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긴급 호출(1)
* * *
깜깜하고 어둡다. 안개가 자욱하다. 양손에는 총자루가 쥐어져 있다. 고개를 들어 눈 앞을 바라보았다. 높은 철창. 무너진 벽. 부서진 천장. 연신 울어대는 까마귀 떼... 익숙한 건물이다.
"꿈이군."
글쎄, 하루를 시작하기엔 좋지 못한 꿈이다. 썩 좋은 과거였다고 말하긴 뭐해서, 이런 식으로 옛날 모습을 상기할 때마다 적지 않은 불쾌감이 든다.
"이럴 땐 보통 볼을 꼬집던가."
민간요법을 시행해 봤지만, 아쉽게도 꿈에서 깰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요즘 신시아에게 너무 시달렸던 걸까. 한동안 꾸지 않던 악몽까지 꾸고는.
"음..."
총을 만지작거린다. 아마 높은 확률로 이걸 관자놀이에 대고 쏜다면 꿈에서 깰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 조심스레 건물 안으로 발을 내딛는다.
내 기억력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꿈이라 보정이 작용하는 것인지, 의외로 수월하게 내가 생각하는 장소에 들어올 수 있었다. 퀴퀴한 냄새. 주변에는 '무언가'가 들어있던 쇠우리들이 가득하다.
좀 더 깊숙이 들어간다. 모퉁이가 보인다. 저 모퉁이를 돌면, 아마 그녀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이 장소를, 난 절대 잊을 수 없다.
모퉁이를 돌았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텅 비어있다. 철창이 구부러져 있는 걸로 보아, 누군가가 자력으로 탈출한 듯싶다. 역시 사람의 기억은 확실하지 않은 거겠지.
철컥. 총을 관자놀이에 대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다. 어디 보자, 일단 일어나면 어젯밤에 미처 다 못 끝낸 서류를 정리하고, 내 앞으로 온 편지를 정리하고...
"누구...?"
익숙한, 그러면서도 아련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
"당신, 누구?"
누더기 옷차림. 길게 헝클어진 아이보리색 머리. 깊고 슬픈 눈동자. 세상의 축복을 받지 못한 소녀가 내 앞에 서 있다.
"...신시아."
조용하고 낮게 그녀의 이름을 읊조린다.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런 표정을 지었지. 어느 누구도 불행하게만 살아서는 안된다. 그렇기에, 나는 신시아의 손을 잡았다.
"가죠, 신시아."
이것이 꿈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가녀린 손을 붙잡을 것이다.
"응, 신부님."
소녀의 모습이 바뀌어간다. 비교적 작은 사이즈의 수녀복. 은색의 로자리오를 걸치고, 정돈된 생머리를 뒤를 쓸어내리며 밝은 웃음을 짓는 모습.
"신부님. 신부님. 신부님."
신시아의 웃음소리가 주위를 가득 채워나간다. 하하, 꿈이라도 이렇게 웃어주니 정말 좋구나. 그런데... 신시아가 원래 두 명이었나?
"신부님? 무슨 일이야?"
"신부님! 같이 놀자!"
눈을 깜빡인다. 두 명이었던 신시아가 어느덧 다섯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신부님! 신부님!"
"오늘은 신부님을 위해 빵을 구워봤어!"
"전부 먹어줘야 해?"
"신부님한테 시집갈래!"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까?"
한 번 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신시아는 어느새 한 부대로 늘어났다. 이쪽으로 달려든다. 신이시여...!
"구해주...!"
눈에 햇살이 비친다. 다행히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난 듯하다. 이 또한 나의 신실함에 대한 신의 축복이 아닐까. 정말이지, 끔찍했다. 나는 어째서 그런 꿈을.
"으응..."
이불 밑에서 익숙한 무게감과 온도가 느껴진다. 조심스레 이불을 들춰본다. 역시나, 내 위에 신시아가 올라타 있었다. 마치 담벼락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고양이처럼.
"신부님... 노올자..."
혹시나 나도 모를 심층심리가 부도덕적인 마음을 품고 있는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 이유 때문에 꿈을 꾼 것은 아닌 것 같다.
"신부님... 결혼..."
아무리 신시아가 곧 성인식을 치룬다 해도, 그녀의 과거를 생각하면 아직 그녀의 정신은 성숙치 못하다. 섣불리 손을 대어서는 안된다. 그녀도 결코 그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읏차."
"꺄앗!"
이불을 돌돌 매, 그대로 신시아를 롤케이크마냥 굴렸다. 잠에서 깬 신시아가 내 쪽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신, 신부님! 무슨 짓이야!"
"대체 무슨 꿈을 꾸길래 침으로 제 침대를 적시는 겁니까?"
"적셔? 나, 나 설마 벌써 해버린 거야?"
"헛소리는 꿈에서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우으... 신부님이랑 알콩달콩 결혼하는, 그런 행복한 꿈을 꾸고 있었는데."
내 심정은 조금도 생각지 않고, 실컷 잠을 즐겼을 신시아를 생각하니 괘씸해진다.
"오늘 아침은 제가 직접 준비하겠습니다. 당근 수프에 당근 샐러드, 거기에 당근잼을 가미한 번을 준비하도록 하죠."
"그건 안 돼!"
* * *
"이쪽이 오늘 로렌스 신부님 앞으로 전달된 편지들입니다."
"항상... 수고가 많습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편지를 낑낑거리며 배달한 배달부 소년에게, 감사의 인사와 함께 아침에 남은 당근 수프를 좀 챙겨주었다.
"와, 감사합니다, 신부님!"
"항상 신들의 보살핌이 함께 하길."
보자, 아무래도 오전 시간은 편지 답장에 시간을 전부 써야 할 판인데.
"놀자! 신부님, 노올자!"
"오늘은 안 됩니다. 우선은 맡은 일부터. 성실과 근면은 신들의 오랜 가르침 중 하나죠."
"오늘은 주말이잖아! 책에서 그랬어. 주말에는 다들 일을 내려놓고 쉬는 거라고!"
"성직자에게 주말은 없습니다. 오히려 주말이 더욱 바쁘죠."
"으으으으으..."
그렇게 신시아를 의자에 책상에 앉혀놓고 편지 더미를 살펴볼 무렵, 익숙한 인장을 하나 발견했다.
"음, 이건?"
다른 편지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황금색의 인장. 나는 이 인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추기경님?"
성국을 다스리는 최고 권력자 교황. 그리고 그 바로 아래에 있는 추기경들. 그들 중 한 명인 추기경 오를란도의 인장이 분명했다.
"아니, 이렇게 중요한 게 왜 여기에. 아니, 그분 성격이면 충분히 가능한가."
꼭 중요한 데서 실수를 하시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화 없다. 뭐 그래도, 크게 중요한 편지는 아닐 것이다. 아마 저번에 올린 신시아의 보고에 대한 답변이겠지. '신시아를 잘 보살펴라'라는 내용의 반복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편지봉투를 뜯었는데.
"......"
"응? 뭐야뭐야? 높으신 분의 편지?"
"신시아."
"왜 그래, 신부님?"
"지금 당장 짐을 싸도록 하죠."
"뭐?"
편지 속의 내용은 예상외였다.
'1급 긴급 호출'.
* * *
"그럼 성당을 잘 부탁드립니다, 이사도라 자매님, 베티 자매님."
"맡겨만 두세요!"
"저, 그, 계속 안 돌아오시는 건 아니죠?"
"걱정 마세요. 일이 잘 해결되면 다음 주 즈음에는 돌아올 겁니다."
활기찬 미소로 손을 흔드는 베티 수녀. 그리고 그 옆에서는 이사도라 수녀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다. 그리고 신시아는.
"베에."
내 옆에서 이사도라 수녀에게 메롱을 하고 있다.
"신시아의 사복 차림은 생소하군요."
"그러는 신부님은 오늘도 사제복이네."
"이게 가장 마음이 안정되거든요."
"그런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아, 신시아는 기억에 없겠군요. 제법 볼거리가 있는 곳이에요."
"바다? 아니면 시드르 호수?"
아쉽게도 관광은 아니다. 애초에, 추기경의 호출이라면 목적지는 한 곳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성도입니다. '성도 닌우르타'. 교황님이 계신 그곳이죠."
"교황님?"
물론 교황님을 뵈러 가는 것은 아니다. 편지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특수 임무 발생. 로렌스 프랑 외 4인은 성도로 집결할 것. 그리고 로렌스, 너는 신시아를 반드시 데려올 것.'
대충 눈치챘다. 아니, 노골적으로 눈치를 준 셈이다. 이번 호출의 목적은 아마도...
"로렌스 오빠, 아니 신부님, 혹시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거야!?"
신시아, 너 때문이니 부디 조용히 해줘라.
* * *
"우와!"
"신시아는 마차가 처음이죠?"
"응! 엄청 빨라!"
덜컹거리는 마차 바퀴 소리. 열린 창 틈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자유'를 만끽하지 못했던 신시아에게는 꽤나 색다른 체험이 될 것이다.
"저기, 저 성문이 성도야?"
"어디, 네, 맞네요. 저기가 성도 닌우르타입니다."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저 앞으로 거대한 성벽이 보인다. 순은색의 성벽. 아마 마왕이 쳐들어와도 저 성벽에는 흠집 하나 안 날 것이다.
마왕이 내부에서 나타나는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 * *
"자, 신시아, 손을 주세요."
"으, 응!"
아직 마차에 익숙하지 않은 신시아를 위해 손을 내밀었다. 신시아의 얼굴이 무척이나 빨갛다. 역시 초보자는 멀미가 익숙하지 않은 거겠지. 교황청에 가기 전에, 편히 쉴 곳을 찾아볼까.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성벽 앞의 마차 정거장에서 내리자, 경비병 두 명이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분명 이 정도까지 경계가 심하지는 않았는데. 마왕의 전조가 나타난 영향이 생각보다 크다.
...저 마력 감지기, 신시아는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저는 남서부 생트 마을에서 온 로렌스 신부입니다."
"일행의 신분을 확인하겠습니다."
생각보다 강압적이군. 그렇다면야.
"여기, 추기경 님의 직속 문서입니다."
"네!?"
"긴급 호출입니다. 한 시가 급한 상황입니다. 아니면, 책임을 질 수 있으십니까?"
"아, 아닙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신부님."
휴. 안심한 얼굴을 애써 숨긴다. 신시아를 바라본다. 이번엔 경비병을 향해 '메롱'거리고 있다.
성벽의 건너편은... 그야말로 종교의 도시이다. 웅장한 색채의 건물들, 신성함이 느껴지는 장식물, 엄숙한 분위기의 사람들. 그야말로 '성도'에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오랜만에 이곳에 오지만, 분위기는 여전하다.
"신시아, 제 말 잘 들어두세요."
"응, 뭔데?"
"여기서는 절대로, 절대로 그 로자리오를 벗어서는 안됩니다. 저희 마을에서는 그렇다 쳐도, 여기는 사방이 성기사와 사제 투성이에요. 기이한 마력에 가장 민감한 건 그들입니다."
"튀는 행동은 하지 말라는 거지? 알았어!"
다행히 신시아는 내 말을 잘 이해한 것 같다. 이대로 최대한 시선을 피한 채 교황청으로 가면 될 것이다. 보자, 여기가 대광장이니 북쪽으로 가면.
"이봐, 거기!"
그떄, 후드를 눌러 쓴 한 남자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너구나?"
"무슨 일입니까? 혹시 사람을 잘못 본 건..."
"이 꼬맹이가 '마왕 후보자', 맞지?"
"......"
망했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