었다.

들어오신 판사님의 인상은 정말 어딘가의 성직자로 보이는 인자한 인상이었지만 재판이 진행되자 냉혹한 인상과 엄격한 말투로 재판을 진행했다.

오기 전에는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지는 않았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안색이 좋지 않은 성아라의 모습은 볼만했지만…

“반성하고 있습니다…”

반성문을 제출하고 판사가 거절하는 모습.

“수많은 피고인이 저를 거쳐 갔지만 단 한 번도 사과문을 피해자한테 제출하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군요. 다들 반성하는데 왜 피해자가 아닌 저한테 제출하는 건지 이해를 하지 못하겠습니다. 판사가 아닌 피해자한테 반성문 제출로 바뀐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말이죠.”

“죄송합니다…”

힘없이 중얼거리지만, 판사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고 반성문을 피해자에게 쓰지 않으며 죄를 뉘우치고 흘리는 눈물과 사과도 모두 저한테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애초에 반성하지 않고 있는 게 아닐까? 그저 죄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반성하는 척을 하는 것이 아닐까?”

“아닙니다! 정말 반성하고 있어요!”

음… 그런데 판사가 이렇게 해도 되는 걸까?

꼭 영화나 미국 법정 라이브를 보는 느낌이네.

아라에게 고용된 변호사가 열심히 변호했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고 판사는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거기서 내가 할 말은 딱히 많지 않았다.

나를 배려하며 조심스럽게 내게 발언하라며 주의 깊게 들었고 나는 그저 내가 당했던 일을 말할 뿐이었다.

내 변호사도 그냥 있었던 일을 늘어놓을 뿐이었고.

“허, 그것참 이상하군요. 당신은 언제든 멈추고 피해자한테 사과할 기회가 분명 있었을 겁니다. 정말 그 누구도 당신을 말린 적이 없었습니까? 당신이 정말 잘못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녕 인지하지 못했단 말입니까? 당신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을 터인데?”

“예지야… 미안해…”

이제 와서 사과하긴 너무 늦지 않았을까?

과거 목숨을 위협한 적도 있었는데..?

그런데 아무리 확실한 현행범이라고 하지만 무죄 추정의 원칙이 보통이지 않나?

아라의 변호사가 말할 때마다 무언가를 확인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중립적인 모습을 보여줬지만, 판사는 가끔 날카롭게 날 선 발언을 내뱉기도 했다.

주로 아라가 거짓으로 자신의 범죄를 자꾸 축소하려고 할 때마다 공격적인 태도로 말하는 것 같았다.

옆의 변호사가 아라를 말렸지만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한 아라의 태도에 한숨을 쉬며 계속 변호를 했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본 나의 심정은… 집에 돌아가고 싶다?

감기 걸렸는데 괜히 왔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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