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광란의 밤(2)
* * *
눈을 감으면 목소리가 들려.
신시아, 오늘은 무슨 책을 읽었나요.
신시아, 같이 시장이라도 갈까요?
신시아, 머리가 다 헝클어졌네요. 여기 앉아 볼래요?
신시아, 간밤은 잘 잤나요?
신시아, 내일의 안건은...
신시아, 오늘도...
신시아...
'신시아'.
신부님이, 로렌스 오빠가 내 이름을 불러줄 때마다 자꾸 미소가 드러날 것만 같아. 신부님 곁에 있고 싶고, 신부님이 매일 나에게 이름을 속삭여줬으면 해. 신부님과 한 탁자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잘 때는 신부님의 곁에서 행복한 꿈을 꾸고 싶어.
맞아. 난 신부님을 좋아해. 신부님이 보내는 눈빛은 태양처럼 밝고, 신부님께 안길 때 느껴지는 숨결은 봄바람처럼 싱그러워. 신부님의 품은 너무 따뜻해서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고, 신부님이 내 몸을 만질 때면 온 감각이 곤두서버려.
이건 비밀인데, 사실 로렌스 오빠에게 죄를 지은 적이 있어.
낙엽이 지는 가을이었어. 거실에 나가보니, 오빠가 의자에 앉아 곤히 잠들어 있는 거야. 읽다 만 책은 바닥에 떨어져 있고,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고요하게 잠들었지.
그만 보고만 거야. 로렌스 오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려 보기도 하고, 바람을 후, 불어보기도 하고. 하지만 로렌스 오빠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어.
그래서 그만, 저질러 버렸어. 오빠가 깨지 않게 조금씩, 아, 혹시 입냄새는 나지 않을까. 마침내 오빠의 얼굴 코 앞까지 다가갔을 땐 망설이기도 했지. 평소의 나답지 않게, 이럴 때만 수줍어하고.
쪽, 하고. 동화책에 나오는 마법의 키스처럼, 그렇게 입을 맞췄어. 이건 비밀이야? 로렌스 오빠는 둔감해서, 아마 절대로 모를 테니까.
첫 키스는 사과맛이었어. 오빠가 간식으로 애플파이를 먹었던 탓일까. 그래도 그 달콤함이, 오돌토돌한 촉감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
하지만 그런 즐거운 추억을 하나 둘 덧그릴 때마다, 그 안 쪽에서 불행한 기억들이 방울져 떠올라.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억하는 곳. 어둡고, 축축하고, 차갑고, 거슬릴 정도로 조용한. 어느 작은 푸른색의 건물. 내가 '신시아'가 되기 이전의 기억은 거기에 머물러 있어.
아팠어.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지르고 싶었어. 매일 주사를 맞고, 발목에 사슬이 묶여. 무언가의 잔해를 입 속에 욱여넣고, 영문모를 주기도문을 계속해서 읊어.
아, 나왔어! 하얀 옷을 입은 악마들... 저들에게 밉보이면 안 돼. 잘못했다간 또 채찍과, 칼날과, 전기와, 불꽃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
'신시아.'
...헤헤, 또 옛날 생각을 해버렸네. 그래도 괜찮아. 신부님이 '신시아'라고 불러주면 언제든 악몽에서 깰 수 있으니까. 그래. 나는 '신시아'야. 신시아 생크 프랑.
신부님에게 내 이름 뜻을 물어봤어. '생크 수도원'에서 태어난, '프랑'이라는 성을 가진, '신시아'라는 뜻 이래. 그래서 또 물어봤지.
'그럼, 신시아는 무슨 뜻이야?'
'신시아 말이죠? 어원을 찾아봤는데, 고대의 어느 신화에 나오는 '디아나'의 별명에서 유래를 했다네요. 그 여신이 어린 시절 '킨티아 산'이라는 곳에서 뛰어놀았다는 점에 착안해서 만들어진 이름이에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즐겁게 뛰어논다는 뜻이 있잖아요. 앞으로 신시아가 할 일인데,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우, 방금 지어낸 거지?'
'하하, 솔직히 말하면 신시아라는 이름은 제가 즉석에서 떠올린 거였어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
'혹시 마음에 안 드나요?'
으응, 설마 그럴 리가. 나는 웃으면서 말했지.
'아니, 정말 좋아!'
로렌스 오빠가 지어 준 이름이야말로, 나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니까.
로렌스 오빠는 가만 보면 너무해. 내 마음이 어떤지 알면서, 내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자꾸만 거부를 하니까. 법전을 찾아봤는데, 나도 올해부터 마음껏 결혼할 수 있대. 로렌스 오빠의 허락도 필요 없대!
오빠는 항상 이렇게 말해. 신시아가 더 크고 나서, 정말로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결혼을 생각하라고. 지금 자신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 아닌 '동경'이라고. 좀 더 성숙해지고 나서도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받아주겠다고.
로렌스 오빠는 정말 바보야.
내 마음은 절대로 변하지 않아. 신시아는 신시아야. 로렌스 오빠를 사랑하지 않는 신시아는 없어. 있을 수 없어. 그때는 이미 신시아가 아닐 테니까.
나한테는 꿈이 있어. 언젠가 수도원을 떠나 로렌스 오빠랑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거야. 물론 결혼식은 수도원에서 하구! 황토색 벽돌집에 꽃발을 가꾸고. 자식은... 10명만 낳고 싶어! 분명 모두 귀여울 거야. 귀여운 로렌스 오빠의 자식들인 걸.
로렌스 오빠가 처음 내 손을 잡아준 그때부터, 이미 내 운명의 실은 이어져 버렸어. 그러니까 책임져 줘. 나도 오빠만을 바라볼게. 매일 오빠의 이름을 속삭이고, 오빠를 위해 노래를 부르며, 오빠를 위해 봉사할 거야. '신시아 프랑'이라는 이름, 바꿀 필요가 없겠네.
'신시아.'
봐. 지금도 들려. 로렌스 오빠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 오늘도 잘 수 있어. 오늘도 행복한 꿈을 꿀 수 있어. 오늘도, 악몽을 꾸지 않을 수 있어.
* * *
"신시아? 정신이 들어요?"
"...오빠."
신들이시여, 감사합니다. 다행히 신시아가 정신을 차렸다. 아직 눈빛이 조금 몽롱해 보이지만, 내 얼굴을 알아볼 수는 있다.
"...추워."
"아, 미안해요, 신시아. 아마 잠옷만 입고 있어서 그럴 거예요. 그, 속옷을 입혀주고 싶었는데, 제가 잘 몰라서."
"배, 고파."
"아, 혹시 몰라서 사과를 좀 준비해놨어요. 금방 준비할 테니 좀만 기다려 줄래요?"
신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휴, 정말로 다행이다. 식욕이 있다는 건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지금 신시아의 상태는 일종의 마력 탈진이니, 푹 쉬고 잘만 먹는다면 금방 상태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좋아. 저 상태면 무리 없이 내일 임무에 참가할 수 있겠어. 아니지, 혹시 모르니까 추기경 님께 부탁드려 임무에서 빠져야 하나.'
탁자로 가 사과를 깎으며 생각을 정리한다. 신시아의 상태를 예의 주시하는 것도 내 임무 중 하나이니, 역시 추기경 님께 말씀을 드려야...
"로렌스 오빠."
"그래요, 오늘은 마음껏 어리광 부려도 좋습니다. 무슨 일..."
뒤돌아 봤을 때, 신시아가 침대 곁에 구부러니 서 있었다.
"신시아? 아직 걷는 건 좋지 않아요. 좀 더 안정을..."
"추워."
신시아의 바지가 바닥 한구석에 떨어져 있다. 혹여나 보일 세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신시아, 바지가 내려가 있네요. 그, 일단, 조금씩 보이니까 바지부터 올려줄래요?"
"로렌스 오빠."
휙. 방 안을 은은하게 밝히던 촛불이 갑작스레 꺼졌다. 창문 밖에서 들어오는 달빛만이 신시아를 비추고 있다.
"나, 너무 추워."
간드러진 목소리와 함께, 신시아의 상체에서 웃옷마저 떨어져 나갔다.
"신, 신시아. 또 폭주하고 있는 거죠? 그렇죠?"
"으응, 아니."
신시아가 목에 걸린 로자리오를 붙잡았다. 아직 미약한 마력이 남아있을 그 장신구. 툭, 하고. 신시아는 미련 없이 그것을 뜯어냈다.
"난 진심이야."
달빛에 신시아의 나체가 비친다. 다리부터 올라오는 매끄러운 곡선. 수줍게 파인 배꼽. 아담한 크기의 흉부와, 땀이 송글 맺혀 굴러가는 목덜미.
그리고 표정. 가늘게 뜬 눈과 발그스름해진 볼이 내 정신을 흐리게 한다. 보지 않으려 해도, 달빛 때문에 눈에 담기는 건 오직 신시 뿐이다.
"로렌스 오빠."
항상 신부님이라고 불렸던 거에 대한 반발일까, '오빠'라는 단어조차도 신시아의 매혹으로 느껴졌다.
"이제야 나만을 봐주네?"
"신, 시아."
"착한 아이로 있어보려고 노력했는데, 난 역시 나쁜 아인가 봐."
"신시아. 당신은 참을 수 있어요. 마왕에게 지면 안 됩니다."
어쩌면 참을 수 없는 건 내 쪽일지도 모르겠다.
"오빠는 바보야."
"네?"
"로렌스 오빠를 정말 좋아하는 건 신시아야. 오빠랑 몸을 섞고 싶어 하는 건 마왕이 아니라 나란 말이야."
"신시아..."
달빛을 머금은 신시아의 몸이 내게로 다가온다. 물러서야 하나? 아니, 그러고 싶지 않다.
"로렌스 오빠, 날 받아 줘. 춥지 않게, 꼭 껴안아 줘."
"이런, 이런 방식으로는 안 됩니다."
"합."
입술이, 맞닿았다. 내게 악마가 속삭일 때 항상 떠올렸던 신시아의 입술이, 그 꽃잎이, 내 입술을 촉촉이 적셨다.
"헤헤, 해버렸다."
"읍, 이건, 신시아!"
"푸후, 오빠 얼굴이 그렇게 빨개진 건 처음 봐."
신시아의 가녀린 손이 내 품을 파고든다. 사제복의 틈새 사이로 손을 집어넣더니 이곳저곳을 더듬기 시작한다.
"로렌스 오빠의 몸은 따뜻하구나."
"신시아, 그런 곳은, 읏. 만지면..."
"오빠도 만질래?"
눈이 마주쳤다. 눈은 붉지 않다. 그렇다면 이건 신시아 개인의 의지인가.
"내 몸."
시선이 내려간다. 신시아의 살결, 곡선, 지방, 쇄골.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내 몸을 달아오르게 만든다.
"오빠라면 좋아."
그만.
"목도, 가슴도, 등도, 배도, 허리도, 허벅지도, 손가락 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어디든."
그만해.
"가장 소중한 곳도. 언젠간 오빠에게 줄 생각이었으니까."
"그만하세요, 신시아!"
바닥에 떨어진 로자리오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모든 소임을 끝마치기 전까지는.
"신시아는 좀 더 자기 몸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우으..."
"신시아? 우는 겁니까?"
"오빠는, 훌쩍, 내가, 싫어?"
"그럴 리가 없잖아요, 신시아."
"항상, 크흥, 밀치고, 거부하고. 나도, 훌쩍, 용기를 낸 건데!"
......
신시아, 저는 당신을 처음 데려온 순간 맹세했어요. 당신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해주겠다고요. 당신이 저를 좋아한다면, 저는 당신의 마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겁니다. 하지만 아직은 안 돼요. 모든 건 일이 끝나고 나서. 우리 둘 사이에 '마왕'같은 사소한 게 사라지고 나서부터. 그때부터 당신을 품에 안을게요.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못 알아들을 게 뻔하니까.
"이게 제 대답입니다."
"으읍!?"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있다. 누군가가 우는 소리. 슬픔에 겨운 소리. 그게 신시아라면 더욱 참을 수 없다.
그렇기에 막았다. 내 입으로. 신시아의 입술을 차분히 음미한다.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하다.
"푸하."
"알아주겠어요?"
"...응."
신시아는 옷을 주워 입고 침대에 누웠다. 흥분을 가라앉힌 나도 잘 준비를 했다.
"저기저기, 신부님."
아, 다시 신부님이라고 부르는구나.
"무슨 일이에요, 신시아?"
"한 번만, 한 번만 더 해줘."
아기새가 먹이를 달라는 듯이, 입술을 삐쭉 내민 신시아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몰랐다. 그대로 한 번 더 입을 맞추고는, 신시아의 귀에 속삭인다.
"좋은 꿈 꿔요, 신시아."
* * *